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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20.시작된 신화(神話)
천상신의의 일고 긴 이야기가 종결된다. 허무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원 천장을 바라보
고 있는 천상신의 얼굴엔 힘이 없다. 외손녀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오르는 듯, 천상
신의는 슬픈 기색을 띠면서도 간간이 미소를 짓는다.
“허허... 사 소협, 노부의 얘기는 여기서 끝이오.”
“... 그렇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문도는 금문택의 서글픈 눈을 떠올려본다.
‘왜 금 대협이 그런 눈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완전히 이해가 됐다.’
천상신의에게 포권을 한 사문도는 밖으로 나간다. 보름달이 되어가는 달과 함께 초롱
초롱 빛나는 별들이 사문도를 반기고 있다.
‘남은 시간은 단 이틀... 홍무극의 팔기군은 그날 분명 이곳을 지나칠 것이다.’
마음으로 되뇌고 있는 사문도는 갈등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금 대협을 끌어들이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해. 적어도 모레 술시 이후부터는 이곳을
비워야 하는데, 그 사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들여야 한다니...’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이틀 남짓. 그 시간동안 사문도는 금문택을 설득하리라 마음먹는
다.
‘해 보긴 하겠지만... 이거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군. 먼저 갔다가 돌아오자
니 그땐 금 대협은 떠난 후고, 설득을 하자니 시간이 없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사문도도 무척이나 초조한 모양이다. 그럴
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사문도는 그리로 시선을 돌린다.
“사 소협... 여기 있었소?”
금문택이다. 사문도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초조한 기색이 모조리 지워진다.
“찾으셨소?”
금문택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모조리 지운 초조함인데도 금문택은 그
기색을 알아챈 듯하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안색이 영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소.”
사문도는 아니란 듯 손을 내젓는다.
“아니오. 별일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시고... 그보다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시겠소?
”
사문도의 질문에, 금문택이 얼굴을 굳히며 조언한다.
“몸조심하시오. 쌍웅쌍화가 잔뜩 벼르고 있소이다.”
“...”
“어떻게 장주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소협을 찾고 있소.”
“... 조언해주신데 대해 감사하오.”
사문도가 포권을 하자 금문택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한다.
“당분간은 밖에 돌아다니지 마시오. 사 소협의 무공수위를 의심하는바 아니나, 그들
뒤엔 중원무성이 있으니 말이오.”
“중원무성이라... 후후.”
실소를 뱉으며, 사문도가 이빨이 거의 다 빠져버린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두른다.
“...”
불나방 한 마리가 날개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하지만,
그게 아닌지라 금문택은 감탄한 얼굴이다.
“대협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이틀 후면 떠나야 하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다. 금문택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묻는다.
“그 말, 진심이오?”
“먼저 간 수하가 기다리고 있을 거요. 금 대협의 일 덕택에 잊고 있었지 뭐요.”
사문도는 고소(苦笑)지으며 자신이 날개를 제거한 불나방을 바라본다.
“마지막 부탁이오... 날 따라와 주시오.”
사문도의 얼굴은 진실하다. 금문택은 그 얼굴을 보기 미안한 듯 고개를 돌린다.
“... 미안하게 됐소만, 난 아직 소협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소.”
금문택에게서도 희미하게 고소가 피어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
고 있는 것이다.
“후... 알겠소.”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더니 금문택을 뒤로한 채 걷는다. 걸으면서도 금문택에게 하는
당부는 잊지 않는다.
“늦어도 좋소. 마음이 움직이면 떠나기 직전이라도 와 주시오.”
“... 그러겠소.”
사문도는 분명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다. 거절할 때의 금문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사
문도의 얼굴은 차차 흐린 빛을 띤다.
‘기다려 보겠어. 이틀 후 술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금 대협을 믿어 보겠어!’
그로부터 하루 하고도 열한 시진이 흘렀다. 술시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반 각.
사문도는 용번과 식사 외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로지 팔기군과 금문택
생각뿐이었으니까.
잠도 푹 잤겠다, 몸도 풀어 놨겠다... 사문도는 이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녁때가 다 됐군. 뭐, 먹고 움직일 채비나 해봐야겠어.’
몇 개 없는 짐을 챙기며, 사문도는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런 사문도의 얼굴은 긴장으
로 인해 약간 창백하게 보인다.
‘천하의 고독랑이 긴장을 하다니, 천비가 알면 기절하겠군.’
사문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엌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린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사문도를, 부엌 사람들이 반긴다.
“사 소협 오셨습니까?”
“아, 예. 죄송한데, 저녁 좀 일찍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안쪽으로 크게 소리친다.
“어이, 밥 한 그릇 추가다!”
“그러겠네!!”
‘추가’란 말에, 사문도는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묻는다.
“저처럼 예약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네, 금 대협께서 방금 전에 왔다 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씁쓸한 얼굴로 돌아서는 사문도를 그 하인이 세운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헤헤, 손님께 죄송합니다만. 우리 금 대협께 밥 좀 갖다 주시겠습니까? 정말 송구스
러운 일이지만, 지금 일손이 한창 바쁜 시간인지라...”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 소협.”
몇 번이고 공손하게 사과하는 하인을 말리고, 사문도는 부엌 외벽에 기대어 상상의 나
래를 편다.
‘빠르면 오늘 밤이다. 빨리 나타나야 그만큼 빨리 천비에게 합류할 수 있을 터인데..
.’
사문도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질 줄 모른다. 나라 걱정에다가 자신의 운명 걱정까
지 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얼굴을 펴고 웃을 기회가 있겠는가.
‘기분이 영 별로다. 역시, 일을 확실하게 안 끝맺으니 기분까지 지저분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사문도에게, 별안간 뇌성(雷聲)같은 소리가 쏟아진다
.
“사 소협,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빨리 안 갖고 가시면 다 식습니다!!!”
그러자 사문도는 얼른 상상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그리로 달려간다.
“네, 네 알겠습니다. 이젠 염려 놓으십시오!”
밥상엔 정확히 한 그릇의 밥과 조기 한 마리, 그리고 여름나물이 조금 쌓여 있다. 그
를 보고 사문도는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내뱉으며 밥상을 들고 달린다.
“조선 사람들은 검소한 사람인가 봐.”
금문택의 방 앞에 도착한 사문도는 밥상을 내려놓고 금문택의 방문을 휙 열어젖힌다.
그러자 하품을 하고 있는 금문택의 면전이 정확히 눈에 들어온다.
“으하... 소, 소협... 여긴 어쩐 일로...?”
“아... 저녁 식사 갖고 왔소.”
금문택에게로 밥상을 밀자, 밥상이 스르르 밀리더니 정확히 금문택 앞에서 멈춘다.
“맛있게 드시오. 난 이만 가 보겠소.”
“장주(長州)를 뜨는 것이오?”
금문택의 질문에, 사문도는 고소를 짓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 그럼, 쌍웅쌍화와 마주칠 확률이 극히 높을 터인데...”
“직접 처리해야 할 놈들이 있소.”
“!!”
삽시간에 금문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처리란 말이 왠지 모르게 와 닿았던 것이
다.
“나오거나 하지는 마시오. 처리할 놈들만 처리한 뒤에, 이곳에서 영영 뜰 생각이니까
말이오.”
사문도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문택은 자신의 생각을 묻는다.
