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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지옥, 음부, 그리고 연옥, 이게 다 뭐야?]
몇 해 전 지인의 장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고인과 같은 교회에 출석하신다는 권사님이 상주분에게 "지금은 막 운명하셔서 영혼을 두고 영적 싸움이 심한 때이니, 고인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상주분은 잘 알겠다며 지금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제 귀가 의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권사님이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과 성도라는 상주가 아멘으로 답하는 현실이 슬펐습니다.
도대체 막 숨을 거둔 성도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기에 그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일까요? 권사님의 말 뒤에는 죽은 뒤에도 영혼이 갈 곳이 아직 다 정해지지 않았고, 산 사람의 기도가 그 길을 돕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데에는 낱말이 뒤섞인 탓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옥도 나오고 지옥도 나오고 음부도 나오는데, 여기에 연옥이라는 말까지 끼어드니 성도들이 이게 다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 헷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런 혼란은 뉴스에 자주 나오는 구치소와 교도소를 견주어 보면 쉽게 정리됩니다. 둘 다 높은 담 안에 사람을 가두니 흔히 감옥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구치소는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을 가두는 곳이고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 사람이 형을 사는 곳입니다.
이름이 다르면 하는 일도 다른데,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로는 비슷하게 들리는 옥과 지옥과 음부가 원어에서는 서로 다른 낱말이고, 가리키는 자리도 서로 다릅니다.
먼저 옥은 헬라어로 퓔라케(φυλακή)이며, 지키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사람을 가두어 지키는 곳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약은 이 낱말을 보통 감옥에도 쓰고("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6), 사탄이 갇힌 곳에도 씁니다("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 20:7).
다음으로 지옥은 게엔나(γέεννα, 흔히 게헨나)로, 히브리어 "게 힌놈" 곧 예루살렘 남서쪽 힌놈 골짜기의 이름에서 온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낱말로 악인이 받을 마지막 형벌을 말씀하셨는데,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와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 모두 이 낱말을 씁니다.
음부는 하데스(ᾅδης)로, 구약의 스올을 헬라어로 옮길 때 쓰던 말이며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곳을 가리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는 말씀(눅 16:23)과,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행 2:27)가 이 낱말을 씁니다.
여기에 낱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의 "지옥에 던져"는 타르타로오(ταρταρόω)라는 동사를 옮긴 말인데, 신약 전체에서 이 한 번만 나오고 범죄한 천사들을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마지막 형벌을 가리키는 게엔나 대신 가두어 지키는 곳을 뜻하는 퓔라케를 골랐고, 그 영들이 노아의 날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벧전 3:20)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옥은 형벌을 다 받는 곳이라기보다 갇힌 채 심판을 기다리는 곳에 가깝습니다.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라는 말씀도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구치소 비유는 여기까지만 맞습니다. 구치소에 있는 사람은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지만,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할 뿐 옥에 있는 영들에게 다시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말할 때 흔히 함께 떠오르는 연옥은 이 넷 가운데 어디에도 없는 이름입니다. 연옥(煉獄)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단련한다는 뜻의 한자를 붙인 이름으로, 성경에 나오는 낱말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세운 교리의 이름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죽었으나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은 하늘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영혼을 위해 산 사람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며 대사(大赦)를 얻어 주라고 권합니다. 대사는 교회가 죄에 따르는 벌을 덜어 준다는 제도입니다.
이 연옥은 가톨릭이 사도신경에서 "저승"이라 부르는 곳, 곧 그리스도 이전의 의인들이 구원자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내려가셨을 때 풀려났다는 곳과도 다른 자리입니다. 또 가톨릭 교회는 사람이 죽는 바로 그 순간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니, 죽은 직후에 영혼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다는 권사님의 말은 가톨릭 교리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연옥 교리의 근거로 가톨릭은 몇몇 성경 구절을 내놓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도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칭찬을 받았듯, 이 구절들도 앞뒤 문맥과 다른 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합니다.
미국의 가톨릭 변증 단체인 가톨릭 앤서스(Catholic Answers)는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의 옥을 연옥으로 읽습니다. 이 옥이 퓔라케이고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옥도 같은 낱말이니, 둘 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퓔라케는 앞에서 보았듯 보통 감옥에도 사탄의 감옥에도 쓰이니, 같은 낱말이 나온다고 같은 곳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이 말씀은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마 5:24)라는 명령 끝에 붙은 비유로, 심판받기 전에 서둘러 화해하라는 경고입니다. 칼뱅도 이 비유는 화목을 가르칠 뿐 연옥과 상관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드는 또 하나의 말씀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입니다.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셨으니,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는 죄도 있다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전하는 마가복음은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9)라고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죄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을 뿐, 죽은 뒤에 용서받는 죄의 목록을 따로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정화의 불을 말할 때 드는 말씀은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입니다. 가톨릭은 이 불을 죽은 뒤에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로 읽습니다.
