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5월 2일 화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11,19-26
복 음 : 요한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 나눴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자매님은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인해 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부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공장이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이야기,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이제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사고로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이야기,
사는 게 바빠서 아이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해서 매우 미안하다는 이야기….
‘와~~ 정말 힘든 삶을 사셨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힘드셨겠어요.”라면서 공감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 아픔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만 아픔이 있고 또 불행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가지고 있는 아픔이고 불행이었어요.
그러다가 성당에 우연히 다니게 되었는데, 그 뒤에 모든 것이 달라 보였어요.
행복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행복은 널려 있더라고요.
예수님 덕분이에요. 예수님 만나면서 행복이 보였거든요. 그리고 제 삶도 예쁘게 볼 수 있었어요.
안쓰럽고 불쌍한 삶이 아닌, 나름 멋진 삶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자기 삶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불행만 있고 그래서 안쓰럽고 불쌍한 삶일까요?
시선을 바꾸어 자기 마음을 주님께 둔다면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며 자기 삶이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참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자기 삶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질문합니다.
메시아는 ‘기름 바른 자’라는 뜻으로, 이 메시아가 나타나면 주위의 적들을 물리치고
시온에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선악을 가리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이 메시아는 누가 분별할까요? 사실 이 일은 랍비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고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확증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심보였던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바꾸지 못하니 바로 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 삶도 불행의 삶으로 만들 뿐입니다.
지금 나의 시선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
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주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 (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 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이 하나 됨은 삶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증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고 하고,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아버지는 54살에 돌아가셨는데 성주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2년 후에 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성 금요일에 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성 주간에 그것도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작년에 형제님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부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있었던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형제님도 예수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또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 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롭고, 서로 아껴 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존중의 말이었고, 칭찬의 말이었고, 닮고 싶은 이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묵상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험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나침판이 되어서 지친 이들에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의식주의 충족이겠지요.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식주가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자연스레 추구하게 되는 것이 놀이 문화요 축제 문화입니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실감합니다. 뷰가 좋은 캠핑장은 사시사철 호황입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한 겨울에도 캠핑을 하길래,
살짝 봤더니, 텐트며 캠핑 도구들이 최첨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춥고 불편할까 걱정했었는데, 세상 따뜻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놀이 문화나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축제가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장 25~27절)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마리 에바 수녀
내가 중학생 때까지는 보통 한 가정에 전화기가 한 대였다.
그래서 친구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친구의 가족이 전화를 받았다.
하루는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친구의 언니가 전화 받은 줄 모르고 친구인 줄 알고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친구와 친구의 언니가 목소리가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큰오빠와 작은오빠의 전화 목소리는 친척들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만은 두 오빠의 목소리를 구분했다.
미묘하게 다른 목소리가 분명히 구분되었다.
내가 친구와 친구언니 목소리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친오빠들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함께 생활하며 매일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하셨는데
내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면
매일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어쩌면 예수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비어있는 성당 안에서,
따스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 속에서...
무심코 지나친 일상 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출처] 요한 10,22-30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