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4/8) 정진일 동문의 문산 세계사랑교회의 교양강좌에 참석하였다.
비교적 승객숫자가 적은 편인 6호선을 타고, DMC(digital metre city, 월드컵경기장 다음역j) 역에서 전철을 갈아탔더니 아주 쾌적하게 50여분 달려 문산역에 닿았다.
문산 파주가 교통이 나빠 결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세월이 회고되었다.
두 아들이 여기에서 군 생활을 했기에 자주 다녔던 세월이 기억되었다.
파주 문산 지역에는 햇살이 가득 내려와 땅의 표면에서는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문산은 웬지 이름이 많이 알려진 도시지만, 행정적으로는 파주시에 포함되는 읍이다. 인구가 5만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즈음은 다녀온지 2,3년 된 곳을 다시 찾아가 보면 그 변한 모습과 달라진 교통편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계절은 봄을 향해 다사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문산 역에 내렸더니 진일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건너다보였다.
택시를 탈 것도 없이 천천히 걸어서 갔다.
문산의 공기는 일품이었다. 봄기운이 온 전신을 휘감아왔다.
꽤 큼직한 아파트 단지의 상가 건물 2층에 세계사랑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단독 건물은 아니었으나 교회는 깨끗했고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교회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큰 아파트단지를 끼고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담임목사와 보조목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두분 다 모교 문리대 철학과 82학번 동기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0대 후반이었다.
담임목사 백경삼 목사는, 모교 졸업 후,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석사를 했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프랑스 유학을 하였으며 70여개국의 선교지를 방문하였다.
부목사인 손형곤 목사는 모교 졸업후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크게보아 모교 동창생들인 우리들은 초면이었으나 너무나 친근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것이 모교가 같다는 사실의 힘이었다.
강연이 시작되어 진일이 강단에 섰다.
그러니까 문리대 선배인 진일이와 호흡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큰 사업을 일으키거나, 큰 감투를 써서 힘을 과시하지는 않는 사회적 역할이지만 신앙생활로 지역민들을 지도하는 후배들이 웬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 앓았던 내면의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을 만난 것같은 느낍이었다.
우리들도 60 세 넘어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최현근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가.
그는 먼저 내빈들을 소개하였는데, 필자를 소개하였고, 서울공대를 나와 미국 유펜에서 공부하신 후배를 한분 소개하였으며, 진일이 과거 안산구역에서 출마하여 안산 시 지역에서는 일등을 하였으나, 인천 근처에 흩어져 있는 각 섬들의 개표에서 져서 결국 고배를 마셨던 시절 사무국장을 하였다는 분을 소개하였고,
당시 야당이었던 진일은 돈이 없어서 이들 섬지역에는 가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출판사 사장 한분을 소개하였는데 나도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교회 식구들, 장로 권사 집사 등의 교회타이틀을 가지신분들을 소개하였다.
얼핏보아 한 50명은 되는 듯했다.
진일의 강연은 한 50분 계속되었다.
그의 강연은 무슨 뚜렷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관심은 주로, 문산지역의 역사 문화적인 가치를 말하고, 서울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문산의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문산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폐해를 받았는가를 말했다.
그는 6.25 때 전성기를 누렸던 양공주들을 미스코리아들이라고 했으며, 당시의 사진들을 공개하였다.이들 양공주들이 오늘날 나라를 휩쓸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원조격이라고 말했다.
사진들 속의 여성분들은 선입견과는 달리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진일의 말대로 조선의 고귀한 딸들이었다.
문산 파주지역에는 자고로 나라의 동량이 될만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려시대 6관을 개척한 윤관장군, 고려의 삼은의 한분인 야은 길재, 최영장군, 조선으로 넘어와서 율곡 이이, 권율장군, 오성 이항복, 이원익 등 쟁쟁한 인사들이 여기 파주 문산 출생들이라고 했다.
진일은 사람의 일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생과 사, 결혼, 마지막으로 거주의 운명 등을 거론하였다.
자신이 여기 문산으로 흘러와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옛 사무국장은 일어나, 안산 사람들이 진일이를 문산에 뻬앗겨 버려 다들 섭섭해 한다는 말을 하였다.
마이크를 잡은 정소성은 대학 동기생이 본 정진일을 말했다.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대성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람이 따르는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이고, 그가 아주 근소한 표 차로 금뱃지를 달지는 못했으나, 장관급인 정보문화위원회 위원장을 하여서 감투에의 한을 풀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평탄치 못한 정치역정 탓으로 부인이 큰 고생을 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촌색시라는 그의 닉 네임은 자신이 붙였다는 말을 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다들 진일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흐름이 역력하였다. 정소성은 과장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정진일을 소상하게 피력하였다. 이런 말도 하였다.
