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CP-G4zRZ-vI&t=41s
그람시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 피고의 두뇌를 영원히 정지하라
문화
그들이 블랙리스트를 버릴 수 없었던 이유
불후의 명저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편 - 금영재 이산아카데미 본부장
CJ가 밉보였다고 알려진 영화 변호인은 사실 '위더스 필름'이 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박근혜의 심기경호를 위해 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다.ⓒ네이버 영화
박근혜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변호인’이 마음에 안 들었고, 김기춘은 문화계가 좌파에게 점령당했다며 개탄했다. 이를테면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 같은 애국영화(?)가 천만 관객을 쓸어 담아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이미경 CJ 부회장을 끌어내리면서 했던 말이 ‘CJ의 정상화’였고 원세훈 국정원은 댓글질을
‘대북심리전’으로 포장했다. (여러 말이 있지만, 실제로 CJ가 찍힌 이유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의견도 많다.) 결국 CJ는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에 따르면 이 심리전은 좌파의 ‘진지전’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맞대응 내지는 선제적 공세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헤게모니’와 ‘진지전’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지만, 한국에선 좌파보다 우파들이 이 ‘진지전’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올해 「월간조선」 신년호엔 ‘이빨 꽉 문’ 우파의 결연함이 배어있다.
문화전쟁의 시대, 보수우파 진지(陣地)재건론 대두!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수가 살려면 목숨 걸고 제대로 싸워야 한다.”
7, 80년대부터 문화계에 침투해 암약한 좌파들이 이미 문화판을 장악했고, 보수는 밥그릇 싸움하다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헤게모니 장악에 실패했다는 것이 요지다. 보다시피 ‘진지전’이나 ‘헤게모니’라는 용어는 지금도 좌우를 막론하고 애용된다. 그람시의 이론이 꽤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피고인의 두뇌를 20년 동안 정지시켜야 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가 구속된 후 검사가 판사에게 장기징역형을 요청하며 한 말이었다. 그람시는 1924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개혁주의 정치가였던 마테오티가 의회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무솔리니가 한마디 뱉는다. “왜 이자에게 아무 일도 없는 거야?” 며칠 뒤 마테오티는 로마시 외곽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반파시즘 운동은 급격하게 타올랐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노동자가 조직된 서구사회(유럽)에서 우선 혁명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에서의 노동자, 시민의 봉기는 진압군의 살육으로 마감되었다.
비슷한 질문 같지만 “혁명은 어떻게 성공하는가?”와 “자본주의는 어떻게 살아남는가?”는 약간 다르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에 대해선 많은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증명했지만, 자본주의의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에 대해선 집중하지
않았다. 다만 서유럽에서 혁명에 도달하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수 있다는 주장만 제기되었을 뿐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노동계급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노동자의 단결과 교육에 천착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고결한 성품 때문에 큰 사랑을 받았다.ⓒ구글
그람시는 ‘대중은 왜 파시즘을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노동계급이 전면적인 공세를 취했을 때 보통 시민사회는 이를 두려워하는 소극적 관전을 하지만 대결이 정점으로 치달으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적극적 반동으로
선회하는 것을 목격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중의 일상적 사상문화로 정착시키는 힘을 헤게모니(hegemony)라고 보았다.
서구에선 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하지 못 했는가?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 사상과 종교를 대중에게 주입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헤게모니란 군중의 자발적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먹히지 않았을 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국가폭력이다. 즉 구금과 처형, 진압을 위해 군대가 출동한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같이 낙후한 지배체제가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완벽히 상실했을 때 군대가 동원되지만, 봉기세력은 군대마저 혁명군으로 흡수해 결국 승리한다. 이 모델을 그람시는 ‘기동전’이라고 했다. 기동전은 지배계급이 낙후하고 무능해 약간의 사회변화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낡았을 때 가능하다. 그람시는 이런 국가들을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로 보았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전부였고 시민사회는 원시적이고 무정형이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돼 있었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즉시 드러났다.” -
『옥중수고』 중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기동전과 진지전
‘기동전’이 이처럼 약한 고리를 끊어 정치권력획득을 목표로 벌이는 투쟁이라면, 이러한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을 때 노동계급은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해 싸우는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데올로기가 지배이념이라면, 헤게모니는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장치이자 물리적 힘이다. 지배계급의
이념이 전 사회적인 상식과 도덕으로 정착될 때 시민은 그들의 이념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지배세력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헤게모니로 전환해야 지배세력의 이익을 군중 일반의 이익으로 믿게 하면 ‘자발적 합의’에 의한
지배가 가능하다. (물론 그람시가 언급한 도덕과 상식은 철학적 범주로서의 개념이다. 파고들면 복잡하니 여기선 간단히 다루자.)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다.’
