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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가는 삐딱한 옆길도 참길이다
구재기 (시인)
이따금 만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곧잘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요즈음도 시를 쓰고 있나?"
그럴 경우 난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작품이야 좋고 나쁨에 앞서 꾸준히 시를 쓰고 있으며, 지면(紙面)이야 좋건 말건 그래도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나로서는 ´계속 쓰고 있다´느니, ´계속 발표하고 있다´느니 일일이 대꾸하기에는 좀 뭣하기 때문이다. 사실 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 치고 내가 보기에는 별로 시와 가까이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냥 인사말로 던지는 말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하지만, 왠지 씁쓰레한 기분에 잡히곤 한다. 어떻게 해주어야 가장 명확한 대답이 될 것인가를 아직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까지 시를 좋아한다면, 더더구나 나의 시를 읽고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도 해본다.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아예 생각할 수 없지만. 내사 시가 그냥 좋아서 가까이 하였고, 그러다 보니 시인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하루 한 날 시를 생각하지 아니한 나날을 보낸 적이 없이 살아오고 또 살아갈 것이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이야 단 한 번도 시를 생각하지 않았다가, 우연히 시를 쓰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그냥 인사 차례로 말해본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겉치레 인사말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아니 내가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조금이라도 밝혀지기라도 하면, 이러한 질문이 이어진다.
"무얼 그렇게 쓰느냐?"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목숨이 붙어 살아가고 있는데, 다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이야. 살아가는 곳에 얘기가 없을까?"
그리고는 일단 모든 이야기를 접는다. 그런 자리에서 좀더 시가 어떻고 어떠한 것인가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해서 관심 있게 들어줄 리도 없을 것이며, 들어준다 하더라도 시를 쓸데없는 거짓말쯤으로 알고 있고, 아니면 말장난쯤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를 말한다는 것은 대화의 자리를 경직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얼 그렇게 쓰느냐?"는 질문 속에는 시란 특수한 어떤 것에서 나온다거나 특수한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면, 굳이 그 자리에서 말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시에 대한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면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할 때 난 조금은 어리석게 [시로 가는 삐딱한 옆길] 같은 걸 생각해보곤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시가 뭐 별것인가요? 옆길로 가면 다 시가 되는 것이지!´ 하는 등의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철저히 나는 어리석기 때문이다. [시로 가는 삐딱한 옆길]이라고 하는 것들은 정말 시 창작에 있어서 한 번쯤 만날 수 있는 어리석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말하고 나면 참 멋쩍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바로 그곳이 곧 시의 자궁이요, 시의 자람의 장(場)이요, 시의 탄생을 품고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살아가는 이야기. 혹은 살아감이 곧 시의 현장이라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그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살아가는 길이 한 두 개가 아닌 바에야 어찌 삐딱함이 어리석음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삐딱하게 살아가는 것도 곧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지난날을 보내고, 새롭게 눈뜨기 시작하는 모든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과 듣는 것이 곧 삶의 현장에서의 일이라면 곧 시의 산실(産室)도 된다. 살아감에 있어서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의 움직임은 곧 시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의 것은 모두 눈부신 것이 된다.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과 아픔과 외로움과 화남과 즐거움 등,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 속에 들어와 눈부신 것이 된다면 모두가 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눈부신 것으로 변화되어 가는 동안에 나타난 마음의 움직임이 삶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길을 비단길로 마련해주는 것이 된다. 심지어 살아가는 [삐딱한 옆길]도 비단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쯤 [시로 가는 삐딱한 옆길]이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시로 가는 정석(定石)에서 벗어나서 말이다. 길을 가다가 문득 아무렇지도 아니한 풀꽃에게 가지는 섬광(閃光)같은 느낌이야말로 바로 시가 되는 것이요, 그 섬광을 다스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하여금 또 다른 삶의 길을 안내 받을 수 있다면, 아니 새로운 삶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시로 가는 삐딱한 옆길]에 대한 정확한 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닐까? 삐딱한 옆길이 참길이다. 시로 가는 길에 삐딱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한 번 쯤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