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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30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제1독서 : 사도 2,14ㄱ.36-41
제2독서 : 1베드 2,20ㄴ-25
복 음 : 요한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당에서 나와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몇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이 신호등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차가 전혀 없는데도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치 보며 건너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급한 마음에 그분을 따라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경적이 울립니다.
진행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속도를 높여서 차 한 대가 달려온 것입니다.
진짜 위험했습니다. 몇 초 빨리 건너가려다가 정말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뻔했습니다.
적색 신호등은 분명히 정지 신호입니다.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즉, 우리 삶 안에서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옳지 못한 길일 때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눈치 보면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말이지요.
또 그 멈춤의 시간이 고통스럽다면서 그냥 앞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적색 신호도 어느 순간에는 녹색 신호로 바뀝니다.
영원히 적색 신호만 있는 신호등이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녹색 신호로 바뀌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멈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멈췄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부활이라는 녹색 신호로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지혜롭게 지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는 양들의 목자이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도둑, 강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도둑’이라고 했고(요한 12,6),
예수님 대신 사면받은 바라빠는 ‘강도’라고 했으며(요한 18,40),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둑, 강도는 모두 하느님 이름 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는 당시 양치기 생활의 관습이었지요.
그만큼 양들을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은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리면 산산이 흩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목자를 충실하게 따르는 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을 추구하는
도둑과 강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또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를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경청과 소통을 통해 드러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어린아이 이설아 첼리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빠지지 않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아주 귀엽고 이쁩니다. 제가 손을 내밀면 손도 잡아주고 인사도 잘합니다.
물론 수녀님 보좌신부님에게도 애틋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입던 수단을 입지 않고 일반 옷을 입은 채 손을 내밀었더니 멈칫하였습니다.
늘 같은 모습이 아니기에 선뜻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
목소리와 모습이 다르니 혼동이 온 것입니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관심과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더더욱 주님과의 소통이 긴밀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10,27-28). 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 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 커킹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어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는 것이지
주님은 늘 사랑으로 속삭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기회를 만들어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과의 속 깊은 만남을 이루시기 빕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릇으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종신서원을 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 손녀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 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와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복사들을 미래의 신부님, 수녀님으로 부릅니다.
언젠가 그 소리가 마음을 흔들기를 희망하며.
결혼 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중에 다양한 성소로 초대받습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 제4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향을 따라 ‘성소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꾼을 하느님께 청하자고 하였습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어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혈당원 시몬도 부르셨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을 전하는 책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사라집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가까이 있을 때는 부정과 부패가 있었고, 타락하였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과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질 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했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갔던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답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착한 목자로 나타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가졌던 목자로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지닌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교회는 이 개념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시며,
그분이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수난 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시는 절정의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10절).
즉, 양 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 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 떼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초대를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 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가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 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착한 목자 주일
류해욱 요셉 신부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 주일인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소,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인간으로 부르시는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소 하면, 우리는 먼저 사제 성소, 수도 성소를 생각합니다.
요즈음 결혼도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하여 결혼 성소라는 표현을 합니다.
물론, 오늘 성소 주일은 수도자와 사제로 부르는 성소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제 성소, 수도자로서의 성소, 결혼 성소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도록 성소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 드리고 싶습니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습니다.”라고.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바오로만 은총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만 이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입니까? 사랑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도 사랑인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 사랑을 향해 흘러
다시 제게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당신 사랑 안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성소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가?
양 떼가 착한 목자의 인도에 따라갈 때만이
양 떼 안에, 혹은 양 떼의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듯이
우리도 인간 아담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따라 살 때만이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알 수 있는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도둑이며 강도인 자들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부르는 소리처럼
크지도 요란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침잠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고요 가운데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끄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 따라간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목자와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들로 나가 풀을 뜯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 때만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만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 목자이시며 문이신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 세상 안에서 계속하도록
당신이 손수 뽑으신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어 가르치셨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아
교회를 건설하고 땅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갈 사제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주일을 맞아 그 사제들을 위해,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 나갈
관대한 마음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사제들이 됩니까?
내 아들은 안 되고 다른 가정의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지요.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우리 가정에서 사제 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에서 사제 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특별히 우리 공동체에 사제 성소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 모든 신자들이 이 지향을 지니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각 기도회와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들도 이 지향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이지만, 잠깐 방심하면,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시골에 살다 보니 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하루 온종일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오길래, 웬 떡이냐 하며, 이런저런 모종을 심었습니다.
전문가 농부들이 보시면 배를 잡고 웃으실 모종 작업입니다.
멀리 텃밭에 심었더니 자주 안 가게 되고, 엄청난 잡초 때문에 엄두도 안 나길래,
올봄에는 찌그러진 솥단지며, 금이 간 물통, 다 쓴 간장통 등
폐품에다 흙을 담아 모종을 심었습니다.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그럴듯했습니다.
모종 작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흙을 퍼오고, 퇴비도 좀 섞고, 잘 배합한 다음,
모종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뤄 땅에 꽂고,
흙을 다져준 다음, 뿌리가 잘 내리도록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모종 작업을 하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하셨겠지.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조심조심 다루시고, 애지중지하시고,
잘 자리 잡고 성장하도록 갖은 정성을 기울이시고...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그저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감지덕지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한 본당에 특강을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주임 신부님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신부님 손이 보통 손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도 거칠고 투박하기로 만만치 않은데,
그 신부님 손은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고 상처도 많았습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무슨 공사판에서 중노동 하시는 분도 아닌데, 무슨 손이 이러시냐?”고 물었더니,
신부님께서, 거의 공사판 노동자처럼 살고 계신답니다.
웬만한 건물 보수나 기계 수리는 직접 다 하시다 보니 손이 그렇게 거칠다고 하셨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우리 안에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저희 피정 집을 찾아오셔서 며칠 머무시다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
“세상 답답한 날들이었는데, 고속도로가 하나 뻥 뚫린 기분입니다.”
또 다른 자매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줄기 밝은 빛을 보고 갑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하고, 한심하고 웃기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를 통해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오늘은 착한 목자였지만,
잠깐 방심하면, 살짝 초심을 잃어버리면,
주님께서 보시고 슬퍼하실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요한 것이 한결같으며 지속적인 겸손의 덕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육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영적 생활, 주님 계명에 따른 생활로 넘어가려는 노력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인 동시에 착한 목자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화와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땅의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모든 평신도들 역시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 단체와 사회 안에서
주님을 꼭 빼닮은 너그럽고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사제와 수도자, 지도자들에게만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겠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전 요세피나 수녀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양에 비유하시며
착한 목자이신 당신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도둑이나 강도와는 달리 양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주시고(아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 바로 당신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통하여 당신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할 때
구원을 얻고, 풀밭을 찾아 드나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확신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사실 이전에, 최근, 사이비 교주들의 만행을 방송매체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하면서 도대체 그들이 지닌 확신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거짓 가르침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들을 신이라고 칭하면서,
자신들에게 신도들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기를 강요하는 모습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교주들에게 푹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신도들의 모습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착한 목자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강요하지도,
당신을 위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지도 않은 채
당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삶 전체가 우리의 문이 되어
그 문을 통하면 하느님 나라 곧 구원에로 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참으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자신이 양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강요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양들이 도둑이나 강도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는 착한 목자 주일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요한 10,1-10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