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hWyP0YNwGU?si=6Rx9Qr4LUGGq1Hgj
Bach - The Keyboard Concertos / Presentation + New Mastering (Century's recording : Glenn Gould)
바흐는 라이프치히시대에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연주단체의 잦은 연주를 위해 많은곡을 작곡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흐로서도 힘든 일이었고, 바흐 자신이 건반악기의 명수였고, 자신의 아들들 또한 건반악기를 잘 다루었기 때문에, 자신의 바이올린과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다른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하였습니다. 작곡 시기는 대체적으로 1730-33년 경이며 모두 13곡입니다. 그중 한 대를 위한 쳄발로 협주곡은 모두 7곡으로, 그 당시로는 통주저음으로 쓰이던 쳄발로(혹은 하프시코드, 클라브생)라는 악기를 위한 최초의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되었습니다.
챔발로 협주곡중 가장 감동적이면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이곡 d단조 BWV1052는 성립 유래가 불확실하다. 1925년의 율렌버그(Eulenburg) 악보에 아놀드 셔링(Arnold Schering)은 '사람들은 흔히 이 작품을 비발디의 것으로 안다. 하지만 1730년 즈음 두명의 독일 작곡가가 썼을 확률이 크다.'고 적었다. 몇년 후에는 C.P.E 바흐가 작곡했을지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편곡의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바흐의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자유로운 편곡일 것이라고 상상될 뿐이다. 1악장은 주선율을 복음악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3악장은 화려함으로 가득 차있다.
Piano Concerto in A Major BWV1055의 원곡은(Oboe d"Amore Concerto in A Major No.4)입니다. 바흐가 오보에다모레 협주곡을 챔발로로 편곡해 둔것입니다. 그래서 바흐의 작품목록에서 BWV1055 는 바로 챔발로협주곡 A장조(Harpsichord Concerto in A Major)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챔발로협주곡에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더군요."Trascription of a lost Oboe d"Amore Concerto in A Majot(분실된 오보에다모레 협주곡 A장조의 편곡)" 오늘은 피아노곡으로 편곡된것을 글렌굴드의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글렌굴드 (Glenn Gould1932∼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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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의 한 음악가족에서 태어났다. 그리그가 그의 외증조부의 사촌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엄마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하였었다. 굴드의 어머니는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굴드의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그가 3살이 되던 때에는 절대음감(absolute pitch: 음고(音高)를 정확하게 발성하거나, 귀로 들어서 분별하는 능력; 역주)과 악보를 읽을 줄 아는 특이한 능력 같은, 그가 아주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5살 때에 작곡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주하곤 하였다. 여섯 살 때에는 Josef Hofmann이 토론토에서 가진 마지막 공연을 보고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는 그의 소년 시절 두루 지속적이고 중요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캐나다의 저명한 저술가인 Robert Fulford는 9살 때 동갑내기인 굴드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웃에 살았었다. Robert Fulford는 굴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굴드는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립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굉장한 영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감정이었다.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10살 때에 굴드는 토론토 음악원(the Royal Conservatory of Music in Toronto)에서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피아노는 Alberto Guerrero로부터, 오르간은 Frederick C. Silvester으로부터, 그리고 음악이론은 Leo Smith로부터 각각 배웠다.
굴드는 그의 나이 12세 때인 1944년에 Kiwanis Music Festival에 참가하여 피아노부문에서 수상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참가한 유일한 경연대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 그는 젊은 연주가들이 콩쿨에 참가하여 서로 경쟁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어떤 종류의 경쟁에 대해서도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에는 토론토 음악원에서 솔로 연주자 associateship 시험을 프로 수준으로 통과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14세 때인 1946년에는 음악이론 시험을 통과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굴드는 1952년까지 Alberto Guerrero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계속 받았다.
