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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드라망 원문보기 글쓴이: 원명신 (92기 / 기자단)
2018년 8월 11일 토요일.
불가마 같은 폭염이 연일 기록을 세우는 가운데도 우리절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에는
음력 7월 초하루를 맞이하여 각 가정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칠월 초하루 기도가 대구
큰절을 비롯한 모든 도량에서 일제히 봉행되었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대구큰절에서는 에어컨과 선풍기 등 냉방 시설을 가동하여
불자들이 기도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고 대웅전과 옥불보전
등 대법당을 가득 메운 신도님들은 신중기도에 이어서 회주 큰스님의 백팔대참회문
초하루 특별법문을 들었다.
♣ 회주큰스님 칠월 초하루 특별법문 ♣
(악시정진) 이요.
(호시정진)이라.
나 무 아 미 타 불 ~~~
(악시위극) 이요
(호시위저) 니라.
나 무 아 미 타 불~~~
모두 따라 하십시오.
안 좋을 때도 정진하고 좋을 때도 정진하라.
안 좋을 때는 극복하기 위함이요.
좋을 때는 저축하기 위함이다.
무일정진.
정진은 기도하고 참선하고, 사경하고 천도하고,
절하고 예불하는 모든 것이 다 정진입니다.
안 좋을 때도 정진하고 좋을 때도 정진하라.
안 좋을 때는 극복하기 위함이요, 좋을 때는, 그 네모 안에 머라고 썼습니까?
저축하기 위함이다.
곰곰이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인물 (가) 번에 보시면 무일의 4종 정법가치 이런 말이 나왔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정법가치.
우리가 정법을 공부하고 정법을 믿는 보람이 무엇인가 그 말입니다.
첫째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정법을 공부하고 정법을 믿으면 행복해진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이고득락이라 했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고득락
괴로움울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고득락의 상징적 보살님은 바로 관세음보살이라 했어요.
그 13번째라고 하는 것은 백팔대참회문 열 세 번 째 등장하는 부처님.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우리가 정법을 공부하고 정법을 믿는 보람이 어디 있는가?
용기를 주기 땜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법을 믿고 공부하면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말이 (득기활력)이라 했슺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득기활력
기운을 얻어서 활력있게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용기의l 화신은 대세지보살입니다.
여기까지는 설명을 드린 바 있고 오늘 백팔대참회문 열 다섯 번째 정법을 공부하고
믿는 보람이 무엇인가?
희망차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희망. 그래서 바로 이 희망은 신뢰로부터 비롯됩니다.
애라도 공부를 잘하면 희망적이잖아요.
그래서 희망과 지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전미개오)라 했어요.
그것은 예부터 쓰던 말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전미개오. 전미개오.
그래서 미혹함을 뒤집어서 깨달음을 열게 한다.
바로 그 깨달음이 지혜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혜의 화신은 문수보살이다 이 말입니다.
그 네모에 문수보살이라 써 넣으시고 우리는 정법을 의지하고 곡부하고 믿는 보람이
어디 있는가?
지혜적 삶. 희망적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다음 달에 보게 될 네 번째 정법의 가치는 무엇인가?
조화로운 삶을 살 있다 그 말입니다.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적선회향) 하는 바로 보현보살의 삶을 우리가 구가할 수가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달에 말씀을 드리고 오늘은 문수보살과 희망,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 집중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열 다섯 번째 오늘 백팔대참회문 내용이 무엇인가?
위에 상단에 보시면 지심귀명례 환희장마니보적불 이게 본문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심귀명례 환희장마니보적불~
지심귀명례 환희장마니보적불~
환희로움의 구슬보배꾸러미 환희장마니 보적불께 지심귀명례 합니다.
바로 환희로움의 구슬보배꾸러미는 바로지혜를 말합니다.
지혜의 보배꾸러미라~
그리고 주렁주렁 달려있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희망의 구슬보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희망은 바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문수보살의 시현. 즉 환희장마니보적불은 문수보살의 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보살이고 지혜 있는 사람은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을 것인가?
유인물 (나)번에 보면 공부 있은 즉 지혜 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공부 즉 유지혜. 공부 있은 즉 지혜 있다.
거기에 무일. 무일 우학스님이 말하는 6유 6법
전체를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원력 있은 즉, 성취있고.
기도 있은 즉, 가피 있고.
참선 있은 즉, 참나 있고.
선행 있은 즉, 복락 있고.
공부 있은 즉, 지혜 있고.
불심 있은 즉, 용기 있다.
그래서 오늘 지혜와 관계되는 문장은 유공부 즉, 유지혜라.
공부 있은 즉 지혜 있다 했어요.
그러면 이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거기 다 번에 보시면 괄호 속에 보세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비록 부지런히 행하나 지혜 없으면 동쪽으로 가고자 하나 서쪽으로 향해 간다.
