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버피 토드
눈들의 환호성이 온 땅에 내려 앉은 어느 겨울날 오후, 토드는 발아래 펼쳐진 솜의 나라에 첫 발을 내딛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눈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는 온 세상을 덮어버린 하얀 눈과 잘 어울리는 진한 색상의 비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사이로 보이는 검정의 머리카락은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와 있었지만, 부스스한 느낌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매력을 더해주는 듯 했다.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두 눈은 클 뿐 아니라, 깊고 맑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고, 부드러운 콧날은 갸날픈 턱선 때문에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모습을 적당히 감싸주었다. 유달리 창백한 느낌을 주는 하얀 피부와 작은 체구, 그리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외모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토드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학교 앞 길가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눈덩이가 그의 어깨에 하얀 상처를 만들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토드는 누구의 짓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베이글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몇 몇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 중 대부분이 베이글 빵의 모양처럼 둥그스러운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그들을 베이글 빵이라고 소리치며 놀려댔다. (물론 마음 속으로였지만)
잠시 후, 베이글 소년들의 대장인 커크 윈스턴이 다가와 돈을 달라고 말했다. 토드는 커크의 지독한 입냄새를 맡는 것이
싫어서라도 원하는 것을 주려고 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할머니로부터 받은 용돈을 책상 위에 두고 나온 것이다.
돈이 없다고 변명을 한다고 해서, 그냥 보내줄 커크와 베이글 소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찌로 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토드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아무 것도 찾지 못하자 그를 눈 위에 넘어트렸다. 매일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화가 난 토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베이글 소년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런 수모를 참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할 때면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이 마치 용기를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약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토드는 고아라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난 나머지 친구들과 싸우는 일이 많았고, 다시는 누구로부터 놀림을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그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더욱 차갑게 대하곤 했다. 그 뒤로 토드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든 고아로 부족하게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사실을. 벌써 몇 년 전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토드는 말이 없는 소년이 되고 말았다.
한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골목길로 베이글 악동들이 사라지자, 토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뒤엉켜있는 눈과 흙을 힘껏 털어 낸 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계는 오늘도 역시나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스쿨 버스도 이미 떠나 버린 지 오래, 그는 짧은 한 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다. 어느 새, 해는 어둠을 따라 서둘러서 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토드는 벨을 누르는 대신, 주머니에서 열쇠를 먼저 꺼냈다. 굳이 집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질투난 사람처럼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 하지만 혼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토드는 집안의 따뜻한 공기가 한 겨울의 바깥 날씨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물론 가끔은 혼자 있는 습관이 들어버린 탓에, 그것을 나무라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투정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토드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아침에 나올 때만 해도 어수선 했던 방은 어느 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토드는 침대 위에 가방을 던지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어제 저녁 할머니가 이웃의 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고팠지만, 막상 차갑게 남아 있는 음식을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대신 테이블 위에 있는 블루베리 머핀을 접시에 몇 개 담은 후에, 밖으로 나와 로왈드 잡화점을 향했다.
잡화점에 도착한 토드는 창문 너머로 로왈드씨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가게 안에 손님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다시 오기 위해서였지만, 그가 기억하기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로왈드씨가 손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 때문에 가끔은 가게 문을 닫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왈드씨의 잡화점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살폈을까? 가게 안에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토드는 안으로 들어갔다.
로왈드씨가 그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너라. 토드.”
“안녕하세요, 로왈드씨.”
토드는 이곳에 오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편해졌고, 낡은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오래된 냄새 역시
싫지 않았다. 가끔 로왈드로부터 자그마한 선물들을 받는 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오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사람들과 별로 친하지 않은 로왈드와 어울리는 것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집에서 간식을 좀 가지고 왔어요.”
토드가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호...블루베리 머핀이구나. 그렇잖아도 배가 슬슬 고프던 참인데, 잘됐다.”
로왈드가 머핀을 하나 집어 들면서 말했다.
“오호...오늘 머핀은 더욱 맛있구나.”
“다행이에요. 다음에 또 가져가 드릴게요.”
토드가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로왈드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네가 정말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네, 그래서 늘 감사해요."
토드는 가끔 로왈드씨가 왜 친구가 없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이 좀 없는 편이기는 해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처럼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토드가 의문에 빠지려 할 무렵, 로왈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얘야,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 할 듯 싶구나. 가게 문을 닫고, 갈 곳이 있어서 말이야.”
“아...어디를....”
토드가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어서 아무래도 가봐야 할 듯 싶구나. 좀 먼 곳이라 아무래도 좀 오래 걸릴 것 같기도 하고.”
로왈드의 입에서 ‘친구’ 라는 단어를 듣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정해진 시간 전에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던 그가 문까지 닫고 만나러 갈 정도의 친구라면 매우 친한 사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잠시 후, 가게 밖으로 나온 토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 만에 들른 까닭에 좀 더 오랫동안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먼 길을 떠나는 로왈드씨를 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잡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만큼은 아니지만, 서점에서 책을 보는 일 역시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주로 밖에서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노는 일이 많았지만, 토드는 그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상상속의 세계를 그림이나 글로 옮기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할머니의 잔소리에 못이겨 밖으로 내몰릴 때가 있을 때면, 로왈드씨의 잡화점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다른 곳에 숨어서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상상의 세계를 만들곤 했다.
잠시 후, 서점에 들어간 토드는 주인인 피터 고든씨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대부분의 서점 주인이 지루한 일상을 닮아 말이 없는데 비해,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때로 너무 지나치게 활동적이라서 사람들을 곤란하게 할 때도 많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