“... 누굴 죽이는 거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
“세상에 사라져야 할 자들은 없소. 사라져야 한다는 이유는, 소협 당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금문택의 말에도 사문도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다가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
“물론 내 생각이오. 하지만 금 대협, 대장부로 태어난 이상은... 자신의 조국과 지켜
야 할 자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만 하는 거요. 3년 전의 대협처럼.”
“!! 이, 이보시오, 사 소협!!”
금문택은 멍한 얼굴로 사문도가 서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바람 같은 속도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과거를 읽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만 한다고...?”
혼잣말을 되뇌며, 금문택은 머리를 감싸 쥐고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다.
‘어쩌면 난... 내 인생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그냥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르
겠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금문택은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부르르
떤다.
모르고 있다. 운명의 끈은, 이미 자신에게 감길 대로 감겨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밥을 다 챙겨먹은 사문도는, 일단 장주의 번화가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불빛
, 야밤인데도 여전히 북적이는 사람들 등이 사문도를 감탄하게 만든다.
‘분위기는 꼭 항주(杭州)같군. 물론, 항주 홍등가(紅燈街)에 비하면 영 덜떨어지지만
.’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자들을 기다리기엔 아무래도 너무 지루할 것 같기에, 사문도는
저 멀리 보이는 ‘무림객잔(武林客盞)’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뭘 살까... 술은 백건주, 여아홍 정도로 해두고... 강가니까, 녹두활어(綠豆活魚)
정도는 있겠지?’
미리 살 것을 결정한 사문도가 거침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문
도에게로 여기저기서 시선이 집중된다.
“... 고독랑?!”
“저, 저 자가 고독랑 사문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사문도는 신경 쓰지 않고 점소이에게
다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할 말만 꺼낸다.
“백건주 세 병이랑 여아홍 한 병, 그리고 녹두활어는 있나?”
“아, 예. 있습니다.”
“그럼 녹두활어 세 마리. 그렇게 보따리로 싸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확히 은자 네 푼입니다, 손님.”
술병에 마개를 쑤셔 넣고 있는 점소이가 공손하게 하는 말에, 사문도는 품에서 은자를
뒤적이더니 정확히 네 푼을 꺼내 점소이에게 던져준다.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손님.”
사문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보따리를 짊어진 채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는 그곳
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바로 그때다. 별안간 사문도의 어깨에 거구의 사내가 부딪힌다
.
“뭐냐, 애송아? 왜 시비냐?”
“큭, 상대하지 마. 자네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데, 괜히 건드렸다가 부잣집 아들이
라도 되면 어쩌려고?”
얼큰하게 취한 듯, 그 거구 사나이들의 얼굴에서 취기가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내가 쓰는 말은 한어가 아니다.
‘여진인이다... 게다가 이 정도의 거구들이라면...’
자신이 노리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나마 사문도의 주먹에 힘
이 들어간다.
“... 죄송합니다.”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버리는 사문도를 객점 사람들은 의아한 눈
으로 바라본다.
“고독랑이라면, 저 정도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왜...”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려는 건가?”
거구의 사내들도 별 문제없이 넘어가는 터라, 그리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큭... 이봐, 우리 언제까지 집합이었지?”
“글쎄. 얼마 안 남았을 걸?”
“끄윽. 피곤하군. 하루쯤은 더 쉬었다 가도 괜찮을 텐데.”
“별 수 없지. 흑령(黑靈) 부장(副將)께서 보름 전까지는 속히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
셨으니까.”
“큭큭... 그래, 그래. 흑령 부장이나, 우리 제독이나...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지
.
이 나라의 핵심인물을 제거할 일을 하시는 분들 아니냐... 응? 끄윽.”
“말은 그만하고, 빨리 봉려산인가 어디론가로 가 보자구. 늦었다고 잔소리 들을라.”
여진어로 지껄이고 있기에, 이들의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여진어
를 알고 있는 사문도는 얼굴을 굳힌 채로 객점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뒤를 따른다.
확신한 것이다. 이들은 분명 팔기군의 일원이라고... 이들을 이끌고 있는 이는, 분명
홍무극이라고.
‘흑령이라... 이거 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군. 이들의 얘기를 들어봐서는, 필
시 무공 실력은 홍무극 이상일 터인데...’
저절로 그쪽 사람들이 걱정된다. 하지만 이제 막 벌어지는 상황은 사문도가 걱정할 시
간조차 없게 만든다.
“네놈이 정말 고독랑 사문도냐?”
여진인들의 뒤를 따라 객점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사문도는 네 쌍의 눈이 바로 곁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는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 아아, 누군가 했더니...”
“쌍웅쌍화의 조충이다.”
쌍웅쌍화의 조충... 그가 차가운 어투로 말을 뱉고는 사문도를 노려본다. 그 뒤엔 나
머지 세 사람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 그렇다면 어쩌실 거요?”
“생포해야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조충의 ‘무림의 평화’란 말에, 사문도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얼굴로 대꾸
한다.
“무림의 평화라... 큭, 당신네들의 돈줄을 위해서겠지. 안 그렇소, 여러분들?”
“... 우릴 네놈과 같은 사파로 보지 마라! 감히 제갈 공자를 사칭하고, 우리가 여기
서 네놈을 눈이 빠져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타나?”
하지만 사문도는 악표가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다. 고개를 흘낏 돌려 여진인들이 사
라져가는 곳을 보고 있다.
“깔보지 마라, 사문도!! 네놈이 아무리 조무환을 이겼다고 한들, 우리 넷이 펼치는
합공을 당해낼 수 있을...”
“같잖은 합공으로 누굴 어떻게 하시려고? 도리어 당하지 말고, 지금 바쁘니까 물러나
시지.”
완전히 무시하는 말이기에, 삽시간에 악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이놈, 감히 누굴 깔보는 것이냐!!”
악표가 검을 뽑는다. 그리고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려는 찰나, 조충이 얼른
이를 저지하고 나선다.
“참으시오, 악 형. 그래봐야 사문도가 원하는 일밖에 더 생기겠소?”
“조 형은 저놈이 우릴 깔보는데, 참겠단 말이오?!”
한편, 양혜월과 조령은 약간 복잡한 얼굴이다.
“당신이 정말 고독랑인가요?”
조령이 묻는다. 그러자 사문도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그렇소, 양 소저. 당신들이 그리도 찾고 있던 고독랑 사문도가 바로 나요.”
양혜월과 조령의 얼굴이 약간 흐린 빛을 띤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들도 검을 빼어
들고 차가운 눈초리로 사문도를 노려본다.
동서남북, 네 방위를 쌍웅쌍화가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사문도는 검을 뽑을 생각도
않은 채로 처음과 같은 자세로 그들을 대하고 있다.
“사문도, 끝까지 우리를 깔볼 생각이냐?”
악표, 그도 어느새 검을 쥐고 사문도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문도는 여
전히 괘념치 않겠다는 얼굴로 간단히 말을 맺는다.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난 너희들과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다. 괜히 피 볼 생각 말
고, 조용히 사라져.”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조령의 검이 사문도의 목젖 바로 끝에서 멈춘다.
“누가 당신을 보내준다고 했죠? 미안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조용히 중원무성으로 압
송돼 줘야겠어요.”
“...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군.”
말을 마친 사문도가 눈을 내려감더니 네 사람의 호흡을 읽는다.
‘호흡은 잘 맞는군. 조충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세 사람의 실력은 듣던 것과는 좀
다른걸...’