수지근행이나 무지혜자는 .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거기 보면 수지근행이나 무지혜자는 dd
지혜없는 자는 아무리 부지런다하 하더라도 동쭉으로 가고자 하나 결국은 서쪽으로 가고
있다 이 말씀이지요.
그만큼 우리 삶에 있어서 지혜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문장을 보면 (유지인소행 증미작반)
(무지인소행 증사작반)
그 뜻이 밑에 나와 있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소행은 쌀을 쪄서 밥을 지음이요.
지혜 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음이다.
모래 사 자 라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음이라 그랬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소행을 쌀을 쪄서 밥을 지음이요.
지혜 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음이라 그랬으니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 말입니다.
그래서 라 번에 보면 무일의 삼혜분류라.
문법득지라.
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음. 이런 경우가 있고
사법달리 라.
객관을 사색하여이치를 통달함. 이런 경우가 있고.
수법대오 라. 진리를 각각 크게 깨달음 이런 경우가 있다.
여기에 대한 내용들은 후 일에 말씀을 드리고 아무튼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뒷 페이지에 보면 이라.
지혜 있으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유지혜즉 입원명진) 이다.
그래서 지혜 있으면 원을 세우고 빍게 나아간다 그랬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혜 있으면 원을 세우고 밝게 나아간다.
이 지혜라는 말 자테가 광명이라는 말을 가지고있어요.
그래서 지혜로우면 모든 것을 밝게 보기 때문에 희망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반면에 무명, 어리석으면 그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혜가 있다 하면 무상이니 무아니 열반이니 하는 그런 삼법인을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상 무아의 실천, 긍정적 실천 그것이 있으므로 우리는 상상함이 없는
현재의 나를 더 발전적인 나로 가져갈 수가 있다.
그래서 희망적인 삷을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지혜즉 입원명진.
지혜 있으면 원을 세우고 밝게 나아간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유지혜즉 무착탈속)이라,
읽어 보겠습니다.
지혜 있으면 집착 않고 탈속한다.
이 집착. 소유에 대한 집착. 이 소유의 한계를 알 수 있는 것은 지혜입니다.
소유의 한계를 알고 소유의 대상이 원치 않으면 지혜가 아는 겁니다.
그러면 스스로 집착하지 않게 되고 탈속한다.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고 공간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물에도 매이지 않고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는다.
즉 자유로운 삶을 산다 이 말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산다.’
‘자유로운 삶을 산다,’
지혜 있는 사람이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유지혜즉 적선회향) 이라.
지혜 있으면 적선하고 회향한다.
적선 선을 쌓는다. 좋은 일도 하고 회향도 한다,
우리는 다 지혜가 있음으로 백중이 돌아오니 천도재도 지내고 불우이웃 돕기도 하고
복지활동도 하고 많은 봉사활동도 하고 포교도 하고 방생도 하고 그러잖아요.
왜 그런가?
지혜가 있으면 연기적 세계다. 인드라망 세계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옛날부터는 세계일화라 세계가 하나의 꽇이다. 그랬거든요.
지혜 있는 사람은 너와 나를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말로 ‘천지여아 동근이다.’ 천지가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요.
‘만물여아 일체’ 라 만물이 나와 더불어서 한 몸이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적선하고 회향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지요.
즉 회향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유지혜즉 적선회향.
아무튼 지혜 있으면 이렇게 삶을 잘 살 수 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희망적인 삶을 산다.
자유로운 삶을 산다.
회향적인 삶을 산다.
그렇다면 이 지혜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아래 (바)번에 보시면
① (득지혜 요접진어) 지혜를 얻으려면 오접진어라 요커데 참된 말씀 즉 진리의
말씀을 접하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주 일회 나와서 뷸교공부 하고 천수천안단에서 한 철에 한 권 드리는 불서
이런 것을 자주 접함으러써 교의, 그 교의라는 말이 있는데 교의에 의한 지혜를 말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접함으로써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② (득지혜 요로전자)라.
지혜를 얻으려면 참모습을 드러내라.
괄호 속에 수증 이라 되어 있는데 닦아서 증득함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진자는 자 자는 모양 자 성품 자 자태 자 인데 우리의 진정한 참 모습은
무엇인가.
진리를 찾으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내 자세를 반듯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자입니다.
바로 참선하고 기도하고 사경하고 모든 수행하는 모습들이 바로 참모습이다.
그래서 지혜를 얻으려면 참 모습을 드러내라.
늘 참선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하면 참진리를 바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참모습을 바로 진리 지혜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의와 수증을 통해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이 말입니다.
그 밑에 (사)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사)번을 크게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혜와 희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휘망적인 삶을 산다.
그리고 희망적인 사람은 지혜롭다. 지혜라는 나침반에 의지해서 노를 저어가다
보면 반드시 희망이라는 등댓불이 나타날 것이다.
