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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일 수요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 1코린 15,1-8
복 음 : 요한 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일 일기예보를 확인합니다.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비가 오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 일기예보는 거의 정확합니다.
몇 시쯤 비가 온다고 하면, 정말로 그 시간에 비가 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정확한 일기예보를 우리는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서 안심하고 오전에 나갔는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비를 쫄딱 맞으면서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했어도 의외의 상황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삶은 어떨까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정확하게 되던가요?
너무나 자주 우리 삶은 정확하지 않은 결과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안내해주시던 분이 “이 나라의 일기예보는 너무 정확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기예보가 거의 “맑음, 흐림, 비”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워낙 날씨가 불안정해서 맑았다가 흐렸다가 또 비까지 쏟아질 때가 자주 있어서,
경우의 수에 늘 맞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행복의 기운을 느끼는 ‘맑음’의 삶만이 나의 삶이 아닙니다.
우울한 ‘흐림’의 삶도, 또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찬 ‘비바람’의 삶도 분명히 우리 삶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야, 비 올 것을 대비해서 우산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 삶을 잘 준비해서 어렵고 힘들 때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흐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흐르는 세상임을 인정하고 그 주님의 뜻을 찾고 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려울 때의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갈 곳은 하느님 나라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다섯 번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께 맡기셨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통해서 자기 원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완전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 불완전한 세상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한마음 한 몸으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러나 마음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 형성을 잘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 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움 덕분에 작은아들은 모든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종으로 여긴 적이 없으나 스스로 종처럼 지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아버지를 섬겼으니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해 계산된 가운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그분의 뜻에 일치하여 청해야 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 주시고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은 물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소명이 있으니 우리는 분명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복음 사업을 주도하시는 성령께 의탁하면서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생활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푸시면서 성호경을 그으셨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생일에는 본당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일에는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부활, 성탄 판공을 보았습니다. 교무금, 헌금은 꼭 챙겼습니다.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삼종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피정, 교육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본당 신축헌금을 냈고, 형편이 어려우면 노력 봉사를 하였습니다.
9일 기도, 54일 기도를 하셨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제일 먼저 주변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교리에서 배우기 전에, 교회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집에서 배웠습니다.
신학교의 가르침은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의 연장이었고,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확인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신자의 수보다는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전을 신축해야 했고, 본당은 분가해야 했습니다.
1년을 배워야 하는 교리는 6개월로 단축해서 배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채우는 것보다 친교와 활동을 넓히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주일미사의 참례 수가 80%가 넘었는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20%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고,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도시 생활과 핵가족으로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덕을 쌓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는
재물, 권력, 명예로 현세해서 성공하는 삶을 먼저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기보다는 대학만 갈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잠시 성당에 가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신자는 늘어났지만, 성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성직자도 늘어났습니다.
냉담자도 늘어났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지듯이,
샘이 깊지 않으면 가뭄에 곧 말라버리듯이
교회에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도, 칼도, 죽음도, 세상의 권신도, 천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준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에게 전해 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의 빛이 이웃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참된 행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 하신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즉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아드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필립보의 이 질문은 우리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체험을 한다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것이라고,
혹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는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오상선 바오로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의 청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다가,
급기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하시는 말씀에 그분을 죽이려 했지요.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제자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10)
아버지와 아드님은 하나이십니다. 또 이어서 말씀하실 성령과도 함께 한 분이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지하고 아둔한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조금씩 열어 보이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오한 신비를 향해 제대로 알아듣든 미처 다 못 알아듣든,
마치 안개 속을 더듬듯 한 걸음씩 다가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오늘 복음 말미에서 드러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13)
어째 이 말씀이 낯이 익습니다. 그리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약속들은
이미 당신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던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 그대로입니다.
어제 우리가 만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지금, 당신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사랑과 신뢰를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폭적으로 쏟아붓고 계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면서 당신께 하신 일을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하실 겁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 안에 현존하시고 머무르신다는 말씀에
이만한 증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새 아드님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내"가 온전히 "그"가 되는 것. "그"가 내 안에 온전히 녹아들고 스며들어
"내"가 되는, 결국 하나가 되는 신비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 사랑 가운데 주고받으신 일치의 신비를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제자들을 통해 우리들에게도 열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약속 이전에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드님 손에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뵙고,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온전히 계시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 아드님을 통해 드러난 그 사랑이
엄연히 우리 가운데 존재하니 걱정하고 두려울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1코린 15,2)
두 사도의 축일에 우리에게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오늘도 "길"이신 분과 묵묵히 나아갑시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길⋅진리⋅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 14,6-14)
박 마리 안젤로 수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많이 들었던, 익히 알고 있는 성경구절 입니다.
나는….이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라고 당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저에게는 이 말씀이 대단히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서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없으니…
제발 내 이름으로 청하기만 하여라.
그러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제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세상에서,
무엇을 청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이는 ‘을’이고,
그것을 듣고 줄 수 있는 이는 ‘갑’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반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주실 수 있는 분이 제발 청하라고,
그렇게 나를 이용하여 하느님께 가자고,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아니, 설득이 아니라,
애원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도 단순해지려고 합니다.
때론
‘이런 걸 청해도 될까?
나도 염치가 있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청하지 않기도 하고,
수도자인 내가 이런 걸 청하면 안 되지
라고도 생각하며
자체적으로 걸러내는 것들이 많았는데,
무엇이든 자주 청하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과 통하는
체험을 해 보려고 합니다.
기꺼이 이용당해 주시겠다는 예수님,
그분을 어린아이처럼 자주 불러,
청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겠습니다.
[출처] 요한 14,6-14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