하지만 자신의 상대가 아니란 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던 터라, 사문도는 넷의 호흡이
교차되는 순간을 노린다.
‘이때다!’
그때를 시작으로, 사문도는 번개같이 몸을 뒤튼다. 그러자 번개같이 네 개의 검이 사
문도의 미간, 후두부, 양쪽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온다.
달빛에 네 개의 검이 번쩍인다. 하지만 사문도는 어느새 이들 사이에서 사라진 뒤다.
“쫓아라! 봉려산 쪽으로 사라졌다!”
이 넷이 전속력으로 봉려산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조충은 달려가면서도 영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전히 무공을 익힌 사람 같지가 않다. 반박귀진(返博歸眞)의 경지를... 초월한 건
가?’
무공을 익힌 흔적이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경지가 반박귀진이다. 만일
그 정도라면, 이 네 사람이 합공한다손 치더라도 사문도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모를 일이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신들이 합공해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자, 게다가 이미 정사(正邪) 가릴 것 없
이 명성이 드높은 자이기에 이들 넷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문도는 분명 조심조심 방향을 돌리면서 여진인을 쫓고 있다. 하지만 쌍웅쌍화 네 명
은 그런 사문도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추격술 하나만큼은 일류로군. 이러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사문도의 얼굴에서 근심이 떠오른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봉려산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편, 쌍웅쌍화 중에서 조충은 이를 꽉 물고 무서운 눈빛으로 사문도의 뒤를 맹렬히
추격한다.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래도 난 무림공적인 마도 천승호를 제거한 사람이다. 분명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
했는데... 정확하게 빗나가다니!!’
조충은 이런 마음으로 쫓고 있지만, 조령은 쫓아가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상해... 저 정도 실력이라면 분명 우리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잡힐 듯 말 듯 하는 거지?’
조령은 얼마 못 가서 조충까지 사문도를 놓칠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조충은
아직 사문도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잘 알 수 있는 조령이기에, 사문도에게 모
르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조 대협, 잠깐 멈춰요!!”
“무슨 일이오, 조 소저?”
“수상해요. 아니, 분명히 뭔가 있어요.”
“뭐가 말이오?”
조충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맹렬히 질주한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이상하오?”
“우리의 합격을 완벽하리라 느껴질 정도로 피해낸 사람이... 왜 우리의 추격에서 못
빠져나가는 거죠?”
“...?”
“무슨 수를 써놓고 봉려산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건 아닐까요?”
“힘만 쓰는 놈이 무슨 머리를 쓰겠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조충이 조령의 말을 일축해 버린다. 그리고 속도를 조금 더 끌
어올려 밤하늘을 비상(飛上)한다.
“... 틀렸소, 조 소저. 조 형 말대로 실제로 사문도가 책략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않
소. 분명 그는 조 형보다 실력이 몇 수는 위라오. 그렇다면 그때 조 형을 처치했을 터
인데, 왜 이렇게까지 유인하려 한다는 말이오.”
“...”
악표의 말에 조령이 말을 잃고 입을 다문다. 그러자 악표는 이를 달래본다.
“조 형을 믿어 봅시다. 조 형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거기에 우리까지 있다면... 해볼
만 할지도 모를 일 아니오.”
“... 알겠어요.”
결국 조령도 완전히 조충의 뜻에 승낙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이상, 조령에
게 후회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잡을 수밖에 없겠지. 최선을 다하겠어!’
달라고 달린다. 계속 달린다. 사문도를 잡을 때까지, 그들은 언제까지고 달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먼지만 달빛을 받으며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추적하고 있는 여진인들 주위를 돌며, 사문도는 생각에 빠진다.
‘쌍웅쌍화는... 좀 처졌나?’
쫓아오는 듯한 기색이 많이 줄었다는 걸 느낀 사문도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여진인
들이 보일락 말락 하는 곳에서 딱 멈춰 선다.
“흐흐, 산 분위기 탓일까. 술이 확 깨.”
“그렇잖아도 술은 깨야지. 제독께 죽고 싶지 않다면 말야.”
사문도와 이들의 거리는 5장 정도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다.
‘좋아, 이 정도 거리 유지하며 뒤따르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
적이 만족한 듯, 사문도는 한걸음씩 내디디며 이들의 얘기를 엿듣는다.
“그러고 보니, 부제독을 꺾은 자가 여기 있을 거라더군.”
“몇 개월 전에 군웅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그래. 고독랑인가 뭔가 하는 무림인한테 당했지.”
“그 애송이가 여기 있단 말인가?”
“그래. 고독랑이 둘일 수는 없으니까.”
사문도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군웅대회 때의 여진족을 말하는 거로군. 하긴, 내가 피떡으로 만들어 놨었지.’
이제 조충은 사문도를 완전히 놓친 듯하다. 덕택에 사문돈느 마음을 푹 놓고 두 여진
인을 한껏 노려본다.
‘계속 움직여라. 네놈들 제독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모두 깨끗하게, 완벽하게 저승
이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사문도의 전신에서 비릿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그러다가 여진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에게 다시 조금씩 발길을 돌린다.
봉려산 중턱의 넓은 공터. 그곳엔 현재 250여 마리의 군마(軍馬)가 나무에 묶인 채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마와 같은 수의 사람들이다
.
“제독, 250 모두 모였습니다.”
“그런가.”
제독이라 불린 자가 잘기에서 벌떡 일어선다. 넓게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등에 메고
있는 긴 흑도(黑刀)가 상당히 어울리는 사내다.
“마지막에 온 자, 손을 들어 봐라.”
팔기군(八旗軍)의 제독, 홍무극. 그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내뱉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곳이기에, 이런 홍무극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뚜렷이 전
달된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손을 같이 든다. 사문도가 따라온 둘이다.
“... 어디서 여기까지 올라왔느냐?”
“장주의 무림객잔이란 곳에섭니다, 제독!”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낮다. 서로의 밀약(密約)인 것이다.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장주라... 골이 아파오는군.”
홍무극에 잔디에 침을 탁 뱉는다. 그리고 번개같이 그 둘에게 흑도를 날린다.
“.. 허헉...”
“... 제, 제독...?”
그 둘의 오른쪽과 왼쪽 귓불에서 핏줄기가 흐른다. 흑도는 바닥에 꽂힌 채로다.
“제, 제독... 갑자기 왜 저희를...”
“네놈들이 그러고도 팔기군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느냐?!”
홍무극이 말을 마치고 곁에 있던 회의인(灰衣人)에게 눈짓을 한다. 그러자 그 회의인
은 신속한 속도로 흑도를 뽑아와 홍무극에게 무릎 꿇고 공손히 흑도를 든 양손을 내민
다.
홍무극은 흑도를 집어넣으며 노한 듯이 일갈을 터트린다.
“쥐새끼가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더냐!”
홍무극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그리고 흑도를 앞으로 쭉 뻗자, 모든 이들의
형형한 눈빛이 그리로 쏠린다.
20장 이상 떨어진 곳의 우거진 숲 속에, 한 소년이 서 있다. 전신엔 멋진 흑의(黑衣)
를 입었고, 자신이 지목을 당했음에도 불과하고 무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이 말이다.
“애송이, 정체를 밝혀라. 갈기갈기 찌어 죽여 버리기 전에!”
홍무극의 말이 들려설까. 흑의소년, 즉 사문도의 입가에서 비릿한 미소가 핀다.