그 아래에 (자)번에 보시면 희망의 나라로,
우리가 나라도 희망이 있어야 되고, 가정도 희망이 있어야 되고, 개인도 희망이
있어야 되는데 희망의 나라로 라는 많이 알려진 노래가 있어서 실어 놓았어요.
그래서 ‘희망의 나라로’ 하는 노래 한 곡과 ‘포교발원가’ 이 두 곡을 잠시 부르고
뒷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현제명 시인은 친일파라 해서 나쁘게 보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그 사람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노래만 보시면 돼요.
이 노래 가사를 음미 하시고 우리나라가 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혜와 희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잇다.
지혜로운 사람은 희망적인 삶을 산다.
그리고 희망적인 사람은 지혜롭다. 지혜라는 나침반에 의지해서 노를 저어가다
보면 반드시 희망이라는 등댓불이 나타날 것이다.
(아)번에 보면 판도라의 상자 이런 말이 나와 있어요.
많이 얘기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판도라의 상자.
그리고 그 아래는 에리히 프롬의 ‘인간의 정의’ 그 두 가지인데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삶의 가장 큰 동기부여가 희망이다 라는 겁니다.
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하면 그리스 신화에 보면
태초에 제우스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이 신이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으로 판도라 라는 여자를 만들었어요.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을 통해서 만들게 했는데 그 판도라라는 여자를 만들고 그
이후로 다시 제우스는 결혼을 시켰습니다.
신푸르메테우스라는 사람의 동생을 통해서 결혼을 하게 했고 둘은 결혼을 해서 잘
살았습니다.
그 결혼 선물로 제우스는 상자 하나를 주었어요.
이 상자는 절대로 열어보지 마라. 그냥 예쁜 상자니까 겉모양만 보고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 하고 명령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판도라 여자는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 상자를 열고 말았어요.
그 상자를 여니까 거기에서 튀어 나온 게 무엇인가 하면 옥심과 질투와 시기와 각종
질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놀란 나머지 판도라가 상자를 금방 닫았어요.
그래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희망이었어요.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얘기는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희망만은 잃지 말고 살아야겠다 그 걸 암시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희망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희망은 나 스스로에 대한 희망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희망 나 후대에 다음 세상에 대한
희망 떠 우리 불교로 말하면 불국토 건설에 대한 히망 이게 다 희망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다 희망이 있는 희망을 가진 그런 존재가 되어야 되겠다 그런 말입니다.
거기 보면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도 보면 1900년에 태어나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라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가지고 이 사람은 참선, 선과도 많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선과 정신분석 이런 책을 내기도 한 삶인데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유명하죠.
인간의 정의를다섯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①Homo sapiens (사피엔스) : 생각하는 존재
②homo faber (파베르) : 도구를 만드는 존재
③Homo ludens (루덴스) 유희하는 존재)
④Homo negans (네간스) : 부정 할 수 있는 존재
⑤Homo esperans (에스페란스) : 희망적인 존재
인간은 희망적인 존재다 이 말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 때에 인간이지 희망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봐도 돼요.
그렇잖아요.
희망 없는 데 삶의 가치가 붜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희망을 절대 저버려서는 안 된다.
Homo esperans (에스페란스) : 희망적인 존재.
거기에 관련해서 (차) 번에 얘기가 몇 개 나와 있어요.
읽어보겠습니다.
②번에 (장육존상) 각황전- 1699 ~ 1702
이 장육존상이라.
장육은 열 여섯 자. 보통 사람은 거구장사는 팔척을 보는데 부처님을 모실 때에 인간의
배 장육을 모실 때가 많았던가 봅니다.
거기에 따른 얘기입니다.
이 장육존상을 모신 장육전이라는 유명한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 되었습니다. 탔습니다.
그 건물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화엄사 지금의 각황전 자리에 이었다고 그랬거든요.
화엄사는 가 보셨습니까?
구례 화엄사.
그래서 이 장육존상이 모셔져 있었던 장육전이 언제 지어졌느냐 하면 670년 의상대사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이 후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타버렸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숙종 때에 rrrrrrP파라는 주지스님이 소임을 살면서 내가 소실된
장육전 중건불사를 완성해야 되겠다 이런 발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백일기도에 들어갔고 이 백일기도회향하는 전날밤에 한 신인, 신비한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너무나 실감나게 이야기 해 준 모양입니다.
‘주지스님은 잘 들으시오. 내일 아침 밀가루 항아리를 하나 준비하고 또 물 항아리를
하나 준비 하십시오. 그래서 대중들을 다 모아가지고 그 물 항아리에 손을 넣고 그
손을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었을 때에 그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화주스님으로 채용해라 그랬어요.
화주승. 화주스님은 불사가 되도록 여기저기 다니면서 권선해 오는 사람을 화주승이라
그렇게 말해요.
요즘 더러 보면 화주보살이라 해서 공덕을 짓는 사람들이 많지요.