‘성실한 근로와 검약이야말로 부자 되는 길이다.’
‘일류 기업 삼성 하나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
‘대규모 파업이 경제를 망치고 나라를 망친다’
이런 주장이 가치규범(상식)으로 정착되면 지배계급의 통치는 더욱 수월해진다. 당장 철도나 물류파업이 벌어지면 언론은 앞 다퉈 하루에 몇 조가 증발한다는 식의 기사를 쏟아낸다. 평소의 구조화된 갈취와 비인간적 처우는 전혀 ‘사회위기’가 아니었지만, 파업은 ‘나라 망치는 국가위기상황’이 된다.
자본주의가 당신의 동의 없이 굴러가고 있다고?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벌이는 여론전을 유심히 보면, 계급을 일정하게 대변하고 있는 언론, 지식인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달리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싸움은 상당히 유동적이며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다.
한때 무상급식의 경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직을 걸고 주민투표를 할 만큼 논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보수 교육감 후보라 할지라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낙선을 각오하지 않는 한
‘무상급식 폐지’와 같은 공약은 내걸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최저임금 인상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반응을 유심히 보자. 테마는 어느새 '자영업자 폐업'이나 '경비원 해고'로
바뀌고 있다. 헤게모니 전쟁은 이처럼 구체적인 일상에서ⓒ서울신문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시민사회가 완전히 정착된 서유럽 사회의 경우 이러한 헤게모니의 역할은 혁명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미 시민사회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회의 경우 지배계급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력하게 유지해주는 지식인 집단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문화예술은 물론, 언론, 사법, 행정과 같은 모든 영역에서 지배계급과 국가의 이익이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사회변혁을 갈구하는 세력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과 ‘역량’을 확보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이다. 그람시는 자본가나 노동계급 양쪽 모두 확고한 대안과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 할 때 파시즘이 탄생하고, 봉기의 실패 후 찾아오는 것은 살벌한 학살과 탄압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독재의 탄생과 성장원리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해. 그럼 넌 뭐야
옛날 운동권이 후배를 놀려먹을 때 쓰는 썰렁한 농담이 있었는데, 맑스가 말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이야기였다.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즉 생산양식이라면 상부구조는 법과 제도, 사상 문화를 의미한다. 좌우지간 맑스의 이원론을 거칠게 다루자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선배는 신입생에게 썰렁한 퀴즈를 내곤 했다.
“잘 들어.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했어”
“그런데 마르크스는 0이고 레닌은 1이야. 모택동은 2야. 넌 그럼 몇이야?”
무슨 고차원적인 사상분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름의 받침 자음의 개수일 뿐이다.
이 썰렁한 농담을 꺼낸 이유는 바로 상부구조에 대한 그람시의 통찰력 때문이다. 그람시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명제를 결정론으로 받아들였다. 맑스가 몇 차례의 서한을 통해 혁명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필연적 순차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서유럽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노동자가
파업에 나서면 대학생과 시민이 동참해 도시를 점령하는 거의 내전 수준의 투쟁이 해마다 벌어지곤 했다.
그람시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즉, 상부구조의 결정력과 중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간파했다. 활동가들은 그람시 이후에야 비로소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사회의 지배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지식인 집단(유기적 지식인)에 맞서
노동계급의 대항 헤게모니를 생산하고 일상에서 대중의 사상문화를 점령해야 했다. 노동자의 경우 조합의 경제투쟁을 넘어 노동자를 교육하고 조직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별도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직된 노동자는
훌륭한 대중선전가여야 했다.
‘노동자’라는 처지만으로는 혁명적이지 않으며 사회의 낡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잡혀 있다고 보았기에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연대의식, 정치력을 고양시키고 훈련하는 것은 기층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이 힘이 결정적 시기에 국가기구를 장악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람시는 아무리 정세가 좋고 대중적 움직임이 있어도 이를 지도하고 국가권력(군대, 철도, 은행, 행정기관 등)을 장악할 수 있는 역량이 없이 봉기하면 끔찍한 살육전으로 혁명조직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라 했는데, 이것은 실제 서유럽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경험이었다.
