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마을 신농일기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기차에서 할모니가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언제나처럼 가벼운 목례를 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참이었다.
할머니는 '아이고 꽃이 지천으로 폈네~ 좋을 때재.
아요, 아가씨는 매쌀이나 무건능교?'라고 물으셨다.
나는 애써 웃으며 데면데면 넘어가려했는데, 자꾸 먗살이냐고 물어 하는 수 없이 나이를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기사나인줄 알았더니만 제법 나이가 있네'하시면서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고 하셔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은 몇 살이냐'고 다시 물으셨다.
이어 '나이 차이는 좀 있는 게 좋다'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야 몸에 무리가 없다'
'첫 아이가 딸이면 아들도 하나 낳으면 좋다' '결혼을 빨리빨리 하라' 등등 말씀이 계속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저가 화장실 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음 칸 복도에서 서 있었다.
만나자마자 나이나 고향부터 묻는 사람을 경계하게 된다.
단순히 궁금해서 묻기도 하지만, 대개 나이나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부터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상대를 얼마나 오해하려고 그런 것부터 묻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서른이라고 하면 '설흔 같지않네, 어려 보여요' 혹은 '서른보다 어른스러워'라고 한다.
아니면 딱 서른 같다고 맣하든가 말이다.
상대는 대체로 '그럼 나는 몇 살로 보여요?'라고 되묻기 마ㅣ련이다.
그러면 몇 살인지 가늠하기에앞서 '몇살처럼 보인다고 얘기해야 될까'하고 고민부터 하게 된다.
너무 솔직히 나이를 맞혀 버려도 허망하고, 사실 그 숫자를 맞히는 것은 어림짐작이지만
숫자를 맞히는 데도 수학 문제이기보다는 철학 문제 같아서 애초에 포기하고 싶다.
이 와중에 학교에 찾아온 아이도 묻는다.
'선생님, 저 몇 살 같아요?' 나는 웃으면서 '몇 살이라고 말해 주면 좋겠어?'하고 되물었다.
'저는 일곱 살인데 빨리 여덟살이 돼 학교에 가고 싶어요.
사람들은 제가 키가 커서 자를 보고 초등학생이냐고 묻는데 초등학생이 아니라서 속상해요'
나는 '그래서, 소상하겠다.
그래도 올해가 벌써 반이나 지나갔어.
일곱살을 충분히 누리면서 기쁘게 여덟 살을 기다리자'라고 말했다.
의무교육이냐 그때가 있다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도 왜 다들 꼭 그 나이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학연.지연에 연연하고 그 시기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면 진정 행복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마음의 단단한 근육과 중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다들 겪는 시기와 사정에 자신의 형편을 억지로 맞추려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틀에 맞추고 철저히 계획하면 할수록 그 계호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실패만이 남는다.
틀에 맞추거나 계획을 하지 않고 더 나은 꿈을 꾸며 즐겁게 살면 과연 매사가 이득일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내일보다는 오늘이 가장 어리다.
내일이 되기 전에 가쁘게 끔을 꾸자. 전수민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