옛날에는 이 화주승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꿈 속에서 이 얘기를 어떤 신인으로부터 듣고는 그 다음날 대중들을 전부
수집했습니다.
대중들을 모아가지고 꿈대로 항아리 물에 손을 넣고 손을 빼서 밀가루가 담긴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빼는데 그러면 밀가루가 손에 묻겠습니까? 안 묻겠습니까? 당연히 다
묻겠지요.
그런데 마지막 한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은 그 절에서 십 년간 그 법당에서 기도한 기도
스님이 있었는데 그 기도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조금 늦게 왔어요.
그 사람이 마지막 사람이라 그 마지막 스님에게 주지스님이 한 번 해봐라 했더니 다른
사람이 한 대로 물항아리에 손을 넣고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었는데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고 해요.
그 신기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주지스님이 부탁하기로 내가 받은 영감이 있으니 당신이 화주스님을 좀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이 스님은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된거요.
그래서 대웅전에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큰일 난 거잖아요.
장육전 중건불사를 하자면 엄청난 돈이 들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을 하느냐 말입니다.
이 스님은 공양주 소임도 살면서 법당기도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법당에서 잠시 기도를 하는데 문수보살이 나타났어요.
문수보살이 꿈속에 나타나가지고 할 수 있으니까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일
아침에 화주하러 그러니까 권선받으로 떠나가라 하면서 내일 새벽에 제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시주 좀 하라고 권하시오 그랬어요.
다음날 이 tm님은 화주를 떠났어요.
그래서 마을로 내려와 한참을 가는데 저만치 영감이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보니까 이 영감은 돈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허름한 움막집에 살면서 오히려 가금씩
절에 와서 밥을 얻어먹고 가는 노인이라 이 사람은 너무 실망을 했습니다.
아~ 저 영감이 어떻게 장육전을 지을까?
그렇지만 꿈 속에서 만난 문수보살의 얘기를 믿고 얘기를 했습니다.
혹시 당신이 여유가 있다면 장육전 불사를 좀 해 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뽑혔고 지난 꿈 속에서 문수보살님이 나타나서 오늘 새벽에 처음 만난
사람이 장육전을 지어줄 거라 했으니 당신이 생각을 좀 해 주십시오. 했거든 .
그러니깐 이 사람이 화엄사 쪽으로 합장을 하고는 서원을 했어요.
그 서원의 내용이 짧지만 아주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다.
문수보살이시여 가호를 내리소서.’
일 하고는 옆에 작은 저수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저수지에 막무가내로 뛰어들어
버렸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늪 속에 뛰어들었으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화주스님은 죄책감이 너무 커서 다시 화엄사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화엄사를 멀리 떠나갔습니다.
또 믿는 바가 있었던지 서울 쪽으로 길을 계속 갔습니다.
서울 왕궁에 태어나기를 발원한 노인을 생각하면서 창덕궁 앞을 왔다갔다 하는데 한
공주 소녀가 자기한테 뛰어오는거요.
그런데 이 공주소녀는 나이가 여섯 살인데 태어나자마자 손을 오므리고 있었는데
한번도 손을 펴지 않았어요. 그것이 왕궁의 큰 근심거리였던 모양입니다.
이 소녀가 천진난만하게 놀다가 이 화주스님을 보더니 막 뛰어 오는거요.
막 뛰어오더니 우리스님 하면서 옷자락을 잡는데 손이 펴진거에요.
그래서 그 손바닥을 보니까 장육전이라 써 놓았거든.
그래서 공주의 어머니 왕비가 바로 임금, 숙종한테 스님을 데리고 갔어요.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어서 데리고 갔겠지요.
이 스님이 육년 전에 있었던 얘기를 했더니 숙종이 하는 말이 오 장하도다. 그
노거사의 원력과 신심으로 오늘 공조가 환생했구나. 공주가 태어났구나. 하면서
그 원력쯤이야 내가 다 이루게 해 주리다.
이래서 숙종이 드디어 많은 돈을 들여서 그 집을 짓게 했답니다.
그 집을 장육전이라 하지 아니하고 각황전이라 해서 사익~~~~~~을 다시 내렸어요.
각황이라는 말은 깨달은 왕의 집이다.
부처님이 바로 각황이거든요.
그리고 임금을 일깨워서 중건하게 한 집이다.
임금을 일깨워서 중건 하였다는 뜻의 각황이라는 사익을 내리고 왕궁에서 특별히
보살핀 그런 전각이 바로 각황전이다.
그 황전은 그 때 그 이후로 잘 유지돼 가지고 국보 67호로 되어 있고 화엄사의 대표적인
건물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바로문수보살이 나타났어요.
문수보살.
그 다음에 문수하고 도 관계되는 얘기가 또 하나 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라.
암행어사 박문수.
이 사람은 1731년 영조때 그 유명한 암행어사직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병조판서, 함경도 관찰사까지 올랐던 단한 사람인데 박문수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부모가 자식을 낳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타는 일이겠습니까?
