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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11,1-18
복 음 :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국가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던 공학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수사의 능력을 수도회에서 잘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사가 수도회에서는 하는 일은 소위 ‘막노가다’였습니다.
힘쓰는 일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자기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막노가다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수사의 부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잘하는 일을 시키지 않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소임으로
아들의 훌륭한 재능을 수도회에서 썩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장 수사님께 이점을 항의했습니다.
이에 원장 수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기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신앙만이 이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이 가난한 이가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왜 신성과 권능을 감추고 우리 가운데 그것도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며 살고 싶어 하셨을까요?
생명 자체이신 그분에게 십자가행, 골고타의 수난, 죽음의 치욕이 뭔 말입니까?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공학도가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썩을 수 있는 밀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능력을 살려서 일하는 것을 주님께서 과연 원하실까요?
오히려 자기 능력을 감추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모습을 더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겸손만이 주님을 제대로 닮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식으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모두 7번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의 신성을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지어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분,
특별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착한 목자’로 말씀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확인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인 인지를 넘어 서로 마음이 통하여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친교를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바치는 사랑의 희생을 하는 상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겸손한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랑을 겸손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려고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되는 삶입니다.
모든 것을 감당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도모시용(道謀是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에 집을 짓는데, 길 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면
구구한 의견으로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주견(主見) 없이 남의 의견만 좇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10,16).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앎, 인격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자와 양인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잘 아는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 합니다.
마찬가지로 “안 듣는다.”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저놈은 말귀를 잘 알아 듣는다.’고 말한다면
귀로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한 목자에 한 양 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명은 강압에 의하여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신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다면
자신을 내어 맡기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 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10,17).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은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참사랑을 깨우치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한집에 살고 있는 개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였답니다.
‘우리 주인은 나를 좋아해!.’ ‘아니야 나를 좋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이봐, 주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나야, 나는 내일 주인 뱃속으로 들어가거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성삼일 전례는 3개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가대는 한국어 공동체와 스페인어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3개 공동체가 같이 하였습니다.
강론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하였습니다.
미사 경본은 영어, 스페인어를 같이 보았습니다.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후에는 3개 공동체가 함께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성 금요일에도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거리에서 하며 성당으로 왔습니다.
공동체의 규모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함께 성삼일 전례를 하였고 부활의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3개 공동체가 함께하면 분명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전례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다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울 점도 있습니다. 스페인어 공동체는 생동감이 있고 신심이 깊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많아서 활력이 넘칩니다.
한국어 공동체는 짜임새가 있고 질서정연합니다.
영어 공동체는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3개 공동체의 중심에서 균형을 이루어 줍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사이좋게 지내니 삼위일체의 신비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모든 인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3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은 1조와 2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민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고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2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죽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행된 식민지 건설은 약소국의 시민들을 차별하였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더 이상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인권 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성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국제적인 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지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한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세계인권선언’을 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 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세계인권선언’이 실현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입니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당신의 몸과 피를 성사로 변화시켜 당신이 구원하신 양들에게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착한 목자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이에 반해 삯꾼은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인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이리가 양들을 습격하면 도망을 가고 만다.
삯꾼에게는 이리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도 없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는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주님은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신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신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가르쳐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시므로
그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도 항상 그 관계 안에서, 성령 안에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오늘 우리는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양부(養父)로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엄청난 기여를 하신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의 희생과 헌신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느님께 사랑하는 약혼녀 마리아를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함께 평범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녀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셉은 군말 없이 수용했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배신감과 서운함을 감출 길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루아침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요셉을 과묵하고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참 신앙이었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그 어떤 토도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당장 이집트로 떠나라니 순순히 떠났습니다.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평생토록 그저 묵묵히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크게 일조한 요셉이 당대 잘 나가던 고관대작이 아니라는 것,
시대를 주름잡는 엄청나고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대신 그저 평범하고 가난한 목수였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요셉이 엄청난 부자여서,
우리나라로 치면 한강 뷰가 좋은 초고층 100평 아파트에 사셨다면,
막대한 시세를 호가하는 노른자위 부동산의 소유자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고,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순례자로 사셨던 예수님의 배경이요 디딤돌이 되어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자신을 증거합니다.
요셉은 엄청 대단한 일이나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자신이 행하던 작은 일들,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못 질을 하는 일에 충실함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요셉처럼 매일 우리 손으로 하는 작은 일들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요셉처럼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이 예레미아 수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신다.
“착한”이라는 그리스어는 글자 그대로‘아름다움’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한’ ‘이상적인’ ‘모범적인’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착한 목자”는 완전한 지도력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는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하신다.
“안다.”라는 말은 사랑하는 이들을 가장 친밀하게 결합시켜 주는 앎,
관계나 체험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우리는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신 양들을“아시고” 양들도 예수님을 아는데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으로부터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데
결국 아버지께서는 생명을 다시 돌려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순명으로 행한
모든 행동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찾으셨다.
즉 순명 안에서 자유로움을 찾으셨다.
자유로운 순명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일치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는
나의 목자는 누구인가?
목자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나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가?
낯선 목자를 따라가지는 않는가?
나의 목자는 나를 어떤 길로 이끌고 있는가?
그 길에서 나는 어떻게 길들여지고 있는가?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출처] 요한 10,11-18 부활 제4주간 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