“눈치 한 번 빠르시군. 여기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야.”
술병의 술을 들이키며, 사문도가 천천히 숲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
럼 발을 놀리더니, 어느새 사문도는 팔기군의 겨우 2장 앞에 서있다.
“포, 포위한다!”
그 말을 시작으로, 팔기군 모두들이 말의 고삐를 풀고 사문도를 둥글게 에워싼다. 신
속한 동작이다.
“... 호오, 86초. 2백이 넘는 인원인데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군.”
“칭찬으로 듣겠다, 애송이.”
홍무극이 말을 마치고 흑도를 움켜쥐며 싸늘한 눈초리로 사문도를 노려본다. 사문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꺾으며 다소 여유를 즐긴다.
“애송이가 아니다. 난 사문도. 중원 무림인들은 날 고독랑이라 부르지.”
그제야 홍무극의 얼굴에서 흠칫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그리고 약간이긴 하지만 팔기군
도 술렁인다.
“고, 고독랑이 바로 저 사람...?!”
“고독랑이 갑자기 왜 우리 제독을...”
부하들이 술렁이는 기색이 역력하자, 홍무극은 흑도를 이리저리 내저으며 분위기를 무
마시키고 사문도에게 묻는다.
“호오... 이거, 거물이 납셨군. 그래,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이 내게 무슨 이유로 내
수하 뒤를 밟아 따라온 것이냐?”
“네 어깨 위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이 필요하다. 이 정도라면 이유로 괜찮겠나?”
흥미를 보이던 홍무극의 눈동자가, 별안간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그리고 우두둑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
뱉는다.
“애송이놈, 네놈이 미친 모양이로구나!!”
“네놈과 팔기군은 이 나라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여인들은 겁탈하고.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사파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냐?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비웃는 듯한 홍무극의 답변에, 사문도의 무표정이던 얼굴이 약간이나마 변하게 된다.
짙은 눈썹이 꿈틀하더니, 곧바로 싸늘한 미소와 함께 분위기를 찢어버리는 듯한 살기
가 방출된다.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은 너다, 빌어먹을 자식아!”
사문도의 말을 들은 홍무극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얼굴을 한다. 그리고 무슨
신호인 듯이 오른손을 휙 내젓는다.
“척살령이다!”
“척살하자!”
삽시간에 250명의 인원이 사문도 하나를 노리고 달려든다. 기마군단(騎馬軍團)이기에,
그들은 절대 느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사문도의 움직임이 몇 수는 더 빠르다.
“혈영검강(血影劍强)!!”
피보다도 짙은 색을 한 초승달 모양의 검강이 사문도의 출두한 검에서 뿜어져 나간다.
그러자 검강이 지나간 자리는 피보라가 뿜어져 나온다.
“크아악!”
“으악!”
삽시간에 10여 명이 팔이 끊어진 채 낙마해서 뒹군다. 하지만 사문도의 무자비한 살육
전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만 있다.
“주춤할 것 없다! 우리는 정예군이다!! 애송이 하나쯤은, 얼마 안 가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마음껏 덤벼라!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최선을 다 해서 상대를 상대하란 말이다!!!”
홍무극의 격려에 분기탱천한 이들은 한층 기세를 곤두세우고 적극적으로 몸을 부딪쳐
온다. 그러자 사문도 역시 보다 신중한 표정으로 이들을 각개격파(各個擊破)해간다.
‘한꺼번에 많은 수를 상대하는 건 무리다. 이들은 분명, 귀혼당 군대들보다 실력이
한 수는 위니까!’
이들이 내뿜는 투지와 살기, 그리고 몸놀림 등등이 모두 한수 위였던 것이다. 정신없
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잠시나마 사문도의 얼굴은 불안함으로 물든다.
‘여진의 누르하치는 무림인들보다 강한 군대를 갖고 있다. 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
인가!’
여진 통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누르하치가 명(明)을 건드릴 리는 없겠지만 사문도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 백성들의 피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여기서 깡그리 멸해야만 한다!’
“빙백검강(氷白劍强)!!”
이번에는 그저 평범한 검기(劍氣) 모양의 기류가 사문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다. 하
지만 그 검식(劍式)이 결코 만만한 검식이 아니란 걸 사문도에게 달려드는 여기 중에
서 누가 알 수 있으리오.
“으... 모, 몸이...”
“이, 이건... 대... 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들은 한 덩어리의 얼음이 되어 말 위에서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한 번의 빙백검강을 맞고 죽은 인물은 여섯 명이다.
‘쳇, 겨우 여섯인가. 이제 쓰러진 녀석은 겨우 스무 명도 안 된다. 이래서는 힘들겠
는...’
쪼르륵. 문득 사문도는 코에서 흘러내리는 뭔가를 손등으로 문지른다. 그리고 검을 쓰
는 가운데서도 슬쩍 바라보니, 놀랍게도 코피다.
‘... 이건 대체 무슨 징조지?’
그러고 보니 머리도 조금 어지러운 듯하다. 하지만 사문도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검을 놀린다.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 이까짓 두통 정도야, 참아내야겠지!’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내며, 사문도는 계속해서 팔기군을 쓰러트린다. 덕택에 홍무극
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사문도는 알지 못한다.
1대 250. 누가 이기겠냐고 내기를 제안한다면, 분명 그 자는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엔 일어나고 한다.
“태극검법(太極劍法)!!”
사문도가 일갈을 터트리기가 무섭게 말 위에 있던 여진인 하나가 피를 쏟으며 낙마한
다. 그런 그를 수기의 군마가 짓누르고 지나간다.
“쿨럭, 쿨럭. 크으, 젠장.”
벌써 백여 명을 도륙한 사문도는 힘들 텐데도 신형을 날리는 속도가 신속하다. 기마군
대인 팔기군은 이런 사문도를 사냥감 쫓는 개처럼 따라온다.
“피 닦을 시간은 좀 달란 말이다, 자식들아!”
이젠 코에서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가는 핏줄기가 흐른다. 사문도가 피로 엉망이 된 얼
굴을 닦으며 팔기군에게 도약하려는 찰나, 단전 부근에서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통증
을 느끼게 된다.
“욱!!”
왼손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단전을 누르자, 사문도의 입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쏟아진다
. 사문도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검을 다시 고쳐 쥐려는 순간 팔기군이 덮친다.
“죽여라!”
“동료들의 원수닷!”
창과 칼이 사문도의 급소를 노리고 각각 뻗어온다. 사문도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누르
며 힘겹게 공죽으로 도약한다.
“빙백검강!”
1장 높이에서 검을 휙 긋자, 검에서 피어난 얼음꽃이 10여 명의 팔기군을 토막을 내려
고 날아간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여덟은 검강을 맞고 동상이 되어 부스러진다.
사문도가 착지하자 팔기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굳어버린다. 헉헉대며 고인 피를 탁
뱉어낸 사문도의 모습이 마치 귀신(鬼神)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한 방 맞았구만 이거.”
다 피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현재 사문도의 왼쪽 팔뚝엔 검흔(劍痕)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서 흘러내린 핏방울은 달빛에 반사돼 섬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팔기군이 주춤하는 틈을 타서, 사문도는 홍무극을 흘낏 바라본다. 여전히 흑도를 낀
채로 팔짱을 끼고 있다. 두 눈은 여전히 형형하기 그지없다.
“후우... 네놈은 언제 나올 생각이냐, 홍무극.”