결호는은 했는데 애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3년 정진 기도에 들어갔어요,
집안에 작은 기도법당을 마련해 놓고 3년을 두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특별히 닷세마다,
시골은 옛날에 5일장이 있었습니다.
제가가 어릴 때도 5일장이 돌아오면 장에 가서 구경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에 특별히 자기 기도방에 음식을 잔뜩 장만해 놓고 시장에
나오는 스님, 스니들이 시장에 나오는 수도 있어요.
연장을 사기 위해서 올 수도 있고 자기 신도를 만나기 위해서 올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스님 한 분을 특별히 초대해서 특별 기도도 부탁드리고 별청, 특별히 초청해서
별청공양을 드렸어요.
그러니까 3년을 5일 장이 설 때마다 장에 가서 처음 만나는 스님을 모셔다가 기도도
특별히 부탁을 드리고 공양을 거나하게 차려드렸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3년 세월이 지나갔어요.
3년, 3년은 금방 지나가요.
제가 무문관에 2013년도에 들어가서 2016년도 2월달에 회향을 해서 나왔잖아요.
3년이 지나갔지요.
그로부터 다시 3년 내년 음력 정월보름이 또 2차 3년이 끝나요.
이미 6년 세월이 지나가고 있잖아요.
제가 무문관에 완전 폐문하고 들어간 이후로 6년이 되거든요.
6년.
그래서 올해 축제, 10월 7일날 체육대회를 한다고 했는데 올해 체육대회가 7년 만에
열리게 되는거라 세월이 참 빠르지요.
그래서 세월이 참 빠르고 세월이 참으로 신속하다 하는 것을 제가 스스로 느끼는 것은
7년 전에 제가 이 머리카락을 보면 까맸는데 지금은 아주 하얗게 되어버렸어요.
7년 만에 하얗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요즘은 보기가 싫어가지고 자주자주 머리를 깎아요.
물을 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7년의 세월이 길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3년이 박문수의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 3년이 되어서 마지막 장날이니까 기도 회향을 어떤 스님에게 부탁을
해야 되겠고 또 별청공양을 편안하게 드리려고 준비를 잘했어요.
마지막 공양이니까.
옛날에는 이런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은 집에 스님을 불러서 별청공양을 하는 수는 장 없어요.
그게 좋은 풍습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스님을 데리러 하인을 시켰는데 장엥 하인을
보냈는데 루 종일 기다려도 그날이 장날인지 스님이 안 나타나는 거라.
스님이 없어요.
해거름 아주 늦은 시간에 한 스님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보니 그 스님이 문둥병 환자라.
진물이 나면서 손가락이 하나 문지러지고 없고 제가 인도 소록도 이런 곳에 일부러
한번 가본 적이 있었거든요.
문둥병 환자들은 손가락이 없는 수도 많아요.
코, 손가락에 막 진물이 나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스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하인으로서는 입장이 곤란해요.
그렇지만 오늘이 회향날이고 한데 스님을 꼭 모셔 오라고 주인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안 모시고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 스님께 사정 얘기를 하고 시장에서 집이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시고 갔어요.
바깥에 스님을 세워놓고 주인한테 애기를 했습니다.
주인님 오늘 스님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
오늘이 무슨 장날인가 봅니다. 그런데 한 스님을 늦게 만났는데 그 스님이 문등병
환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불자라도 3년 정도 공부를 하면 뭐가 잡힐 것이 아닌가요.
한 3년 정도는 다부지게 해 볼 필요가 있는거지요.
그 두 양반 둘이가 괜찮다고 모시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바깥에 있던 스님을 안으로 들였어요.
들어오는데 보니까 걸음걸음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그러거든.
그런데도 두 양주, 주인어른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기도법당으로 안내를
했어요.
요즘 우리가 정토 기도법당으로 하자 기도방 하나를 만들자 하니까 아이고 저는 그리
못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 볼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나쁜 짓도 많이 하고 해서 부처님을 못 봅니다.
아예 나쁜 짓 할 각오를 하고 있는 거라.
나쁜 짓 하려고 아예 부처님을 안 모신다는 거지요.
부처님 전에 점검을 받아서 점안을 해서 집에 모셔놓고 기도를 하면 액운이 다 없어질
텐데 오히려 그럴 부담스러워하고 또 나는 나쁜 짓도 많이 하는데 자신없다.
나는 못 모시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드디어 마지막 날 초대를 받아서 그 기도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잘 해 드리고 문둥병 환자가 평소에 어디서 얻어 먹겠습니까? 굶는 거지요.
그 날 너무 좋은 공양을 한 겁니다.
그 두 양반 어른이 말하기를 ‘스님 오늘 기도 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왔다 갔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그랬어요.
문둥병 환자가 집에 왔다 갔다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법당에 왔다갔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하는 말이 아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 있습니까?’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랬거든요.