진일의 얼굴은 언제나 웃는 상이다. 사람이 웃으면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고민과 어려움을 소상히 꿰둟지 못하면 그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보낼 수는 없다. 여기 모인 사람 모두다 진일의 그 특유의 아이같은 웃음을 보러 왔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하는 표정들이었다.
진일이 자기가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잘 구분이 안간다는 표정이었으나 자꾸만 환하게 웃는 것으로 보아 결코 자신을 찬양하지는 않는 나의 발언이 기분 나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출판사 사장은 이율곡, 이항복, 이산해 등이 다들 덕수 이씨인데, 여기서 덕수는 바로 임진강의 물을 말한다고 했다. 문산은 그래서 물의 도시라는 것이다.
임진강과 문산, 과연 그런 것 같았다.
누군가 임진강과 문산을 가지고 장편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사람이 있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소설의 소재이다.
강연이 끝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강연중에 청중이 상당히 늘어났다.
교회차와 식당에서 보내온 차를 타고 화석정 근처에 있는 한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들었다. 식사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화기애애하였으며, 진일은 자신을 찬양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무되어, 술을 마구 들이키고 담배를 마구 피워대다 곁에 앉은 부인의 핀잔을 들었다. 정치한다고 일생 고생만 시키면 됐지 또 무슨 고생을 더 시키려고 하나...하는 표정이었다.
점심을 끝내고 화석정까지 걸어갔다. 화석정은 율곡의 화신같은 것이다. 율곡의 집안 선조들이 짓고 허물고 하다가 결국 율곡이 완성하여 제자들의 훈육의 장소로 썼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의주 간의 의주대로가 나라의 제일 도로였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문물이 수입되고 중국으로 가는 이 길이 나라의 명운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주대로 상에서 임진나루는 가장 거대한 나루터였다.
그 나루터를 보러 가자고 하여 차를 몰았으나, 6.25 때 가장 처참한 격전장이었기에 폐쇄되어 철조망으로 가려져 있었다. 접근조차 되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어 조국의 멸망을 막은 국군 1사단의 주둔지가 문산이었다.
아쉬움을 가슴에 담은 채, 촬영하고 차에 올랐다. 문산역에서 내린 일행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필자는 여기까지 온 김에, 임진각과 도라산을 보지 않을 수 없다하여 혼자서 길을 떠났다.
문산 역에서 표를 샀더니 임진각과 도라산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임진각과 도라산 지역 사이는 남방한계선 지역이라 민간인의 자유로운 통행이 불허된다.
이지역에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고, 동쪽 저 멀리 정주영 사장이 소 떼를 몰고 북으로 간 통일대교가 있다.
다만 임진각에서 헌병대에 신고하고, 도라산 지역 방문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절차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간단하였다.
도라산 이라는 산은, <라>자가 신라를 말한다고 한다.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경순왕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경순왕은 여기 도라산까지와서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너무나 슬퍼 울면서 왕의 몸으로는 이제 더 신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를 도라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하기야 경순왕은 경주를 식읍으로 받고 왕건의 두 딸을 아내로 선물을 받기는 했었다.
임진각에서 남방한계선으로 들어가는데 필수적인 목걸이명찰을 잊어버려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으나 이 지역을 지키는 헌병대의 지휘자인 여성 하사 한분이 어줍잖은 나의 옛소설을 읽은 기억을 회상하여 출입을 허가해 주었다. 기념촬영하였다. 나중에 그 목걸이는 엉뚱하게도 근무 헌병의 책상 밑에서 발견되었다.
도라산 전망대와 도라산 평화공원은 진입절차가 달랐다. 평화공원은 임진각에서 기차로 그대로 가면되지만, 전망대는 임진각에서 일반 관광뻐스를 타야한다.
임진각과 도라산을 돌면서, 언제나 웃음 가득한 진일의 모습과 언제 들어도 친근한 진일의 목소리를 거듭 그렸다. 서울에 도착하니 7시가 되었다.
진일이 언제나 오늘처럼 힘을 내시게나. 그대의 참한 마음씨 누구나 느끼고 있네.
강연을 시작하는 정진일 동문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기도하는 백경삼 담임목사
좌측 첫번째가 모다정보통신 회장 이종희 회장(서울공대출신)
정진일 내외와 필자, 박경삼 담임목사, 이호림 인간과 자연사 사장
좌측에서 세번째가 부목사, 손형곤 목사
철조망으로 폐쇄된 임진 나루터
임진각에 서 있는 미군 참전기념비
임진각에서 내려다본 돌아오지 않는 다리. 하지만 헌병대에 신고하면 이 다리를 건너 도라산으로 갈 수 있다.
목걸이 명찰을 잃어버린 필자에게 남방한계선 안으로의 출입을 허가해준 장이진 하사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으로 들어간 통일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