홍무극이 조소 가득한 눈빛으로 말 한마디를 사문도에게 내던진다.
“나갈 필요도 없다고 느껴진다. 앞으로 한 시진 안으로, 네놈은 내 수하들에게 살해
당할 거니까.”
자신만만한 어투다. 하지만 사문도는 그 자신만만을 밟아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눈을 하
고 씩 웃는다.
“네 신세를 끝까지 모르겠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 나중에 땅을 치고 통곡할 수도 없
게 될 거다. 죽는 건 네가 될 테니까.”
홍무극은 사문도의 망를 곰씹다가 이를 빠드득 갈고 다시 손을 휙 내젓는다.
팔기군이 다시 사문도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홍무극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내상을 입은 데다 어깨까지 베인 네놈이 이 팔기군을 몰살시키고 나까지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얼마나 더 버티느냐가 관건이겠지.’
홍무극은 흥미로운 얼굴이다. 압도적이다가 차차 균형이 이루어져가는 전투를 보고 있
자니, 재밌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반 시진 정도 흘렀다. 어느덧 남아있는 팔기군은 70여명.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사문도는 계속해서 팔기군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
히 쓰러트리고 있다.
홍무극은 아주 약이 오른 듯,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르고 있다. 자신의 목적, 즉 천진
에서 흑령과 합류하기로 한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이.
“혈영... 검강!!”
초승달 형태의 검강, 그것이 군마를 베어버린다.
“이히히힝!”
사문도가 교묘하게 말의 목을 노려 검강을 날린 탓에, 말을 죽이고 또한 말에 타고 있
던 팔기군마저 죽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번 공격에서도 팔기군 여섯이 허리가 잘린 채로 피보라를 내뿜으며 핏덩이로
화한다. 그런 시신을 말들이 걷어차고 밟아버리는 탓에 주변 공터는 완전 아수라지옥
도(阿修羅地獄圖)를 그려놓은 듯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나... 빈혈(貧血)이 오는군.’
검강을 날릴 때마다 사문도의 입에서는 핏줄기가 흐른다. 덕택에 사문도는 신물이 날
지경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지라 사문도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굳어간
다.
“헉... 헉... 헉...”
거친 심호흡을 내뱉는, 피범벅이 된 사문도를 바라보는 홍무극의 차가운 눈에서 불길
이 솟아오른다.
“전체 정지!!”
홍무극의 명이 떨어지자 팔기군을 군마를 멈추고 신속히 전열을 가다듬는다.
“... 정말 대단하구나, 고독랑. 네놈 덕택에 정예병 팔기군을 2백여 명이나 잃었다.
”
“헉... 헉... 그게 왜?”
고인 침을 탁 뱉으며 사문도는 고개를 들어 홍무극을 노려본다.
“아쉽지만 우리의 유희는 여기까지다. 네놈에게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거든. 뭐, 이
미 내 수하들이 일을 끝내고 왔겠지만 말이다. 큭큭.”
홍무극이 한걸음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덤벼들 듯 하다가 다시 손을 휙 내젓는다.
“거기는 이미 일이 시작됐겠군. 흑령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큭큭...”
“네놈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금의위를 얕보지 마라!”
잠시 휴식을 취한 탓일까. 팔기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문도에겐 아까 볼 수 없었던
팔팔함이 엿보인다.
“빙백...”
사건은 그때 벌어진다. 빙백검강을 쓰려던 사문도의 검이 부러진 것이다.
“앗?!”
이미 검은 한계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부러진 검신이 떨어지자, 곧바로 몇 동강으로
다시 나눠진다.
‘낭패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희한한데, 검을 잃었으니. 거기에 홍무극까지 가세
한다면...!!’
사문도는 손에 식은땀을 쥔다. 시간을 낭비하기 싫은 듯, 사문도는 맨손으로 싸우기로
결심하고 돌격해오는 팔기군에게 빙백신장을 날리려고 옷을 걷어 올린다. 그런데 그
때, 사문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크하학!!”
“크허헉!”
사문도 곁에서 날아온 검 한 자루가 회전해서 사문도에게 다가오던 팔기군을 쓰러트린
다. 덕택에 전진하던 팔기군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군마를 세운다.
“누구냐!!”
홍무극도 멈춰서 검이 날아온 곳으로 소리친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다.
“많이도 다쳤구려, 사 소협. 지원해도 괜찮겠소?”
“그, 금 대협!!”
흰 색의 마의(麻衣)가 미파람에 펄럭이고 있다. 철혈쌍검이라 불리는 사내, 금문택...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 있는 얼굴로 따라오지 말라더니, 왜 이런 꼴이오?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리라
짐작했건만...”
“...”
사문도는 아무 말도 않고 곁에 박힌 풍운검으로 다가간다.
“소협은 좀 쉬시오. 이들은 내가 청소하리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형형한 눈길이 금문택에게로 쏠린다. 특히 홍무극은
다 도니 밥에 재 들어갔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끼어들지 마라, 놈. 이건 나와 저 애송이 사이의 싸움이다.”
“네가 뭐라고 내 행동에 참견이지?”
금문택이 남은 검을 뽑아 오른손에 쥐고 사문도에게 소리친다.
“소협은 여기로 와서 좀 쉬시오. 이 희한하게 생긴 여진족 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한동안 풍운검을 바라보던 사문도는 금문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내젓는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마시오. 여기서 좀 쉬는 게 신상에 좋소. 까딱 잘못했다간 내공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단 말이오.”
하지만 사문도는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저 자식 말대로, 이건 나와 저 자식의 싸움이오. 검만 잠깐 빌려 주시구려.”
부드러운 흙에 박혀있는 풍운검을, 사문도가 간단히 뽑는다. 사문도의 안색을 본 금문
택은 말리기 힘들 것이란 걸 짐작한다.
결국, 금문택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뱉으며 사문도에게 걸어간다.
“여기 청소가 끝나면 같이 할아버지께 가 봅시다, 사 소협. 상태가 보통이 아닌 것
같소.”
사문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풍운검을 꼭 움켜쥔다. 얼마 안 가서 검신이 영롱한
청색으로 물든다.
“죽을 각오는 됐겠지, 홍무극.”
“죽는 건 네놈이 되는데, 굳이 내가 죽을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 깨닫게 해줄게. 왜 내가 고독랑이라 불리는지.”
사문도와 홍무극은 동시에 신형(身形)을 날린다. 흑도와 풍운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좌중(座中)에 울리자, 금문태근 거기에 끼어드려는 팔기군을 보고 말을 건넨다.
“어이,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1대 1 싸움엔, 사내자식이라면 끼어들어서는 안 되지.
대장부의 꿈을 꺾지 마라, 쓰레기들아.”
반응은 금세 나타난다. 눈에서 불꽃을 뿜으며, 팔기군 전원이 금문택을 향해 달려온다
.
‘쳇, 일검류는 그리 자신 있는 편은 아닌데. 해 봐야겠지!’
그리고 군마를 몰기 시작하는 팔기군의 앞으로 신형을 날린다.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갑자기 시작된 금문택의 공격이 몰아친다. 삽시간에 다섯 명이, 잘린 목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고꾸라진다.
“철혈쌍검 금문택의 힘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지!”
금문택이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셋의 목이 더 떨어져서야 팔기군은 금문택을 포위하
고 공격을 다시 시작한다.
“쳐, 쳐라!!”
