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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4:7-11
낮추는 자
(눅 14:7, 개역)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눅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눅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눅 14:10, 개역)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눅 14:11, 개역)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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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높이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신을 낮추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인잔치’라는 자리에서 그러하고
그리고 그 자리에 ‘청함’을 입은 사람에게는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실 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라는 것은
자기 사람을 골라내어서
천국에 앉히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혼인잔치 자리’라는 공간과
‘초청받은 자’라는
제한된 조건이 도입됩니다.
이것은 이러한 새로운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소위 자연스러운 인간세계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버릇처럼 굳어져버린
마음상태로서는 도저히 천국에 앉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천국은
이 지상에서 행세하는 그 태도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반대되는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 자리’와
‘청함’이라는 요건을
동원시킨 것입니다.
‘혼인잔치 자리’에서는
개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가치는 무시당합니다.
신랑과 신부만이 높임받아야 합니다.
결혼식 자체의 영광말고
사적인 영광은 제거해버리게 됩니다.
왜 이래야 될까요?
왜 개인적 영광과 가치를 가지고서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기존의 공간에서는
‘높임의 주인공’이
오로지 본인들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단이면서 이단 아닌 척을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됩니다.
‘마음을 낮추라’고 하면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상대방보다 더 낮은 마음으로 낮추려고 시도하려 하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혼인잔치’는
인간 대 인간의 잔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랑과 신부의 만남으로
성사되는 잔치입니다.
이 신랑과 신부는
인간이 해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존재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은 그대로이면서
외부적으로 치장하는 것으로
영광을 가장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과 같은
음녀들의 짓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는 보석으로 자신을 꾸미는 자가 아니라
아예 그 자체가 보석이 됩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지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에게
허락이 된다는 것은
새로움을 가지고 나타나신
예수님의 새로운 발상입니다.
기존의 사람들에게 있어 천국과 지옥은
본인이 그리워하고
본인들이 애쓰면서 사모하는
대상으로서의 천국과 지옥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들이
진정 누군지도 알지 못하기에 드러나는
상상 속의 세계일뿐입니다.
있지도 않는 세계입니다.
참된 천국이란
사람쪽에서 결정하기 나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정해진 사람에게 찾아와
덮쳐지는 세계입니다.
즉 천국은 인간들이 빠지고 싶다고
제멋대로 들락달락 빠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을 구경하고 싶다고
허락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미 결정나버린 조치가
그대로 인간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청’입니다.
초청으로 인하여
사람은 기존의 공간에서 배우고 익혀왔던
모든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전혀 천국과는 상관없는
기획이나 움직임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1:9-11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곧 천국이란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면
들어가게 되는 곳입니다.
성령의 이러한 조치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에 근거해서
움직이시는 조치입니다.
사람이 곧 ‘보석이 되는 성전’이 되는
그런 신부입니다.
이 신부의 영광수위는
신랑의 체면과 자존심을 고려한 변화입니다.
고린도전서 15:40에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따로 있는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고린도전서 15:42-44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욕된 것’이란
즉 ‘모욕적인 대우와 처우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을 두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교에서
거지 나사로가 얼마나 욕된 신체를 보여주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개들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신체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몸이기에
하늘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가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순서로는 우리 인간들은
신령한 몸이 먼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린도전서 15:46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그 이유는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즉 예수님의 낮아짐이
현재 우리의 낮아짐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을 반깁니다.
거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혼인잔치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청함을 받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이런 청함을
세상적인 윤리나 도덕으로
저지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세상에서의 죄 의식은
인간들의 행복과 불행으로 가름해서 발생되기에 세상에서 기대하는 혼인 잔치란
인간 대 인간,
곧 흙과 흙의 비교 우위에서 발생되는
허무한 가상 잔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눅22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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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강-눅14장7-11(낮추는자)110821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4장 7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4:7-11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공간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 새로운 공간이란 뭐냐, 바리새인들이 높은 자리, 대단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혼인잔치에 앉을 때는 상석을 차지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항상 낮은 자리에 앉고 높은 자리에 앉지 마.’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서 ‘혼인잔치’가 나오고 ‘청함’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두 개를 합해보면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특별한 공간이 있는데, 물론 그 특별한 공간은 나중에 하늘나라고 천국이지요, 그 특별한 공간이 있는데 그 하늘나라에 보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뭐든지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기서 노닥거린다는 자체가 시간낭비잖아요. 천국이 뭐냐가 궁금한 거예요. 천국이 뭐냐,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런 것이 궁금한데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려주러 오신 거예요. ‘나는 천국가고 싶은데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너는 지옥 간다.’ 하든지 혹은 ‘너는 천국 간다.’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간을 먼저 제시하는 겁니다.
