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마음에 간절한 원을 세워서 염불하라>
- 염불선의 세계
제가 위빠사나를 학문적으로 접한 것은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직접 수행하는 것, 다시 말해 위빠사나가 대중화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조계종에서는 참선이라 하면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말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간화선이 아니면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면서 여타 수행법은 사도邪道로 배척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상당히 여러 각도에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염불念佛은 불보살의 명호名號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부르거나,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염불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불보살의 명호만 부르는 것은 호불呼佛밖에는 안 됩니다. 염불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염불을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따라 공염불도 되고 선수행도 됩니다.
염불선이라 하면 청화 스님이 대표적인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청화 스님의 은사인 금타 스님이 먼저 염불선을 주창하셨고, 제자인 청화 스님이 염불선을 이어받아 대중화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염불선은 간화선 이전부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수승한 선수행법입니다. 통일신라의 무상無相(680~756) 스님으로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근대의 경허鏡虛(1846~1912) 선사, 그리고 2003년 열반하신 청화 스님에 이르기까지 염불선의 역사는 깊은 수행력과 함께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가 있습니다.
염불을 함에 있어서 우선 어떤 보살을 불러야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관세음보살, 화엄성중, 지장보살 등등 불보살의 이름을 많이 불러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많이 하시는데, 관세음보살 염불은 수행으로서의 실상 염불을 하는 게 아니고 기복으로서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구하는 염불인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대자대비하시고 중생구제의 큰 원을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일 겁니다.
『화엄경』에 보면 부처님 명호가 많기도 많아서 “천백억千百億 화신化神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데, 청화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다 똑같다고 합니다. 다 같은데, 그 명호의 궁극은 법신불로서의 아미타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이다, 지장보살이다 해서 여러 보살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하면 중생 위주로 되어 있어서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표현에 의하면, 부처님은 화장세계華藏世界에 있는 낱낱 중생들의 세계, 지구뿐만 아니라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수의 법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낱낱 중생들, 지렁이·파리·구더기 등 할 것 없이 모든 중생들의 온갖 인과 연과 업을 낱낱이 다 아신다고 합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말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천대천세계의 낱낱 중생들의 업과 과보를 다 아시는데, 이 중생들이 지금 현재 부처는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의 종자를 불성佛性이라 하고 그 불성을 갖고 있으면 부처인데,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해 놓고는 중생이 부처는 아니라고 합니다.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부처인 것은 다르지요. 중생이 부처의 종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부처가 아닌 것은 과거의 여러 업에 끄달려서 길을 잠깐 잘못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딱 그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는 분명히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불성을 다른 말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데, 여래의 성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그걸 여래장이라고 해야 됩니다. 불성과 여래장은, 부처와 중생이 같으니까 불성과 여래장도 같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의 성품이 숨겨져 있으니까 여래장이라고 표현하고, 부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대로 부처의 성품이니까 불성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불성과 여래장은 한가지로 얘기하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보살도 부처님이 구족하신 위신력으로 온 우주에 충만합니다. 지금 보살이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데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볼 때는 지장보살로 보이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약사藥師보살로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관세음보살로 나타나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중생들이 자신의 처지에서 보살을 만들어 낸 것이지 보살이 애초부터 나는 관세음보살이니까 그렇게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4.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이유>
아미타불은 좀 각별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거나 부처님의 명호를 대변해서 말할 때는 꼭 이 아미타불을 거론하게 됩니다. 아미타불은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인격체를 대표하는 명호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말 그대로 한량없는 생명과 시간과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빛은 공간을 뜻합니다. 아미타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부처님입니다. 아미타불의 의미가 그래서 각별한 것 입니다.
『아미타경』에는 사람이 죽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맞습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숨이 넘어 가려고 하는 찰나에 아미타불이 불러지겠어요? 안 불러집니다. 저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터라 경험을 해 봐서 알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평상시에 자신의 마음속에 아미타불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하면, 아미타불 염불을 사람이 죽으면 하는 염불로만 생각하고, 극락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극락의 부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왜곡되어 있는 게 많습니다. 왜곡된 사실이 신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극락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극락이라는 곳이 죽어서나 가는 곳이 아닌데 다들 죽어서 극락 가기를 바랍니다. 왜 극락을 가야 할까요? 수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성불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극락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락은 돈을 많이 쓴다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공덕을 많이 짓는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닙니다. 보시 많이 하고 공덕을 쌓아서 갈 수 있는 곳은 천상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6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을 윤회한다고 합니다. 복을 많이 지으면 6도 중의 하나인 천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복을 많이 받아서 생각만 해도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천상의 세계는 욕계欲界에 속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이룰 수 있겠지만 깨달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저축한 금액을 다 쓰면 빈 통장이 되듯이 자신이 쌓은 복이 다하면 천상의 세계에 있다가 지옥으로 갈 수도 있고 축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인간으로도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자들 중에 극락에 가야 하는 근본 이유를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극락에 즐거움만 있어서 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극락에 가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願을 세워 극락에 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성불입니다. 극락세계는 원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못 가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과는 사실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다가 죽을때가 되니까,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해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신불法身佛의 세계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미타불이고, 그것이 염불의 세계입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머릿속으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장엄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그리면서 간절한 원을 세워서 염불을 하면 바로 염불선이 됩니다. 그것을 선정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마음에 간절한 원을 세워서 염불선을 해 보세요. 염불을 하다가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으면 빠르게도 하고 천천히도 하면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잡념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념으로 염불을 하다 보면 미처 손이 못 따라갈 정도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부턴 지금까지 해 왔던 염불수행 방법에서 방향의 전환을 해 보십시오. 이런 기본적인 개념부터 바꾸려고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오류와 착각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개념조차도 올바로 서지 않은 채 수행과 깨달음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