하지만 사문도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당백 정예병이란 명성을 얻고 있는 팔기
군은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무너져간다.
[귀거래혜] 21.250분지 1의 애정(愛情)
사문도는 금문택의 등장으로 한결 수월한 싸움을 하고 있다. 덕택에 긴장이 살짝 풀려
휘두르는 검을 떨어트릴 뻔까지 하게 된다.
“태극검법!”
무당파의 태극검법이 쏟아지자 홍무극은 입술을 짓이기며 흑도를 이리저리 내두른다.
‘젠장,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분명 내상을 입은 것 같았고, 게다가 검상(劍傷)까지
몇 군데 입었는데...!’
사문도의 손놀림 하나하나엔 홍무극이 상상도 못할 내력이 담겨 있다. 홍무극은 현재
수비하기 바쁠 뿐, 공격할 틈은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 그만치 사문도의 검술이 완벽
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까지 당하고도 날 밀어붙이고 있는 거란 말인가? 내 실력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
홍무극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자 미친 듯이 흑도를 휘두른다. 빈틈이 금방 나타난다.
그 틈새를 놓칠 사문도가 아니기에, 재빨리 풍운검을 홍무극의 가슴팍으로 밀어 넣는
다.
1다경 정도 지속되던 균형은 결국 깨진다. 홍무극의 상처는 곧이어 사문도의 우세로
바뀌어 버린다. 사문도는 홍무극의 가슴팍에 새겨진 상처를 보고, 안면에 노골적으로
미소를 띠운다.
‘전세는 완전히 내게로 기울었다!’
홍무극이 뒤로 밀리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풍운검과 흑도가 서로 부딪혀 불똥을 뿜어
내는 가운데, 사문도는 토할 것만 같은 핏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검을 휘둘러본다.
‘이걸로 마지막!’
풍운검이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홍무극을 완력으로 밀어낸 사문도가, 홍무극이 반격할
기회는커녕 자세도 다 잡기 전에 검강을 날린다.
“빙백검강!!”
허공을 가르며, 경쾌한 소리를 내뿜으며 날아간 빙백검강은 금방이라도 홍무극을 동강
낼 듯하다.
“크흑!”
사문도가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흥건하게 바닥을 적신 피를 보고 있자
니, 사문도는 저절로 정신이 드는 듯이 다시 일어선다.
‘이젠... 끝났...’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사문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처음에 비해 안색이
많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분명 홍무극이 자신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후... 불행 중 다행이로군.”
홍무극이 서있던 곳엔 막 당해버린 듯, 동상이 되어있는 팔기군 하나가 있다. 그를 보
고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며 핏물을 닦아내고 묻는다.
“... 대단한 충성심이로군. 대체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널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는
것이냐?”
그러자 이번엔 홍무극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묻는다.
“무슨 개소리냐? 목숨은 하난데, 내가 제아무리 제독이라 해도 이놈이 나 대신 죽으
려 달려들 리가 없잖아?”
“...?”
홍무극의 말을 이해치 못한 사문도가 아미를 찌푸리고 묻는다.
“네놈이 네 한목숨 챙기려고 설마 부하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네놈 뒤에
있는 얼어붙은 시체는 그럼 대체 뭐란 말이지?”
“내가 죽였다. 네놈이 말한 대로, 난 살아야 하니까.”
“... 뭐야?”
사문도는 말을 듣고는 얼이 빠진 얼굴이다. 금문택 역시 이를 부드득 갈면서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더한다.
‘제 한목숨 살려고 하를 죽여? 빌어먹을 자식!’
홍무극에게 달려들까 생각해 보지만, 및니 듯이 달려드는 팔기군 전원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진전격적세!!”
또 하나의 팔기군이 황천행 마차를 타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금문택의 등에서도 끈적
한 뭔가가 흘러내린다.
‘크으, 젠장. 더럽게 따끔거리는군, 이거.’
땣마침 몸을 숙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등판을 날릴 뻔했던 걸 알아챈 금문택이기
에 손에 식은땀을 쥐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금문택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한 서너 명이나 더 죽였을
때, 문득 뒤에서 들리는 공허한 웃음소리에 잠시 몸을 피하고 뒤돌아본다.
“큭... 큭큭큭큭...”
실로 낮은 웃음소리다. 하지만 사문도가 터트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소(怪笑)는, 듣
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어 버린다.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사문도의 머리카락이 두 눈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홍무극은 사
문도의 눈을 못 봤어도 이미 살기를 느끼고 있는 터라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못한다
.
“!!”
그때, 홍무극과 사문도의 눈이 마주친다. 홍무극은 그 순간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살
기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금문택 역시 전해지고 있는 살기 탓에 몸을 굳힌 채로 움직이기도 못하고 있다. 보고
있지도 않은 자신의 몸이 굳고 있는데, 그런 사문도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홍무극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지독한... 아니, 참혹한 살기다. 살기 수준이 흑령과도 맞먹어...!’
붉게 충혈된 사문도의 눈에서 괴소가 걸린다. 홍무극은 그 미소를 보자 심장까지 얼어
붙는 듯한 전율을 느끼고 몸을 떤다.
‘피, 피해야 한다. 무조건, 무조건 피해야 해...
흑령보다 강하다... 흑령보다... 살기가 더 강해!!’
하지만 몸을 말을 듣지 않고 있다. 마음으로만 부르짖고 있을 뿐이다.
흑령보다 살기가 강한 자는 ㅂ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흑령이 사람 하나를 죽일 때
마다 보여줬던 눈은, 그 어떤 살심을 품은 자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질린 노루처럼, 사냥감이 된 홍무극은 그 기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사문도의 오른팔이 부드럽게 움
직인다.
“파천검강(破天劍强)!!”
사문도가 그저 검을 가볍게 휘두른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홍무극이 입은 피해
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끄, 끄악!! 파, 팔이... 내 팔이...!?”
왼팔이 어깨 째로 조각나 떨어진 것이다. 곧이어 절단된 어깨에서 쏟아지는 선혈 덕택
에 홍무극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살기 속에서 벗어난다.
“뇌전검법(雷電劍法)!”
평소 사문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이 걸걸한 목소리다. 다시 한번 사
문도가 검을 휘두르자, 홍무극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다.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 깊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 모두들
에겐 그저 눈앞에서 한줄기 빛이 번쩍였을 뿐인데 말이다.
“혈영검강!!”
놀랄 틈도 없이 사문도의 맹공(猛攻)이 이어진다. 이번엔 오른쪽 귀다.
“으, 으아아악!!”
숨 막힐 듯한 고통, 그리고 그보다 더한 공포에 홍무극은 비명을 내지른다. 또다시 사
문도의 살기에 홍무극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뒷걸음질친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홍무극이 눈을 한번 깜빡인다. 그러자 3장 밖에 있던 사문도가 눈
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
동시에 뒤에서 들려오는 검명(劍鳴). 홍무극은 차라리 고개를 돌리면 안 되는 상황이
다. 바로 코앞에서 사문도가 풍운검을 내리치려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빛이 번쩍인다. 어느새 자신의 병기, 흑도가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놓여
있다.
“제, 제발 그냥 죽여 줘... 이런 숨 막히는 공포는 싫다!! 그냥 편히 죽여 다오!!”
홍무극이 내지르는 것은 고함이 아니라 울부짖음에 더 가깝다. 그때, 전의(戰意)를 상
실한 홍무극의 면전에 사문도의 주먹이 작열한다.