‘현재 네가 네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는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가 성공이라고 알려주는 세계에 우리가 죽치고 줄 창 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금 주님께서는 천국에 보내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높은 자리 가야 되고 낮은 자리가면 쫄딱 망한다, 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하나님이 준비하신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법은 뭐냐, 새로운 공간을 제시하는 겁니다. 새로운 공간을 제시해서 기존에 이 세상을 살았던 태도와는 얼마나 대조적이고 대비적인가를 알려주시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혼인잔치’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이에요. ‘청함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혼인잔치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청함을 받는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라는 새로운 공간을 이야기하고 그 새로운 공간은 청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현재 주께서 제시한 천국 공간 말고 기존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내가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 통하게 되어 있지요. ‘내가 결정하고 나는 낮은 자리에 가서는 안 되며 나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만족하는 존재다.’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이 세상의 차이점이 뭐냐,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원하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천국도 내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곳이고, 지옥도 내가 원하면 지옥 갈 수 있는 그것이 통한다고 여겨지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지옥도 물론 그런 곳이 아니에요.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고 싶다고 가고 혹은 빠지고 싶다고 해서 빠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빨라서 못 들으신 분들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삐져서 천국에 안가고 싶다고 나를 빼달라고 해도 그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천국이에요.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되고 한 번 발을 들여놓았으면 빼도 박도 못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말씀을 볼 때 나는 이런 행동을 해서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반대로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행동했고 이렇게 버텼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천국으로 데려가더라, 바로 그 점을, 그 점을 성경에서 찾아내야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기존의 살던 이 땅, 이 공간에서 말썽꾸러기에요. 사람이 세상이 힘들다 하지만 가장 말썽쟁이가 누구냐, 본인입니다. 본인이 가장 본인에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가 우리가 태어난 곳이 천국이 아니기에 문제를 일으켜요.
우리는 이 세상이 좋다고 태어났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거기에 맞추어서 생활하다 보니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그동안 우리 자신을 힘들게, 참 괴롭게 만들었어요.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못 가졌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는 생각을 절대로 안하고 내가 그동안 노력을 안 해서 못 가졌다는 생각이 우리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만들고 스스로를 다그치게 만들고 매일 같이 우리 자신을 취조하게 합니다.
‘앞으로 그럴래, 안 그럴래?’ 그것이 우리 일상이 되고 우리의 버릇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를 들고 나와서 거기에는 청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신 거예요. ‘내 말을 듣는 너희들아, 지금까지는 네 가치를 인정해주는 그런 영역, 세계, 공간에서 네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했는데 정작 네가 천국을 발견하려면 나 자신의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공간을 새롭게 발견하라.’는 거예요.
나를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 그런 공간, 네 자로 하면 ‘우리교회’지요.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아무리 봉사하고 헌금하고 애써도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 공간, 홀대고 그런 홀대가 없고 천대도 그런 천대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그런 공간, 영역을 새롭게 우리가 발견해야 됩니다. 내가 좀 교회에서 뭘 했는데, 완전히 그것을 짓밟아 버리고 그로 인해서 삐져버린, 당나귀 입이 되었다는 그런 표현들, 더 이상 얼굴 맞대기가 힘든 지경, 그런 상황을 조성할 때 …….
가락교회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속에는 인간이라는 것이 없어요. 애초부터 자아만 있지 인간이란 없습니다. 인간도 아닌데 자아라는 것이 인간을 만들어내요. 마술사가 시커먼 모자 안에서 비둘기를 쏙 끄집어내듯이 우리는 매일같이 나는 이래서 인간이야, 라고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그런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하지요. ‘너, 선악과 따먹었지. 선악과 내 놓아라. 너는 흙이야. 선악과 내놔.’ 주님께서는 맨 날 선악과 내 놓으라고 이야기할 뿐이지요. ‘제가 인간이지요?’ 그런 질문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도둑놈 주제에 아닌 척을 하고 있느냐? 이 도둑놈아, 빨리 내놓아라.’