이에 같은 장 13절은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불은 주님의 그날에 일꾼들이 교회 위에 세운 공적을 시험하는 불이고, 그 불이 시험하는 것도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그가 세운 일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근거로는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속죄의 제물을 보냈다는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이 쓰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개혁교회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경으로 받지 않는 외경이어서, 교리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병사들은 율법이 금한 우상의 부적을 옷 속에 지닌 채 죽었으니(마카베오기 하권 12:40), 은총 안에서 죽은 이들이 거친다는 연옥의 근거로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가장 강한 논증은 이런 구절 하나하나보다 다른 데 있습니다. 성경은 하늘의 도성을 두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계 21:27)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와 싸우다가 끝내 완전해지지 못한 채 숨을 거둡니다.
그러면 죽는 순간까지 모자란 거룩함은 언제 온전해지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물음은 가톨릭만 던지는 것이 아니어서, 개신교 안에서도 연옥이라는 대답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진 영국 성공회 신자 C. S. 루이스는 말년에 쓴 책에서 "나는 연옥을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하늘 문 앞에서 하나님이 "네 숨에서는 냄새가 나고 누더기에서는 진흙이 뚝뚝 떨어지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으니 들어오너라" 하신다면, 우리는 먼저 씻고 들어가겠다고 대답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루이스는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연옥 교리를 의심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고통 자체가 목적인 연옥 대신 씻기는 연옥을 말했습니다. 웨슬리 전통의 철학자 제리 월스는 2012년에 낸 책에서 비슷한 생각을 펼쳐, 죄값을 치르는 연옥은 개신교가 받아들일 수 없어도 거룩하게 되는 일을 마저 이루는 연옥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 역사에도 이런 마음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숨을 거두기 전에 "이것 하나만 부탁하니,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라고 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모아 놓고 보면 이 논증은 가볍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남은 죄를 알고, 그 상태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자란 거룩함은 누가, 언제 온전하게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에 개혁교회는 죽는 순간까지 거룩함이 모자라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 거룩함이 온전해지는 때와 온전하게 하시는 분을 성경으로 답합니다. 개혁교회는 신자의 영혼이 죽을 때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곧바로 영광에 들어가고,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채 부활 때까지 무덤에서 쉰다고 고백합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는 일은 부활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도 하늘에 있는 이들을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몸을 떠난 영혼이 가는 곳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하늘과 악인이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형벌의 자리 두 곳만 고백하고, 성경이 그 밖의 다른 곳을 말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그러니 루이스의 바람은 개혁교회의 고백과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씻기고 들어간다는 데까지는 같고, 다른 점은 씻기는 데 고통의 시간이 걸리느냐와 그 일을 누가 하느냐입니다.
모니카의 부탁에 대해 칼뱅은 성경으로 따져 본 가르침이 아니라 늙은 어머니의 소원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식의 정으로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칼뱅은 옛 교부들도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머뭇거리며 권했고, 그 관습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풍습에서 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연옥 교리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물음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이 충분하냐는 물음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라고 답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죄가 용서받아도 그 죄에 따르는 벌은 남는다고 가르치고, 연옥의 정화와 대사도 이 남은 벌을 덜어 내는 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말할 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남은 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라고 말합니다. 증서가 지워진 사람에게는 갚을 빚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시는 일을 사람의 법정에 그대로 견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법에서도 형기를 다 채우고 나온 사람에게 남은 형기를 마저 살라는 통지서를 보내지 않는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치르신 값을 두고 남은 형기를 말하면 그 값이 모자랐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히브리서는 같은 장에서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니 죽은 이가 정화되도록 미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가르침은, 가톨릭이 그것을 십자가의 한 제사라고 설명해도 이 말씀과 어긋나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말씀과도 어긋납니다.
칼뱅은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는 유일한 속죄라면 연옥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했고, 이 문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죄값은 다 치렀다 해도, 죽을 때까지 온전히 거룩해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월스가 던진 물음도 이것인데, 이에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답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일을 시작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마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도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하며, 그 깨끗함에 죽은 뒤의 불이나 남은 이들의 기도를 보태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일의 순서를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적었습니다. 의롭다 하시는 일부터 영화롭게 하시는 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니, 그 사이에 우리의 고통이나 다른 사람의 공로가 보탤 것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연옥을 믿느냐는 물음은 죽은 뒤의 세계를 어떻게 그리느냐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물론 성경이 다 말해 주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몸을 떠난 영혼이 부활의 날까지 어떻게 지내는지, 낙원이 어떤 모습인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바울도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고후 5:8)을 원한다고만 했습니다.
그날 상주분에게 필요했던 말은 고인의 영혼을 두고 싸우라는 당부가 아니라, 고인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남은 가족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는 위로였습니다. 성경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계 14:13)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도 정화를 거칠 틈 없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옥과 지옥과 음부는 성경이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자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가 가는 곳은 주님과 함께 있는 낙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성도에게는 죽은 뒤에 더 치를 값도, 더 거칠 정화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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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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