그러고 그 사람이 갔어요.
그리고 그 뒤로 애를 낳았는데 그 사람이 과연 지혜롭고 과연 똑똑한 박문수라 박문수.
그래서 문수라 그랬거든. 한자를 좀 달리 했어요.
거의 뜻은 비슷한데 성현의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문수하면 한자 수 자 가 조금 다르지 결국에 같은 말인데 문수보살의 문수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사람이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서 장원급제를 했고 암행어사를 하면서
당시에 탐관오리들을 많이 제도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래요.
이 박문수도 이 문수보살의 영험으로 태어났다 그랬거든요.
이런 얘기를 죽 하다보면 나는 관세음보살 안하고 문수보살을 찾아야 되겠다 그런
얘기를 사람이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아미타경 좋다 하니까 이제 아미타불 불러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법성게를 보면 법성원융 무이상이라는 말이 있어요.
법성원융 무이상 들어봤습니까?
원융하다 그랬거든 원융하다.
이 원융하다라고 하는 속에 많은 뜻이 있는데 그 법문 속에 들어가다 보면 일중일체라 하나 속에 일체 모든 것이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일중일체 다중일. 들어봤지요?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이 말이요.
또 일미진중 함시방. 일미진중 한 존재 안에 온 시방세계가 다 있다 말이 비슷비슷 해요.
거기에 관련된 얘기를 하나 더 해 드리면 옛날에 구정선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구정.
솥을 아홉 번 옮겨 걸고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스님. 구정선사
거기 (차)번의 ①번에 구정, 솥 전자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구정선사. 구정선사.
구정선사가 출가하기 전의 얘기입니다.
출가전의 얘기라.
이 사람은 강릉과 평창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강릉의 해산물을 평창의 골짜기에 갖다
팔고 평창에서 나온 산중의 나물이나 숯 이런 것을 다시 또 강릉 해변가에 갖다 팔고
이러면서 왔다 갔다 장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단장수를 했다 하는데 비단장수를 했다 해도 큰 차이는 없는 것이고
제가 봤을 때에는 강릉과 평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따리장수를 한 청년이었어요.
그러니까 삶이 어렵지요.
대관령을 올라가는데 드디어 평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관령 올라가는 길목에서 노스님이 느럭바위 위에 우두커니 가만히 30여 분을
서 계시는 모습을 보고는 이상스럽게 생각했어요.
저 스님이 왜 가시다가 저 느럭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서 30여분을 서 계시는고.
자기도 뒤에 따라오다가 기다리면서 물어 봐에 겠다 하고는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서 막 걸음을 옮길 때에 ‘스님 왜 가시다가 바위 위에서 30분 정도 그렇게
가만히 계십니까?’ 하니까 그 스님이 ‘아. 그래 내가 공양을 올렸다.’ 그랬습니다.
스님 누구에게 공양을 주었습니까?
이 하고 벼룩한테 공양을 올렸다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몸에 이가 많았잖아요. 벼룩도 있고.
스물스물 대니까 아! 이하고 벼룩이가 먹을 때가 되었나 보다. 하고 스님이 일부러
움직이지 않고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청년에게 말하기를 내가 움직이면 이 미물들이 공양하는데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기다리고 있었노라 그랬거든요.
이 청년이 이 얘기를 들으니까 요즘 말로 하면 머리가 띵 해졌어요.
자기는 먹고살기 위해서 아동바동 이렇게 사는데 저 스님은 차원이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구나. 대단한 스님이구나 하고 존경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는 먹고살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스님은 이하고 벼룩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는 안 되겠다 내가 저 스님에게 제자가 되어야
되겠다 이러고는 따라 붙였어요.
그래서 평창에는 월정사라는 절이 있고 그 위에 가면 또 동대관음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요. 그 스님이 거기서 주석을 하셨던 모양인데 거기서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한 번을 물었어요.
스님 무엇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러니까 스님이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즉심시불이라 이렇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이 청년은 일자무식군이라 한문은 알 턱도 없고 자기가 들은 대로 짚세기불
이렇게 받아들였어요.
옛날에 짚신 있잖아요.
짚신을 짚세기라 그랬거든요.
짚신불 짚세기블.
즉심시불하고 발음이 비슷하잖아요.
내가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큰스님께서 짚세기불이라고 말씀을 하시네.
아! 그래 큰스님 말씀을 믿어야지 하면서 짚신을 보고 네가 부처냐? 짚신을 보고
당신이 부처냐 하고 계속 묻는 겁니다.
나중에 짚세기불을 보니 부처님을 신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미안한거라.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머리에 이고 다녔어요.
부처님을 어떻게 신고 다니는가 이거요.
그리고 그 옆에 큰 바위가 한 개 있었는데 그 바위에 가서는 짚세기를 앞에 모셔놓고
짚세기불 왜 부처가 짚세기일까? 짚세기불 짚세기불, 짚신불 짚신불.
