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진혁 교수의 <질문하는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 빅토르 리샤르의 논증을 인용한다. 완전한 존재가 되려면 혼자는 부족하다. 혼자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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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둘 만 사랑하게 되면 또 완전한 사랑일 수 없다. 둘만 사랑하면 이기적인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속성상 흘러넘치는 기쁨을 양산한다. 그 기쁨은 두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제3자인 타자에게 흘러야 한다. 그래서 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사랑을 나누려면 최소한 3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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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리샤르의 삼위일체 논증은 삼위일체의 구분됨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신과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격은 홀로 떨어진 인격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근원적 관계성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기쁨이 인격을 구성한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을 향유해야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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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위일체의 논증은 또 다른 사랑을 파생한다.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사랑의 대상이 된 나는 은혜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또한 흘러넘치는 기쁨으로 타자에게 흘러야 한다. 하나님과 나는 반드시 타인으로 흘러가는 관계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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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위일체는 각 위격의 개별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인 연합의 존재이다. one 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Unity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소그룹으로 가정으로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이성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삼위일체가 구현될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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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개인은 개인과 공동체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개인과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관계성 안에서 개인이 있고, 연합이 있다. 이 신비를 C.S.루이스는 '춤' 이라고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모습이 바로 춤인데, 이런 삼위일체의 춤 안으로 초대되어 우리도 삼위하나님과 교제하는 춤을 추는 것이 삶의 균형을 이루는 중요한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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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회와 가정 사이에서,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분법적으로 시간을 계산하거나 분리해서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삼위 일체는 개인과 공동체가 나눠지지 않는다. 현대 우리가 느끼는 개별적 개인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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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신세계>의 저자인 칼 트루먼은 현대의 자아형성 과정이 루소의 낭만주의에서 니체와 마르크스, 프로이드를 거쳐 신좌파 혁명을 통해 형성된 개인적 자아라고 규정한다. 나는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을 만드는 존재이며, 인간안의 내면이 정체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표현적 개인주의' 라고 명명하면서 현대 사회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인간다운 삶의 핵심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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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위일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개인과 공동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때마다 두 개를 온탕과 냉탕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기운이 다 빠져버린다. 우리의 가정 안에서 삼위일체의 연합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직장 안에서, 우리 나라 안에서, 온 세상 가운데 삼위일체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표이며, 이 거룩한 비전과 일상의 경험이 연결될 때 마치 삼위일체처럼 관계성 속에서 개인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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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인간은 관계성 안에서 개별성을, 각자의 고유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하나되는 연합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은 교회 공동체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가정 공동체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 땅과 세상 전체와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싶으셨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동체이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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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는 개인과 교회, 개인과 직장, 개인과 나라, 개인과 세상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두 방향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늘 지치고 어려워진다. 나의 삶의 방향이 나와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세상으로 이어지는 선교적 소명이 필요하다. 삼위일체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기독교의 가장 출발이며 모든 것이다. 성경은 삼위일체로 시작해서 삼위일체로 끝난다. 삼위일체는 단순한 지식적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가야 할 가장 실체적인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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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공동체의 연합안에서 개인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중보기도를 하시면서 제자들과 앞으로 믿을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기도하신다. 우리 안에 있게 한다는 말은 삼위일체의 교제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는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관계성 없이 홀로 무인도에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적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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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문제는 개인과 공동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근대의 개인 때문인 경우가 많다. 래리 시덴톱은 <개인의 탄생>에서 오늘날 개인이라는 개념 속에서 긍정적인 요소는 결국 기독교의 정신이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배제한, 공동체적 요소의 관계성을 배제한 개인은 역사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사역자들 중에 가정과 교회의 일을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교회 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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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춤처럼, 우리의 개인과 교회일, 가정의 일은 연합되어 춤추어야 한다. 가정, 교회, 나라,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과 동떨어진 관계가 아니라 연결되고 확장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은혜의 질서는 우리의 삶을 얼라인먼트 한다. 방향이 정해지면 삶은 질서가 잡히고 체계적이 된다. 어수선하거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삶의 본질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이다.
고상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