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한 자들이 모이면 자주 하는 말이 "요즘 기억력이 없어졌어" "냉장고 앞에서 한참 서있곤 해" "이러다 그 병 걸릴까 두려워" 등등이다.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라때로 말하자면 마흔 중반까지도 전화번호부 없이 잘도나 살았건만 학창시절에도 시험 공부 그다지 하지 않아도 워낙 기억력이 좋아서 놀고도 시험 성적은 잘 나오는 학생이었건만 세월 앞에 장사없다. 이제 누가 어떤 짓을 했다더라는 웃음꺼리가 아니라 걱정꺼리다. 부르스 윌리스가 마누라 못 알아본다는데 웃을 수 있는가.
나로 말하자면 어제만해도 유투브에서 인디아나 존스 쇼츠를 보는데 좋아했던 이 배우의 이름이 생각이 안났다. 사람 이름 생각 안나는거야 비일비재하므로 이제 굳어가는 뇌세포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생각나기도 하니까. 이러한 때 옆에 누가 "해리슨 포드잖아. 유명한 사람인데"하고 쉽게 말하거나, "생각이 전혀 안나셔?"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비참해진다. 내가 이런 머리로 오랫동안 선생질을 했나하고 씁쓸해진다.
나도 방편은 있다. 꽤 오래 써먹고 있는 나만의 비밀무기다. 오늘도 써먹지 않을 수 없었던 바, 성공했다.
정확이 오늘 아침 8시 35분에 단어 하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필 영감신이 대개 오전에 강림하시는지라 메모지에 기록을 하곤 하는데 갑자기 두글자로 된 이 단어가 생각이 안났다. 9시가 될 때까지 끌쩍인 단어들을 보면, '도용' '모방' '발췌'..등이었다. 5분 정도 낑낑대다 나만의 필살기를 적용했다. 머릿 속으로 "가나다라 마바사하.."를 읊어가는 식이다. 그래도 생각이 안나면 "고노도로 모보소오.." "구누두루 무부수우..". 이렇게 첫자를 떠올리는 작전이다. "캉탕팡항"까지 가면 지친다. 오늘아침에 반 시간을 낑낑대다 만난 단어는 '표절'이었다. '코토포호'하다가 '포'에서 '표'가 떠올라 해결했다.
왜 이런 단어가 생각이 안났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얏호~"하고 이 발견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쳐 나온 자가 나만큼 기뻤으랴.
2024.9.14
첫댓글 ㅋㅋ "도용 모방 발췌" 할때 표절이 생각났어 ㅋㅋ
갓천재!
수필 영감신이 오전에 강림하시는 ~ ~ !
오호라 ~ 역시 오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통찰을 베푸시는 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