계속 외우고 어느 날 내려오는데 짚신불이니까 머리에 이고 내려 왔어요.
내려오다가 잘못 해가지고 발을 삐끗 하는 바람에 짚신이 바닥에 뚝 떨어졌어요.
부처님이 툭 떨어진거잖아.
그 때 이 청년이 확 깨쳤어요.
깨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때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길로 뛰 내려와서 은사이신 스승에게 크게 절을 하면서 심경을 이야기해요.
우리가 기도를 해도 어느 정도에 들어가면 막 기쁜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어요.
보통 법희라, 법의 즐거움 법의 기쁨이지요. 그게 법락이라는 말고도 쓰고.
참선을 해도 그런 경지가 나타나고 기도를 해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막 일어날
때가 있어요.
혹시 그런 기쁨이 일어난 바가 있습니까?
더러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도 대각이 있는가 하면 작은 깨달음 소각도 있을 수가 있고 또 가운데
깨달음 중각도 있을 수가 있는데 어쨌든 간에 그런 법의 깨달음을 그걸 자주 느껴
보셔야 되고 부처님처럼 대각을 이루면 좋겠지만 그 전에라도 자주자주 느껴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이 행자가, 총각이 그 때 그 스님이 무염이라는 선사라. 무염선사.
지도를 하고 있는 이하고 벼룩에게 공양을 올렸던 이 스님은 역사책에도 나오는
무염이라는 큰스님입니다.
무염선사가 보니 이 총각이 깨달았어요.
그런데 이 깨달음의 법락 이 환희심을 주체할 수가 없어.
보통 너무 크게 깨달아서 큰 기쁨이 닥칠 때에는 사람이 돌 수가 있어요.
요즘으로 마라하면 크레이지, 안전히 사람이 실성을 할 수가 있어요.
그때 스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 솥이나 좀 걸어라.
하고 솥을 걸게 했습니다.
시골사람이니까 솥을 잘 걸거거든요.
솥을 다 걸어 놓으면 스님이 와서는 아이고 이거 잘 못 걸었다. 하고 짚고 다니던
주장자로 솥을 확 밀어버려요.
그러면 전체가 무너진 거니가 옆에 새로 한 번 걸어봐라 그러면 또 흙을 이겨서
솥을 올리잖아요.
그러면 또 스님이 와서 ‘아 이거 턱이 안 맞다.’ 해서 또 밀어 버리고 그동안 그
짓을 아홉 번이라. 솥을 이홉 번이나 고쳐 건 거지요.
그러니까 이 청년도 대단하지요?
보통사람 같으면 막 대들고 이게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따지고 할 텐데 그러지
않았어요.
그 동안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이런 걸 전부 안으로 수용하도록 스승이 가르친
겁니다.
그래서 아홉 번 솥을 옮겨 걸고 드디어 인가를 받았다 해서 구정선사라 그랬거든요.
제가 여기서 최종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심시불을 짚세기불로 받아들이고 이 사람이 깨친 것이거든. 그래도 깨쳤어요.
화두는 머라도 화두가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말하는 천 칠백 공안 천 칠백화두가 있다 하지만 하나만 잘 깨치면 젙체가
다 통해요.
그런데 보면 공부를 어줍잖게 하는 사람은 이 화두 들었다가 저 화두 들었다가
그래서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공부에 끝을 못 본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불자들도 이 기도를 할 때에 보면 아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이 대단하다 하니까
아미타불을 불러야 겠다.
지장경에 보니까 여기서 지장경도 안 가르칩니까? 지장경 읽다 보니까 지장보살이
대단하다 하니 지장보살을 좀 불러야 되겠다.
오늘처럼 박문수 얘기랑 두 개를 해 드렸잖아요.
아 문수보살 대단하다 하니까 문수보살 좀 불러야지 가피를 입겠다.
이 부처님 저 부처님 왔다 갔다 하면서 부르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집중력 떨어져서 하나의 가피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냥 관세음보살 하면 일중일체라 관세음보살님 안에 온갖 부처님의 공덕이 거기 다
들어있어요.
관세음보살 하면 그 안에 아미타불의 어떤 영험 지장보살의 구조원력 문수보살의
지혜가 다 들어 있는 불도 모르고 자꾸 딴데 기웃거리거든.
일미진중 함시방이라 그래서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융하다 이렇게 말해요. 원융하다.
그래서 기도를 막 섞어서 절대로 하실 이유가 없어 그냥 하시던 대로 관세음보살님.
아까 그랬잖아요. 정법의 가치 첫 번째 행복의 화신 관세음보살님.
행복하면 되는 일인데 뭘 또 딴 걸 자꾸 찾느냐 말입니다.
관세음보살 속에 들어가면 그 안에 문수보살의 힘 아미타불의 힘, 그 안에 모든
제불보살의 힘이 다 들어가 있다는거요.
