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향기에 실려온 것
권영순
초여름 오후의 여문 햇살이 마당에 일렁이고 있다.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에 알싸한 향이 실려 있다. 설렘으로 눈앞이 환해진다. 아, 집 뒤의 밤나무에 밤꽃이 피고 있구나!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그곳으로 발을 옮긴다. 밤꽃은 잎이 무성하게 나무를 뒤덮은 후에 이파리 사이로 치렁치렁 실타래처럼 늘어지게 피는 타래꽃이다. 좁쌀 같은 연노랑 작은 꽃이 다닥다닥 모여 풍성한 꽃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카시아나 라일락꽃처럼 달콤한 향이 아니라 독특하고 진한 냄새를 풍긴다. 밤 동산에서 자란 내게 밤꽃은 고향의 얼굴이요 유년의 체취다. 꽃내음에 취해 서성이는데 마음은 밤꽃이 허옇게 산을 뒤덮고 그 향내가 온 마을을 휘감는 시골로 내닫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은 읍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다. 마을 주변으로 겹겹이 산이 빙 둘러쳐져 있는 산촌에 집집마다 소를 키웠다. 소는 농사일에 중요한 일꾼이었고 해마다 한 마리씩 낳는 송아지를 키워서 팔면 큰 수입이 되었다. 겨울에는 마른 볏짚이나 건초를 먹였고 짚을 작두로 잘게 썰고 콩깍지와 쌀겨를 넣어 끓인 소죽을 먹였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을 퍼 담으면 소는 빨리 가져오라고 연신 머리를 흔들었는데 이때 목에 달린 워낭이 댕그랑댕그랑 울리며 초가지붕에 달린 고드름에 와서 부딪혔다.
초여름이 되어 풀이 무성해지면 아이들은 매일 소를 데리고 산에 풀 뜯기러 갔다. 소들이 자유롭게 풀밭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산을 헤집고 다니며 군것질 거리를 찾았다. 찔레를 꺾고 삐삐를 뽑아먹었으며 잔대도 캤다. 보리가 팰 무렵부터 열리는 덩굴딸기와 이어서 차례로 열리는 나무딸기, 송아지딸기, 먹딸기는 소몰이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밤송이가 벌어지고 잘 익은 알밤이 툭툭 떨어지면 그야말로 풍성한 요깃거리가 되었다. 주머니에 불룩하게 주운 밤을 소가 풀을 뜯고 있는 주변에 모여앉아 껍질을 퉤퉤 뱉으며 까먹으면 꿩 울음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산속 좁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고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산에서 저절로 자라는 산밤나무 외에 마을엔 밤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은 마을 주변의 산자락이 온통 밤나무다. 우리 고장에 유독 밤나무가 많아진 데는 친척 아저씨 한 분의 공이 크다. 그분은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자주 도회지를 다녀오는 분이었다. 어느 날 이분은 자신의 집 뒤 야산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밤나무 묘목도 키워서 팔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밤나무를 심기를 권유했다. 밤농사를 지으면 외국에 수출도 하고 도시 사람에게도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과 이웃 동네들에서는 너도나도 산을 개간하여 밤나무를 심었다. 몇 해가 지나고부터 수확이 시작되었는데 그분은 마을 젊은이들에게 밤을 따는 일을 시켰다. 농사일이 전부였던 시골에 부업거리가 생긴 것이다. 낮에 일꾼들이 밤을 따서 그 어른의 넓은 마당에 쏟아놓으면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 밤을 깠다. 호박색 전등불 아래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밤을 까는 동안 뒷동산의 소쩍새 울음소리에 들판의 벼가 익어갔다. 돈이 귀한 시절에 밤 수입은 인기였다. 마을마다 점점 더 많은 밤나무를 심게 되었고 수입이 느는 만큼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이 양옥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에 밤을 수거하고 분류해서 파는 집하장도 생겼다. 친정 부모님도 선산에 심은 밤나무에서 거둔 밤으로 해마다 얼마의 수입을 올리셨다.
밤농사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밤나무 주변의 풀을 여름 내내 몇 차례씩 베어주어야 한다. 자녀들 모두 출가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밭농사와 함께 밤나무 돌보는 일은 오롯이 친정어머니 몫으로 안겨졌다. 산비탈에 억세게 자란 풀을 베어내는 것은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거친 일이었다. 밤송이가 익어 벌어져 알밤이 떨어지면 어머니는 매일 산에 오르셨다. 한 톨 두 톨 허리 굽혀 줍고 송이 째 떨어진 것은 낫으로 깠다. 날카로운 초록 가시에 손이 찔리고 때로는 밤송이가 정수리에 떨어져 따가운 화살로 꽂힌다. 비탈에 서 있는 밤나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밤을 줍는 것은 해가 갈수록 어머니 힘에 부치는 일이 되었다. 밤 포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까지 걸어오는 일도 허리가 비틀거리는 고된 일이다. 해마다 어머니가 힘겹게 거둬서 택배로 보내오는 밤을 나는 편하게 받아서 이웃들과 나눠 먹었다. 연세가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밤 줍는 노동이 점점 더 염려가 되었다. 산비탈에서 굴러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밤 동산에 그만 다니시시라 했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잔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튼실한 밤을 그냥 버릴 수 없다면서 여전히 거두어서 내다 팔기도 하고 자녀들에게도 보내셨다. 막내인 내게는 다른 형제들의 몇 배로 보내셨다.