이게 성경을 제대로 본 성경 이해입니다. 성경만 덮어버리면 우리는 멋있는 사람 돼요. 성경 펼치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야 할 명분과 대의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은 자기명분과 대의 때문에 버티거든요. ‘나는 이것 때문에 아직까지 사람이다, 인간이다.’ 하는데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명분과 대의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에 눈길이 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가!’라고 지적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가 예상도 못한 새로운 환경, 새로운 공간이 덮칠 때 그 지시 ‘낮은 곳에 가!’라는 그것이 효력이 있어요. ‘어디서 감히 주제파악도 안 되는 것이 높은 곳에 있으려고 해.’ 이것은 기존의 공간에서 보통 ‘인간아, 낮은 곳으로 가라.’라고 해석을 합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많이들 하는 소리가 ‘서로에게 낮추시고 서로의 발을 씻기자.’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옛날 코미디프로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있어요. 구봉서하고 배 삼룡하고 양반 절하기 하는 것이 나와요. 거기서 그 둘이 웃기지도 않는 행동을 해요. 양반 예의 갖춘다고 서로 더 낮게 절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서로 낮게 절하려고 하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누워서 절을 하고 있어요. ‘내가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부족한 것은 바로 접니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부족하지요.’ ‘어허, 왜 이러십니까? 제가 부족합니다.’
이게 얼마나 코미디답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게 코미디인데! 아예 부흥사들은 성경책 끼고 그런 소리 하지요. (목소리까지 한껏 낮춰서는) ‘제가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현재 있는 기존의 그 공간에서 낮추려고 하는 그 낮춤 자체가 자기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겸손과 온유와 화평, 이런 것이 기존의 공간에서는 오히려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자기를 대단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으로 높일 수 있는 기술이거나 요인이 된다니까요. 아무리 낮추려고 해도 낮출 수가 없어요. 신장 떼어서 남 주고 안구도 주고 죽은 후에 시신까지 기증해도 그것은 일종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 쇼를 하는 거예요.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라고 할 때는 기존의 공간에서 아무리 시도해도 그것이 또한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변신되었다고 여기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거든요. 그러니 새로운 공간이 덮쳐야 돼요. 그게 바로 주께서 혼인잔치를 동원시키는 이유입니다. 혼인잔치의 하객들은 혼인잔치를 위해서 높은 자리에 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혼인잔치는 혼인잔치가 곧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돼요. 거기 모인 하객들, 심지어 신랑신부까지 혼인잔치를 위한 들러리가 되는 거예요. 혼인잔치에서는 기존의 자리,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를 내가 한 번 가져볼까, 라는 의도조차 저지시키고 무산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혼인잔치는 너무나 놀라운 영광이기 때문에 본인이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구경할 수가 없고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의 자기 가치나 자기영광, 이런 것은 다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 새로운 공간이 혼인잔치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모든 수완과 윤리도 도덕과 행위나 규범 같은 것은 혼인잔치에 들어오기 전에 다 찢어버려야 돼요. 전부 찢어야 합니다. 자기자존심이 더럽혀질까 벌벌 떨던 모습들, 노심초사 안절부절 하던 모습들, 혼인잔치에 딱 들어서는 순간, 쓸데없이 내 몸을 흔들었구나, 쓸데없이 걱정했구나, 그것이 눈에 확 들어오게 될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세상에서 통하는 모든 법칙, 원칙, 인간의인간의 혼인잔치가 아니거든요, 그런 것은 다 환상에 불과하며 꿈같이 다 잊어버릴 거예요. 내가 그냥 헛꿈 꾸었다. 천국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선하고 진리라고 여긴 그것을 끌어 모았는데 그것은 천국과 공통점이 뭔가는 있는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것과 공통점이 없어요.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는 ‘청함’을 받아야 되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서 천국을 생각하는 그 천국은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렇게 보는 우리 자신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내가 갈 곳이 천국이라고 2차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1차적으로 나 자신을 가치 있게 보고 그 다음에 이 고귀한 내가 갈 곳은 천국이라고 2차적으로 천국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 순서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이것은 순서자체가 인간들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과정이에요.
이런 사다리는 철폐되어야 돼요. 지난시간에 사다리 이야기를 했는데 다 잊어버렸지요. 한 주간만 지나면 다 잊으시기 때문에 설교하기 참 좋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언제 죄의식을 느끼느냐하면 자기신세가 말이 아닐 때, 어떤 부러움을 느낄 때 죄의식도 느끼죠. 그런데 성경말씀 보고 죄의식을 느낍니까? 주님 말씀 듣는다고 주여, 죄인입니다, 라고 되는 겁니까? 사람이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주의 말씀에 좀 꺼릴게 있는데 갑자기 집에 물이 샐 때 ‘아, 주의 말씀이…….’ 그렇게 되지요. 주의 말씀 들을 때는 아무 문제없는데, 설교 시간에 졸기만 하고 하나도 안 듣고 가다가 속도위반에 걸렸을 때, 자기 몸에 문제가 있고 자기 몸이 뭔가는 껄끄럽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닐 때, 하루하루가 괴로울 때 사람은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행복만 느끼면 뭐도 날아가겠어요? 행복만 느끼면 그것을 속죄로 보고 죄의식도 같이 없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마귀적인 방법입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죄의식 주는 방법이에요. 이게 마귀가 세운 종교라는 겁니다. 요새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인간에게 죄의식이 있든 없든 간에 하나님에게 죄라는 것은 말씀보고 우리가 회개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말씀 그 자체를 통해서 죄를 규정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한테는 일체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혼자서 처리해버립니다. 말씀 줘놓고 ‘이래서 너는 죄인이야.’ 사람들은 거기에서 죄를 느끼지도 않아요. 자기 몸이 편하면 죄의식이 안 느껴져요. 만사가 형통한데 뭐가 죄입니까? 하는 일마다 잘되는데요. 남들 주식 값 폭락할 때 혼자 올라서 돈 벌 때 무슨 죄의식을 느낍니까? 자기가 산 주식 값이 떨어질 때는 죄의식을 느끼죠.
