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장마는 지루한 장마가 아니라 폭우와 폭염의 연속입니다. 윤흥길의 <장마>를 읽은 것은 군 복무 시절이었습니다. 한국동란 중이었던 ‘장마’ 때를 배경으로 이념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었습니다. 빨치산이 된 아들을 기다리는 여인과 국군인 아들을 잃고 공산당을 저주하는 두 여인은 사돈 관계입니다. 서로 등지며 살던 그들을 화해하게 하는 건 어느 날 나타난 구렁이입니다. 빨치산 아들이 죽어 구렁이로 나타났다고 믿는 무속으로 인해 둘이 화해한 겁니다. 이념 갈등이라 할 것도 없이 현실이 가져다준 불행으로 인해 척진 것이지만, 둘 사이에는 오랜 세월 그들이 함께했던 민속/무속이 있어 화해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환경을 만든 이들은 정치적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디 정치란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통치행위이지만, 정치인들은 갈등과 공포를 먹고삽니다. 그래서 국제정세에서도 보듯이 꾸준히 불안과 공포를 유발해 갈등을 조장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빨갱이’는 재생산되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자기 지키기를 위해 그랬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그런 이념의 구렁텅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사건의 주모자들은 한결같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악의 평범성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몇 해 전 대구의 가창댐 수변공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이곳에서 학살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있었습니다. ‘장마’와 ‘삼복더위’ 속에서 치러진 위령제는 이제 이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는 듯했습니다. ‘장마’는 순우리말로 500년 전부터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로 이제 ‘장마’라는 용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장마’가 사라지듯 과거의 아픈 기억들도 사라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