1920년 토리노 지역에선 노동자 100만이 파업에 나섰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무임금 상태에서 생산은 재개하고
통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노동조합 지도부가 겁을 집어먹었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곧 파시스트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도 노동자들과 토론모임을 가졌고 3천 쪽에 달하는 노트를 남겼다. 『옥중수고』는 이렇게
탄생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내면화된 자기성찰이 아닌 사회주의 전망을 위한 정치이론이 탄탄한 역사적 고증과 함께 실렸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기억과 경험만으로도
시대의 역작을 쓸 수 있었던 역량이 있었다. 스탈린과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가 혁명적 정세라고 진단하고 총봉기를 결정할 때마다 그는 이러한 진단에 반대했다. 그람시는 노동계급이 아직은 헤게모니를 장악할 힘이 없다고
보았다. 지역적 승리는 가능해도 사회를 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없기에, 단기적 폭동으로 노출된 조직은 모두 폭력적으로 제거될 것이라 보았다. 참호 속에서 정치전과 군사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루탄 연기 속에 상영되었던 ‘파업전야’
한국의 7, 80년대 운동가들 일부는 문화영역에 투신했다. 영화 ‘파업전야(1990)’를 상영하는 대학은 수만 명의 전투경찰에 둘러싸여 밤새 공방전을 벌여야 했고 심지어 전교조의 결성과정을 그린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1991)’ 역시 상영 자체가 공성전이었다. 내용은 문화였지만, 양상은 꽃병과 곤봉이 부딪히는 전쟁이었다.
1990년 봄, 공장과 대학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구글
‘파업전야’의 경우 강당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각에도 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경찰의 진압을 막아야 했기에 당시에 실제 영화를 본 사람보다 정문 밖에서 꽃병을 던지며 난투극을 해야 했던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은, 장동홍,
장윤현의 공동 감독이었는데, 이후 이은 감독은 영화 ‘카트’, 장동흥 감독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장윤현 감독은 ‘접속’ 등을 내놓았다. 참고로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의 주인공 역은 영화배우 장진영이 맡았다.
경찰의 필름압수에도 불구하고 파업전야는 대학에서 흥행했다. 노동자들이 대학 강당에서 영화를 보고 학생이 경찰진압을 막는 일도 빈번했다.ⓒ구글
가운데 선생님 역이 영화배우 장진영이다. 지금 영화계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감독과 배우 중 과거 독재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낸 사람이 많다.ⓒ구글
8, 90년대는 김남주와 네루다의 시를 읽고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읽은 젊은이들이 문화전쟁에 뛰어들었던 시기다. “붓은 총을 대신할 수 있지만, 총은 붓 역할을 못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분기점에선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거나 대변하는 세력이 선택받았다.
박근혜 정권과 부역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너무나 진지했던(?) 나머지 진보를 위한 상식적 메시지조차 ‘좌파의 진지전’으로 이해했고 이를 ‘심리전’으로 대응했다. 지금은 꼬리를 내렸지만 김기춘이 법정에서 모든 것이 우국충정의
일념이었다고 밝혔는데, 한국 공안의 수십 년 변치 않은 관념을 대변한 것뿐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명시된 것으로 착각하는데, 헌법에는 다만 ‘양심의 자유’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영역은 국가보안법이 지배한다.
그람시는 살아선 고립되었지만, 죽어서 화려한 이론으로 부활했다. 너나없이 그람시를 인용했는데 그람시 이후엔 그람시의 『옥중수고』 중 일부를 선전하며 정당성을 얻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그람시의 진지론과 헤게모니론을 그저 ‘메스미디어의 영향력’이나 ‘의석수의 확보’, ‘선거에서의 득표력’ 정도로 속류화하는 것이다.
역작이라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읽기란 쉽지 않다.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피해 쓴 글이었기에 혁명 정당은 ‘현대 군주’로, 맑스주의는 ‘실천 철학’으로 썼고 온갖 암호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시대적 맥락과 은유를 읽지 못 하면 ‘이게 뭔가?’ 싶은 책이다.
어떤 고전은 수십 년이 흘러도 현실해석에 영감을 준다. 세상의 변화가 어떤 주의나 거대담론에 의해서가 아닌, 구체적인 현실 영역에서의 끊임없는 쟁투에 의해 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람시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철학자의 책무 중 하나는 철학을 재해석하고 대중에게 진의를 알리는 것이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