짚세기불로도 깨쳤잖아요.
다른 화두를 들지 않고 짚세기불로 깨치다보니 다른 화두가 타파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부처님만 열심히 찾아서 잘 들어가면 그 안에 온갖 부처님, 우리가
극락을 가고자 하면 가정의 우환을 소멸하고자 하면 가정의 우환을 소멸 할 수 있고
지혜를 원한다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힘이 한 부처님 안에 다 있으니까 절대
다른 생각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사람도 이름은 여러 이름이 있을 수 있거든.
제가 호가 무일이라고 한다면 무일스님 해도 되고 우학스님 해도 회주스님 해도 되고
온갖 이름을 다 붙이지만 결국에는 그 사람 그 스님을 말하는 것처럼 사람도 다
똑같잖아요.
자기를 어떤 식으로 부르던지 간에 자기는 자기잖아요.
자기 본래 모습이 있지요.
그 안에 다 있거든. 그러니까 똑같은 원리니까 법성은 원융하다 이 생각을 가지고 한
부처님을 아주 깊이 찾아들어가야 되요.
아주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카)번에 보면 우리 불교는 왜 이렇게 희망적일 수 밖에 없는가?
우리 불교는 왜 이렇게 희망적일 수 밖에 없는가?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라 다 불성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 성품이 다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 ( )
일체중생 개유불성 ( )
일체 모든 생명체가 다 불성이 있다. 이 말입니다.
생명체.
이 때 중생은 생명체 이렇게 보면 돼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랬거든요.
그러면 내하고 무슨 관계냐?
나도 생명체니까 나도 불성이 있다.
are you 불성이라 이건 제가 만든 말인데 아주 잘 만든 말 같아요.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are you 불성. 나에게 불성이 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므로 나에게 불성이 있는 거지요.
이걸 영어로 한 번 얘기 해 봐요.
영어의 아가 뭐지요? I 지. I나 아가 똑같잖아요.
I have budda ~~~
나도 불성을 가지고 있다,
불성이라는 것은 무한대의 복덕과 무한대의 지혜득승, 그게 불성이라.
무한능력 이게 다 불성입니다.
나에게 불성, 부처님 성품이 있다.
이보다 더 희망적인 말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가 부처도 될 수 있는 거지요.
얼마나 대단한 말입니까?
후일에 너 또한 부처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대승경전 곳곳에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수기라 그래요.
읽어보겠습니다. 수기.
후일에 부처가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밑에는 미륵불의 출현이라 했어요.
미륵불의 출현.
우리 감포도량 여기저기에는 미륵불이 많이 모셔져 있습니다.
감포 힐링마을에도 그렇고.
바로 희망의 부처님.
별도로 미륵불 안 해도 됩니다.
희망의 부처님이 미륵블이라는 이름으로 계시는 것이지.
우리가 수행할 때는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부르면 돼요.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부처님으로 오시는 분은 미륵블이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하면 내 자신이 열심히 하면 미룩불이 될 수도 있는 거지요.
왜냐 하면 are you 불성이라.
내 또한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할지라도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희망을
져 버려서는 안 돼요.
왜냐 아 유 불성이라 나에게 부처님의 성품이 있다.
내 안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 믿음이 투철하면 절대 절망적일 수가 없어요.
반드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다시 이 앞쪽으로 가서 제가 처음에 읊었던 게송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악시정진) 안 좋을 대도 정진하고
(호시정진) 좋을 때도 정진하라.
(악시위극) 안 좋을때는 극복 하기 위함이요.
(호시위저) 좋을 때는 저축하기 위함이다.
일이 잘 되 갈 때에 저축도 좀 해 놓아야지 그걸 다 까먹어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업이 있기 때문에 늘 대비해야 됩니다.
좋을 때는 대비하고 안 좋을 때는 극복하기 위해서 수행 정진해야 합니다.
이쯤 말씀을 드리고 오늘 정토 가정법당에 신청하신 분들은 오늘 4층 법당에서 하려고
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까 그게 너무 번거로워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스님들이 의식을 통해서 점안도 하고 해서 여기에다 모셔 놓았어요.
여기서 바로바로 드릴거니까 정토가정법당 신청하신 분들은 법회가 끝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초하룻날만 오시는 분들을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면 1학년 추가모집이
있습니다.
모든 학생 신도님들은 가을 학기를 맞아 한 명씩 더 포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0월 7일날 총동문 축제의 날 행사가 있고요.
해변힐링마을. 지금 바닷가에 짓고 있는 해룡일출 대관음사는 거의 준공검사가
떨어졌고
지금부터는 그곳을 우리가 잘 활용을 해야 합니다.
정식 낙성식은 10월 14일쯤 할 생각이고 10월 7일이 총동문 축제의 날.
10월 14일 날 정식 오픈식을 하겠습니다.
정토 가정법당에 동참하신 가족들~
이어서 마을상좌 수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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