홍무극은 공중에서 균형도 못 잡고 날아가 바닥에 철푸덕 떨어진다. 입속에선 비릿한
피와 함께 딱딱한 조각 몇 개가 느껴진다. 이가 몇 개 부러져버린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하를 그렇게 쉽게, 그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이는 새끼는
내 손으로 재워주겠다.”
다시 사문도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우욱!”
정확히 턱뼈에 명중한다. 주먹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바닥에 엎드려 있던 홍무극의 몸
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혈사장(血死掌)!!”
홍무극의 복부로 혈사장을 날린다. 홍무극의 복부에 시뻘건 장인(掌印)이 새겨짐과 동
시에 혈사장의 압력으로 인해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크허어억!”
홍무극이 부러진 턱뼈 턱에 위에서 토하는 것을 뱉지도 못한 채로 죽을 표정을 하고
있다. 사문도는 그런 홍무극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제, 제독!!”
“제독을 살려라!”
팔기군 하나가 사문도에게 달려든다. 그러자 엉겁결에 30여 명의 팔기군이 사문도에게
따라붙는다.
“윽, 이 자식들이! 감히 날 제쳐두고...”
금문택이 달려드려는 순간, 사문도가 금문택을 만류하고 나선다.
“지원은 필요 없소, 금 대협. 내가 모조리 죽이겠소!!”
홍무극은 이미 전투불능 상태다. 바닥에 꽂아둔 풍운검을 뽑고, 사문도는 달려오는 기
마군단 팔기군을 향해 검을 조준하고 나지막한 한마디를 흘린다.
“혈영검강!”
핏빛 초승달이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간다. 곧이어 열 개의 피보라가 혈무(血霧)가 장
내에 소용돌이친다.
“빙백검강!”
백색(白色) 기류가 팔기군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이번에 역시 10여명이 동상이 된 채
로 툭툭 떨어진다.
“파천검강!!”
사문도의 현재 최강의 기술, 파천검강이 피보라와 동상을 가르며 섬전처럼 뻗어나간다
. 마지막 생존자 열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반신이 절단된 채 즉사한다.
250여 명이나 되던 팔기군은, 금문택과 사문도에게 격파당해 남은 인원은 겨우 14명이
다. 정말로, 당한 당사자가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쿨럭, 쿨럭... 크윽...”
사문도가 다시 비틀거리더니 입에서 피를 쏟아낸다. 많이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고
몸을 떨고 있다.
“사 소협, 괜찮소?”
금문택이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금문택 역시 몸이 만신창인데, 사문도를 먼저 걱정
하고 있는 것이다.
“큭... 걱정 마시오. 금 대협은, 남은 녀석들을 좀 정리해 주시겠소? 나머지는... 마
무리는, 소생이 확실히... 처리할 테니 말이오.”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사문도의 결심을, 금문택은 꺾지 못한다. 아니
,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입에서는 피를 쏟아내고 있고, 몸에는 여
러 군데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문도의 입에 걸린 웃음 탓이다.
‘... 정말 희한한 사람이로군. 그럼, 일단 마무리부터 짓고 볼까...?’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팔기군에게, 금문택이 전력으로 날아든다.
“발초심사세(撥艸尋蛇勢)!”
이번 공격으로 일곱 명의 목이 바닥으로 떼구르르 떨어진다. 새파랗게 질린 일곱 명의
생존자는 비명을 내지른다.
“으, 으악!!”
“도망쳐라!!”
하지만 금문택이 가만히 둘 리가 없잖은가? 곧이어 유령처럼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
내며, 다시 한번 초식을 전개한다.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혈무(血霧)가 다시 한번 아수라장이 된 이곳에 몰아친다. 이로써 팔기군 250명, 전원
은 깨끗하게 전멸당하고 만다. 단 두 사람에 의해서 말이다.
금문택이 검을 탁탁 털고 검집으로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를 장식하려 사문도
를 바라본다.
“네놈의 허황된 꿈도 여기서 끝이다, 홍무극.”
사문도가 풍운검을 들어올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홍
무극의 두 눈을 바라본다.
“미... 미을 스가... 미을 스가...”
분명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리라. 턱뼈가 산산조각이 났는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홍무극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문도는 왼손으로 그런 홍무극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다.
“이... 이러 고에서... 주어야...”
“그래, 넌 여기서 죽는다. 애초에 넌 내 상대가 아니었어.”
자신보다 훨씬 큰 홍무극을 들어올리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희한하게
느껴진다. 금문택은 사문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행동 하나하나를 살핀다.
“마지막... 저승행을 밟은 네놈에게 충고라도 하나 해 주마.”
사문도는 여전히 홍무극을 들어올린 채로, 봉려산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보호막으로 삼은 팔기군이 네겐 부하 250명 중 한 녀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에겐 네놈이 하나뿐인 주인이다!”
사문도의 이 말은, 금문택의 뇌리에 글자 하나 안 빠지고 정확하게 박힌다. 금문택이
안색을 고치며 사문도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음속으로 수천 번은 더 소
리친다.
‘이 사람이다... 내가 이 한 목숨 바쳐 싸울만한 사람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다...’
사문도는 허공으로 홍무극을 던진다. 홍무극이 포물선을 그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찰나, 풍운검이 다시 사문도에 의해 춤을 춘다.
무 베어지듯, 홍무극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다. 비명이고 뭐고 없다. 비명을 내
지르기도 전에, 이미 사문도의 풍운검을 자신의 모든 것을 끝내고 있었으니까.
“... 잘 가라, 한때나마 달콤한 꿈을 꿨던 자여.”
홍무극의 시신을 바라보는 사문도의 얼굴엔 찹찹함이 가득 들어있다. 아무리 범죄자라
고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이런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키 힘든 모양이다.
홍무극의 가랑ㄴㅈ은 눈은 아직도 불신으로 가득하다. 죽어서도 자신의 죽음을 인정치
않겠다는 듯이...
주변 장내는 다시 고요와 적막에 잠긴다.올빼미 소리도 없는, 그런 조용한 장내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받으시오, 금 대협.”
먼저 적막감을 깬 사문도가 금문택에 있는 곳으로 풍운검을 던진다. 풍운검이 부드럽
게 날아가 금문택의 오른손 앞으로 떨어져 박힌다.
“사 소협...”
금문택이 뭐라 말을 해 보려고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금
문택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따르겠다’는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때, 금문택은 기둥 무너지듯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문도를 보게 된다.
“사, 사 소협!!”
금문택이 얼른 달려가 쓰러진 사문도를 부축한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쉼 없이 입
에서 피를 쏟아내는 사문도의 모습에 금문택은 겁을 덜컥 집어먹는다.
‘설마, 죽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명색이 의원 밑에서 검을 배운 사람인지라, 서둘러 지혈을 하고 혼수상태에 빠
진 사문도를 들쳐 업는다.
“으윽... 제, 젠장...”
사문도가 업히자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깟 통증도 못 참아서야... 참자. 참는 거다, 금문택!!’
현재 금문택이 입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다. 등 한복판이 찢어져 옷을 흠
뻑 적신지 오래다. 게다가 그 상처를 입고도 한참이나 더 싸웠으니, 상처가 벌어질 수
있는 데까지는 벌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금문택의 두 눈에는 고통의 빛보다 확고한 의지의 빛이 월등하게 강하게
나타난다. 사문도를 보낼 수 없다는 의지!! 그것이 현재 금문택이 고통을 누르고 사문
도를 업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참으시오, 소협... 할아버지께 가면, 아마 사흘도 안 돼서 깨끗하게 나을 거요.
