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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강림절 두 번째 주일/ 12월 6일
성경: 마가복음 1장 1~8절 말씀.
제목: 복음의 시작 그리스도
설교 전문
서론>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연말모임이나 크리스마스 축하행사도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치르는 교회도 많습니다. 아니면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비대면으로 성탄예배를 드려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된 것이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가 확산돼서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서로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묵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초림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함에도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에 취해서 흥해겨워 하는 사람들과 망년회를 즐기는 사람들로 크리스마스가 얼룩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디 이렇게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 이겠습니까?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을까? 부터 그것을 설레며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기자 마가는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예수님 시대에 유대 백성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왔는지, 또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기다림과 기대는 여전히 유효한지 주어진 본문을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가로부터 우리가 듣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한 사실은, 곧 진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을 보시면,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서두로써,”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이며 “유”는 기쁨이란 뜻이고, “앙겔리온”은 “앙겔로스” 곧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해서, 우리말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굿뉴스 또는 가스펠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유앙겔리온“이 맨 처음 사용된 배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가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한 나라였던 세계제국인 페르시아가 백만 대군을 가지고서도, 훨씬 작은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필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을 때 전쟁터로부터 소식을 전해온 병사가 있었는데, 그는 42킬로미터를 죽을힘을 다해 달려서 아테네에 와서 비틀거리며, 한 마디를 외치고 죽습니다. 그 소식이 ”승리는 우리에게“라는 말이었고, 이 소식은 ”유앙겔리온“ 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서 기쁨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병사를 생각하며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가 ”유앙겔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그리스어인 헬라말로 쓰인 것은 맞지만, “유앙겔리온”이 기쁜 소식이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은 그 병사가 가져온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복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복음인줄 깨닫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소식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앙겔리온”이 마라톤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그리스 병사가 가져단 준 승리의 기쁜 소식이지만, 성경은 복음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어떻게 해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 700년 전에, 7장 14절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멘) 그런데 복음서 기자 마태는 이 예언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처녀의 몸을 통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부터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에게 꿈에 현몽한 천사가 자신과 정혼한 처녀 마리가 잉태된 사실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할 때 그에게 나타나서 한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아멘)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유대 백성들에게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왜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 백성들과 이방인 모두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 말씀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여기서 말씀하는 흑암은 낮과 밤을 뜻하는 흑암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늘에 앉은 자들에서, 말씀하는 그늘은 햇빛을 가리게 해 주는 그늘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아멘)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이 나사렛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아멘)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2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심으로, 곧 자신이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복음 외에도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시면, “천국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분명히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는 예수님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축약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가 당시 유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복음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둘째로, 그분은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 3절 말씀을 보시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광야의 소리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 말씀을 보시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 선 것은 그가 예수님보다 크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곧게 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4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강퍅하고 높아진 교만한 마음을 회개를 통해서 낮아지게 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천국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여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리라고 한 그 엘리야이지만, 그래서 말라기서 4장 6절 말씀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한 예언의 말씀대로 사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냐,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선지자냐? 할 때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시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그가 요단강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는 사역을 했지만, 그는 죄 사함을 가져다는 주는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목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뜻하는 세례 의식은 베풀 수 있어도, 그가 죄 사함을 주는 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이 죄 사함을 주시는데, 그렇게 하려면 죄 사함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가 목숨을 버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4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나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성경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더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 죄악 곧 죄 사함을 얻게 해 주시려고, 속죄양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짐을 지고서 곤하고, 슬프거든, 지쳐 쓰러져 낙심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소식은 복음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 이곳저곳이 더러워졌다면, 물로써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서 몸의 떼를 씻는 것도 몸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로 몸의 떼는 씻어내어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죄악은 씻어내지 못합니다. 한 번의 세례를 받음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세례 의식을 통해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다는 증표로써, 몸을 요단강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자기는 죽고 다시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며 새롭게 각오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례 의식을 통해서 그가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본문 8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께서 물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고 거듭나게 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의미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질 때 권능도 함께 부어짐을 뜻합니다. 사실, 세에 요한은 요단강에서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고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요한의 이러한 청렴한 생활을 보며, 또 그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고, 요한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어서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회개를 선포했지만,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줄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거나 성령의 권능이 임해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권능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인 마태는, 10장 1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권능은 열두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에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육체에게 심지어는 종이나 이방인에게도 성령의 권능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7절은 예수께서 이러한 일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취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아멘)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일어날 것을 세례 요한은 본문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당시 요한은 선지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인기 있는 설교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 조차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에 비하면,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푸는 노예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을 증언하며 그가 세상에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세례 요한으로부터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또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높아진 마음이 아니라 낮아진 마음으로, 우리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예배를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동등하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때 그가 오심으로 복음이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고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죄악 가운데 있는 불신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양을 이리나 사자로부터 그들의 이빨로부터 빼앗아 와야 하듯이, 사단의 악한 종이나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 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기고 환난과 시련과 박해를 이기기가 벅차기 때문에 주님 오실 때까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
https://youtu.be/ODlvdlM69M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