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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5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3,26-33
복 음 : 요한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0억 원을 가질 수 있다면 죄를 짓고 1년 동안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고 조금 놀라운 응답 결과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겠다고 답변할 것 같은데,
고등학생 56%, 중학생 39%가 “돈을 받는다면 감옥에 가도 괜찮다.”라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가지 않겠다.”라고 대답한 아이들의 답변 이유도
‘전과자가 되면 직업을 갖기 힘들다.’, ‘전과기록을 남기기 싫어서.’, ‘신상에 남으니까.’ 등
소위 스펙 관리를 걱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빨간 줄 그어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10억 원 가지고는 강남 건물도 못 사요.”
미래의 꿈나무라고 하는 아이들이 ‘돈’에 매여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어서 부자 되는 것이 성공이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부자는 행복한 사람일까요?
청소년 행복지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돈 자체는 수단일 뿐인데, 돈이 목적인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그 책임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가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것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늘 돈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 기회가 없었고, 돈 걱정하는 어른을 보면서
그냥 많이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돈 자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 큰 가치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돈 많이 벌라고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소중한 가치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돈 역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자선,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후회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 후 제자들과의 담소 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몇 시간 안 남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침통하셨을까요?
그런 중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죽음 후 실망에 잠길 제자들이
또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할 것을 내다보시며 격려와 안심시킬 약속을 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렇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고,
이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늘 맨 뒷자리로 밀려날 때가 많습니다.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요? 무엇이 행복으로 이끌어 줄까요?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남자들은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둘째는 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고,
모르는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 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 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천상에 목적지를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확실한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을 ‘문’(요한10,9).이라고도 하셨는데
예수님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18,37).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예수님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10).고 말씀하셨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갖고 계셨기에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데 길이 되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14,1).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시며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으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사건은 증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여성의 증언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당당하게 부활의 증인으로 여성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사건이 있었다는 공동체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으로 제자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선장이 없는 배는 거친 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고통도, 박해도, 죽음도 전혀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변화된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과학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과학기술과 도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증언과 변화된 제자들의 삶이 부활사건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사건에 대한 규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렇습니다. 부활은 사건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선포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캄캄한 지하무덤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우리에서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삶, 사랑이 없는 삶, 희망이 없는 삶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것,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혼란스러워하자 그들을 위로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서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되리라 하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이시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 것이다. 이 길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드님은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진리”(áληθεια)의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14,1)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 내용의 바로 전 대목(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수난과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또 충성을 장담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신 뒤에
바로 오늘의 대목으로 이어지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이미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유다인들의 배척과 공격도 힘겨웠지만,
설상가상으로 방금 스승님이 보여 주신 행위는 마치 유언과도 같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아안고 계시지만
제자들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비유나 상징이기를 바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갈라지고 어지러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겠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사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한없이 추락해 곤두박질친 밑바닥에서, 발끝조차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 찾을 길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밖에 남은 게 없는 듯한 무기력 한가운데서
다시 힘을 쥐어짜서 생명과 진리를 부여잡게 만들 수 있는 실체는 믿음뿐이니까요.
삶의 질곡을 헤쳐오면서 깨지고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겨질망정
죽음 같은 절망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우리를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돌아보면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찬찬히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에 머무릅니다.
근데 예수님 참 바쁘시지요?
가서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셔서 데려가시고, 같이 계시겠다고 하시네요.
이미 세상에 오신 처음 움직임까지 치면
예수님의 동선이 아래위로 엄청나게 크고 게다가 반복적입니다.
그 반복을 조망하다 보면 아버지에게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께로,
또 세상으로, 또 아버지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십니다.
하강과 상승, 또 하강과 상승...
그런데 단순히 아래위를 몇 차례 오가시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영광, 고통과 위로, 죽음과 부활...
참으로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시지요.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사도 13,26)
오늘 독서 내용은 사도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회당 설교 중 일부인데,
예수님의 강생, 즉 하강에서 시작해 상승과 하강,
또 상승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하십니다.
"곳"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하늘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존재, 하느님 현존, 하느님 주권,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심장... 등
그분 앞에 서면 미물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감히) 깃들여 머무를 수 있는
거대하고 영원하며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모르는 하느님의 품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런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품,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길이고 방향이고 동행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밟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올라가는 길일 수도 있고 내려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습니다.
목적지가 하느님이시니까요.
살다 보면 오르막길도 만나고 내리막길도 만납니다.
마냥 올라갈 수도 없고, 마냥 내려만 가지도 않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외길도, 고민스러운 갈림길도, 심지어 막다른 길도 마주치게 되는 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리입니다.
올라갈 때 목에 힘이 덜 들어간 만큼 내려가는 길이 유연할 것이고,
올라갈 때 어깨가 너무 치솟지 않았다면 내려갈 때 가벼울 겁니다.
우리가 걷거나 서 있는 모든 길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그분 품을 향해
그 안에 깃든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짊어지고 묵묵히 뚜벅뚜벅 나아가는 중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앞으로 닥쳐올 수난과 고통,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벗님의 마음 상태가 어떠세요?
뭔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우세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도 한가요?
괜히 나이 탓인지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도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시나요?
괜히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나요?
조급한 마음이 일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나요?
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내 마음이 이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쓸데없는 걱정말고, 그냥 부족한 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되면 부정적으로 기울었던 내 마음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맘이 밝아지고 나는 걸어가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이 테라 수녀
예수님께서 길을 알려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지를 제대로 모른 채
길을 찾고 있는듯하다.
그러다 보니 겉이 그럴싸한 길에 빠져들어
그 길이 내가 찾던 길인 양 그냥 그렇게 걸어간다.
자기 자신을 주님이라 소개하며
주님 보고 싶을 땐 나를 보라는 그런 소리를
눈 하나 깜박 않고 얘기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길 위에
무고한 어린양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고 있다.
어떻게 그런 길을 우리 길과 같다고 착각할 수가 있지?
약간의 힐책과 나도 모르는 우월감 섞인 이런 질문 대신
어떤 세상의 악이 너를 짓눌렀니
얼마나 아팠길래 그 길이 주는 관심에 마음이 열렸니
우리의 무관심이 너를 다독이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앞도 구분 못 하는 피멍 든 네 눈을 바라봐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는 이런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살아있는 이 길은
모두를 찾아 걸어가고 있다.
맘 성할 날 없지만 그 길을 보여 줄 수 있는
살아있는 도구로 쓰이자.
혼자 걷는 안온한 길 대신
함께 걷는 먼지 날리고 메마른 길을
선택할 수 있길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
손잡고 함께 의탁할 수 있길
마음이 무뎌지지 않길
마음이 늙어가지 않길
아멘.
[출처] 요한 14,1-6 부활 제4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