그 다음은... 같이 떠납시다. 소협이 가자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만 말아 주시오.’
금문택은 천상신의에게 서둘러 가기로 하고, 지치고 쓰라린 몸을 이끌어 경공술을 쓴
다.
금문택이 장내에서 사라지지가 무섭게, 그 장내에서는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쌍
웅쌍화... 바로 그들이다.
“악 형...?”
조충이 악표에게 의문형 어조로 말한다. 추격할 의사가 있느냐는 뜻이다.
“... 추격하지 마십시다.”
악표가 고개를 내저으며 금문택이 사라진 반대방향으로 물러선다. 그러자 양혜월이 악
표의 옷깃을 잡으며 당돌하게 묻는다.
“왜 그러는 거죠? 지금 철혈쌍검을 추격한다면, 분명 사문도를 잡을 수 있어요. 왜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를, 이렇게 간단히 날려 보내는 거죠?”
“... 내가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어쩌면 사문도, 그자는...”
하지만 악표는 말을 다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리고 먼저 천천히 금문택이
사라진 곳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 정말 답답해 죽겠네. 조 대협, 조 대협도 같은 생각인가요?”
이번엔 조령이 조충을 잡고 묻는다. 그러자 조충도 묵묵히 고개를 내저으며 같은 생각
이란 얼굴을 한다.
“철수합시다, 조 소저. 그리고 양 소저.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는
것 같소.”
“대체 뭐가요?”
“사실, 사문도 말대로 고독랑에게 걸린 현상금이 탐났소. 그래서 내가 여기서 모이자
고 했던 것이오.”
“그딴 감상적이지도 않은 말 덕택에, 명성을 지금 다섯 배는 날릴 수 있는 기회를 놓
치겠다는 거예요?”
조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어조지만, 조충은 결심을 굳힌 어조로 설득에 나
선다.
“물러섭시다. 동료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현상금이라니... 어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게다가 정파인을 자처하는 우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잡아 봐야...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오. 우리가 진정 무림의 정의를 잡기 위해 나섰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조충이 악표의 뒤를 따르자, 양혜월과 조령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금문택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을
향해 소리친다.
“같이 가요! 조 대협, 악 대협!!”
천상신의가 석식을 먹은 뒤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던 때다. 별안간 소란스러워진 분위
기 탓에 책을 덮고 방문을 열어젖히더니 바깥을 향해 소리친다.
“무슨 일들로 그렇게들 수군거리는 것이냐?”
곧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내원에 울려 퍼진다.
“어른, 나와 보십시오! 금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문택이가?”
혼잣말을 하며 일어서는 천상신의의 얼굴에 한줄기 의혹이 뜬다. 석식 후에는 언제나
조용하던 금문택이었기에, 석식 후에는 금문택이 자신을 찾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
다.
‘녀석이 무슨 일로 내게...?’
천상신의가 벽에 걸어뒀던 백삼(白衫)을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자
마자 천상신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무, 문택아... 대체 왜 이런 꼴이...?”
“할아버지, 사 소협의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금문택이 평상 위에 사문도를 눕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등의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지만, 금문택은 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금문택의 당황하고
있는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네 상처는 어쩌고...”
“사 소협이 훨씬 급합니다! 전 염려 안 하셔도 되니까, 사 소협부터 먼저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그제야 사문도가 혼수상태란 것을 알게 된 천상신의는 금문택의 상처를 보다가 사문도
에게 시선을 돌린다.
“여기, 이 소협을 부축해서 내원으로 옮기도록 하게. 어서!”
“옛!!”
덩치 좋은 하인 하나가 사문도의 허리를 둘러메고 내원으로 달려 들어간다. 금문택은
그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이제야 안심이다. 젠장, 긴장이 풀리니 상처가 또 아파오는군.’
금문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루에 주저앉으려 몸을 움직인다. 그때 천상신의의
허탈한 목소리가 금문택의 눈을 뜨이게 만든다.
“눈 감지 말거라. 까딱했다가는 의식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휴... 알겠습니다.”
“너도 따라 들어오너라. 너도 치료해야 할 테고, 자초지종도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
천상신의가 백삼을 펄럭이며 내원으로 사라진다. 그러자 금문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물먹은 솜만치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켜 천상신의가 걸은 길을 따라
천상신의를 찾아간다.
촛불 여섯 개가 켜져 있는 내원에 금문택이 누워 있다. 피에 찌들대로 찌든 마의와 내
의는 벗은 채로 누워 있다. 물론, 등은 천장을 향하고 있다. 이불을 피로 적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편, 천상신의는 금문택 곁에서 사문도의 상처를 살피고 있다. 그때, 상처에 전부 붕
대를 감고 맥박을 재던 천상신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맥박이 거의 떨어져 있다. 맥박이 이렇게까지 약한데도 숨이 붙어있을 수 있단 말인
가?’
매우 미약하긴 하지만, 분명 맥박은 느껴지고 있다. 천상신의는 숨을 고르고 자신의
의학지식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사문도에게 대입시켜 본다.
얼마 시간이 흘러, 천상신의는 얼굴을 고치고 침통(針筒)을 꺼내 바닥에 침을 좍 펼쳐
놓는다. 거기서 제일 길고 굵은 침을 덜더니, 사정없이 사문도의 단전(丹田)에 꽂는다
.
“윽.”
사문도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천상신의는 괘념치 않고 본격적으로
사문도의 전신에 침을 꽂기 시작한다.
“... 정말, 침을 왜 그렇게까지 많이 쓰시는 겁니까...”
금문택이 사문도의 신음을 듣고 고개를 돌린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얼굴을 찌
그러트린다. 하긴, 침이 촘촘히 박혀있는 사문도가 촛불에 일렁이는 모습은, 과히 보
기 좋은 모습이라 하기는 힘들다.
천상신의가 금문택 말에는 대꾸도 않고 이마에서 땀을 뻘뻘 쏟으며 침을 계속해서 꽂
는다. 대강대강 꽂는 것 같지만, 천상신의는 심혈을 기울이며 침을 꽂고 있는 것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
사문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금문택의 심정은 안쓰럽기만 하다. 그때, 천상신의가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후우... 정말 끈적거리는군. 문택아, 네 차례다.”
“사 소협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구나.”
천상신의가 금문택의 곁에 앉으며 상처를 훑어본다.
“... 소협은 얼마나 지나야 정신이 들겠습니까?”
“글쎄다. 한 시진 정도는 기다려야 될 듯싶구나.”
천상신의는 준비된 물수건으로 금문택의 피범벅이 된 등을 조심조심 닦는다. 상처 부
위에 물수건이 가자 따끔거리는 듯, 금문택 역시 사문도와 같은 신음을 흘린다.
“근육에 탄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평생 허리가 고장이 날 뻔 했구나.”
“휴, 다행입니다.”
핏자국을 모두 닦아내자, 쫙 갈라져 처참하리라 생각될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금문택
의 등이 천상신의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사 소협의 어깨에 있던 상처와 같은 병기로구나. 설마 관군과 싸운 건 아니겠지?”
“... 예.”
“자초지종은 내일 설명해 다오. 지금은 치료가 급하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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