Artur Schnabel(굴드는, 그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고,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다가가는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Rosalyn Tureck의 바흐곡 레코딩(굴드는 이것을 평정과 긍정을 가진 고결한 그 무엇이라고 말하였다.), Leopold Stokowsk(후에 굴드는 그에 대한 글을 쓰기도했다)는 10대의 굴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들이다. 굴드의 첫 공연은 1945년의 오르간 연주였는데, 이것은 "12살의 천재 오르간 연주자" 라는 헤드라인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1946년 그의 나이 14살때 토론토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4번을 연주하여 솔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그 당시 특별한 준비는 필요치 않았다고 굴드는 말했다. 왜냐하면 Schnabel의 레코딩을 2년동안이나 들어 와서 모든 뉘앙스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토론토 교향악단과 같은 곡을 협연하였는데, 그 당시 한 평론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의 피아노 앞에 앉았고, 권위를 가지고 그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고 썼다. 그의 첫독주회는 Scarlatti, Beethoven, Chopin, 그리고 Liszt의 곡으로 1947년에 있었는데, "그 위대한 작곡가들만큼의 심오한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한 평론가는 적었다. 굴드는 그의 첫 라디오 독주회를 1950년에 CBC에서 가짐으로써, 그의 방송과 레코딩의 오랜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굴드는 1955년 1월 11일 저녁에 뉴욕(굴드는 뉴욕을 '데뷔타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에서의 데뷔를 가졌고, 그 다음날 콜럼비아사(CBS)와의 레코딩 계약에 사인하였다. 굴드의 첫 레코딩이었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은 1955년 6월에 CBS 스튜디오에서 있었다. 그 레코드는 곧바로 호응를 받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완숙한 국제적인 아티스트로서의 굴드 경력을 출발토록 하였다. 굴드는 CBS와 60번 이상의 녹음을 계속하였다.
1957년에는 구소련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럽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구소련에서 공연한 첫 캐나다인이 되었고(그리고, 또 첫 북아메리카인이었다), 냉전의 중앙에서 관객과 평론가들을 뜨겁게 했던 것이었다. 또한 그는 유럽 순회공연 중에,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협연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미국 TV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때까지 그는 캐나다의 TV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캐나다의 방송에 정기적으로 보여지곤 하였다. 굴드의 콘서트 경력은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964년 4월 10일 로스엔젤레스 독주회를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공개적인 출연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 공연으로부터의 이른 은퇴는, 순회공연하는 연주가로서의 바쁜 생활이, 그가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의 인식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었다. 사실, 굴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을 가장 주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저술, 방송, 작곡, 지휘 등을 동등하게 행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굴드는 또한 자신이 그토록 공연을 지독하게도 싫어 하게 된 것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 것도 있으며(굴드는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콘서트 홀에서보다도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보다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굴드는 종종 은둔자, 혹은 속세를 버린 사람 등으로 불리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적당한 거리에서 상호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혼자만의 존재를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곧 자기방위(self-protection)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에 주로 레코딩, 방송, 저작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창조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글렌 굴드의 철학과 그의 핵심적인 정체성의 대부분은 그의 The Idea of North(방송과 레코딩)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게 있어서 the North는 고독(solitude), 독립(independence), 합리성(reasonableness), 용기(courage), 난해함(elusiveness), 숭고함(spirituality), 인격의 힘(strength of character), 준법(adherence to laws), 정직(moral rectitude), 그리고 평화(peace)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밝은 색조, 정열의 표현, 그리고 개인적 표현을 잘 나타내는 지중해성 기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981년 굴드는, 같은 작품을 다시 레코딩하지 않았던 관례를 깨고, 26년 전에 처음으로 녹음하였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하기 위하여 뉴욕 스튜디오에 가게 되었다. 굴드는 변주곡을 분리된 별개의 다른 연습용 곡이 아닌, 큰 테두리 안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박자와 하모니, 그리고 사상에 놓여진 하나의 온전한 통합된 작품으로 보게 되어, 같은 곡을 상당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항상 레코딩 기술의 발전을 파악하고 있던 굴드는, 지난 25년 동안의 레코딩 기술의 큰 변화로 인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재녹음이 더욱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는, 토론토 심포니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챔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지휘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굴드는 그들과 함께 레코딩한 바그너의 Siegfried Idyll(이 곡은 그에게 오랫동안 특별한 의미를 가졌었고, 또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레코딩도 했던 그런 작품이었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수준 높은 자아인식을 통해서, 굴드는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했고, 또 어떻게 그의 인생을 살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는 완전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사실 이상하게 보였던 것들은, 단지 다른 문제이었던 것이다. 세상사에 대한 방관자의 입장을 스스로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어린애 같은 천진 난만한 호기심을 유지하였다.
굴드는 전화 연락을 계속 취했던, 그리고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많은 토론토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었다. 이러한 친구들은 그를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재미있고, 따뜻하며 신뢰가 가는 그럼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굴드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매진하고, 또 그것을 매우 좋아하였던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힘을 북돋우었다. 글렌 굴드는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뇌일혈로 타계하였다
글쓴이 : 판테온[홍형국]
https://youtu.be/na6PysyqD9Y?si=jNwQb19O9fhoSO5E
Glenn Gould Plays Bach Piano Concertos No.1-3 BWV 1052 1053 1054 - 432H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