재작년 일이다. 밤이 익어갈 무렵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어머니는 “얘, 밤 두 포대 택배로 보냈다. 네 언니 오빠에게는 절대 비밀이다. 내가 산에 안 간다고 말했거든” 하신다. “그러다 다치시면 언니들에게 저도 혼나요” 하는데 목이 멘다. 우리 집은 고기, 생선 안 먹으니 영양 많은 밤 많이 먹어야 한다며 굳이 밤을 보내시는 어머니. 나중에 언니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 산에 다니다 다치시면 네가 책임질 거니?” 하며 정색으로 나무랐다. 작년에는 마침 추석 무렵에 밤이 한창이었다.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가서 이틀을 밤을 주웠다. ‘밤아 한꺼번에 다 떨어져라. 어머니 산에 안 오시도록.’ 남편은 밤나무에 올라가서 장대로 밤송이를 두드렸다. 밤송이들도 화들짝 놀라 다투어 뛰어내렸다. 묵직한 밤 자루를 싣고 서울로 출발하는 날 아침, 어머니가 헛간 구석에서 20kg은 족히 되는 밤 두 포대를 보여주신다. “이것도 가져가거라!” 어머니는 우리가 오기 전 가까이 사는 언니들 몰래 산에 다니신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허리 이끌고 산비탈을 엉금엉금 기면서 밤을 주운 것이다. 이제는 자루를 어깨에 메지 못하겠다면서 끌고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이게 내가 밤 줍는 것 마지막이다!” 아아, 어머니! 내가 결혼한 후 30여 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밤과 함께 온갖 곡식을 보내주신 분, 평생 사랑의 보따리로 따라다니시며 응원해주신 나의 어머니!
밤꽃 흐드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구순이 넘으신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허리가 아파서 이웃 동네 마실도 힘들어하시는 분이 훠이훠이 지팡이 짚고 산에 올라가 나무 밑에 엎드려 밤톨을 줍는 모습이 눈물 속에 어린다. 무거운 밤 자루를 끌고 내려오시며 몇 발자국 걷다가 후유 한숨 쉬며 주저앉기를 얼마나 반복하셨을까. 한 해 길어 올린 모든 진액을 밤톨 하나에 오롯이 쏟아 붓고 알맹이가 여물면 미련 없이 툭 떨어뜨리고 빈껍데기로 남는 밤송이처럼 어머니는 자식들 키워서 다 내보내고 홀로 앙상하게 여위어 가신다. 밤송이마저 가지를 떠나서 말라 바스러지고 흙으로 돌아가듯이 육신의 옷을 벗을 날도 멀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거름이지!” 언젠가 어머니 입에서 밤톨처럼 굴러 나온 말씀이 내 마음에 박혀 있다. 당신 말씀 그대로 우리 육 남매 낳아 길러 막내인 내가 오십 중반이 되기까지 기름진 양분으로 당신을 다 내어 주셨다. 철마다 때마다 쉬지 않고 흙 일구어 먹을거리 만들어내고 아침저녁 하늘 향해 기도 올리며 정성을 다하셨다.
밤나무 아래서 산골 마을의 어릴 적 추억을 거닐었다. 밤꽃보다 더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의 뜨락에 오래 머물렀다. 올해는 밤이 익을 무렵 아예 휴가를 내어 시골에 며칠 머물러야겠다. 토실한 밤을 까먹으며 밤톨같이 꽉 찬 생애를 사신 어머니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야겠다. 좋아하는 시인의 한 줄 시가 떠오른다. “가장 짧은 시, 울 엄마!”
첫댓글 아, <밤꽃 향기에 실려온 것>
'좋아하는 시인의 한 줄 시가 떠오른다. “가장 짧은 시, 울 엄마!” '
글 내용의 '밤꽃 향기'가 아름답고 끝마무리가 깔끔하네요
제가 컴퓨터 다루는데 서툴러서 마지막 줄이 자꾸만 가운데로 갑니다.
고치고자 시도해보아도 안되네요
읽으시는데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