‘주여,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제가 회개 할 테니 다시 보상해주세요.’ 라고 나오지요. 그런 과점에서 인간의 죄의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죄와 아무 관계없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죄의식과 죄를 예수님께 집어넣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 인간의 느낌과 감정 평소 생활태도와 관계없이 천국에 못가는 사람으로 이미 결정나버렸어요.
십자가가, 인간의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인간의 본성은 십자가가 거부해버립니다. 그러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에 보면 신부를 부를 때 누가 부르냐, 성령이 불러요. 21장 9절에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라고 나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에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이것은 신부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보고 회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을 보고 회개하는 것은 혹시 재수 없는 일이 나에게 생길까 싶어서 사전에 방어조치를 내리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지요. 벌을 먼저 받아버리면 마음껏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방불명이 된 친구를 죽였다는 혐의로 살인죄 판결 받아서 한 10년간 형을 살았어요. 10년형을 살고 보니 그 친구는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그럴 때 그 친구를 죽여 버리면 살인죄가 해당되어서 벌을 또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친구 죽인 죄를 받았는데 그 죄가 또 성립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10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이제 죽어라.’ 하는 것.
예수의 피로 죄용서 받았으니까 이제 맘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바로 ‘죄용서 받았기에 막살아도 되느냐?’ 그 문제입니다. 기존의 세상, 기존의 공간에서는 벌을 받았기에 죄지어도 괜찮다고 되어버려요. 그런데 새로운 혼인잔치의 공간에서는 내가 막사냐, 안사냐, 죄짓느냐 안 짓느냐, 거기서 죄를 내 힘으로 지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성령 안에서.
들어도, 또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새로운 신부가 되는 혼인잔치 안에서는 모든 주관이 성령주관이기 막사나 막 안사나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니까요. 막사냐, 안사냐 하는 그것을 문제시 하는 인간들이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이에요.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라고 묻는 그 사람들이 성령 안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믿을 수 없는 예수를 믿게 하셨고 깨달을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하셨고 행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하’신 거예요. 누구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왜 그런가 하고 이유를 물으면 그것은 기존의 이 세상에서 살았던 내가 생각했던 천국과 지옥은 말짱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이야기한 것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그것은 자꾸 나에게 환상과 희망의 소설을 쓰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저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20년 동안 구원받았다가 탈락하면 지옥 갑니까?’ 맨 날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천국 가고 안 가고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이 땅에서 배운 것이 뭐냐,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가 결정한다는 식으로 목사들에게, 혹은 신학교에서 배운 거예요.
혼인잔치를 그렇게 모독하면 안돼요. 낮은 자리에 가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오게 되면,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인간자체가 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9장에 보면 이 세상, 이 큰 성 바벨론은 보석으로 자기를 꾸며요. 자기 안의 더러운 해골 같은, 이 썩어서 냄새나는 거짓된 것은 그대로 있으면서 밖을 보석으로 꾸미고 또 꾸미고 계속 꾸미는 식으로 뭔가 괜찮은 존재로 가치를 높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 세상, 큰 성 바벨론에서 배운 것이 기껏해야 그것이 전부에요. 그래서 높은 자리에 가려고.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면 성도가 곧 보석이고 신부가 곧 보석이에요. 보석되게 하는 것, 신부되게 하는 것, 신랑을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혼인잔치를 구성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성령님이 홀로 하시는 몫입니다. 예수님의 명을 받아서,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성령께서 홀로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효과를 드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8절에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고 했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나.’ 교회 나오는 것, 안 나오는 것, 봉사하는 것, 이것은 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이것 하는 것과 천국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것과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오직 구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거예요. 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령이 아니면 이 현실이 현실대로 받아들여지지를 않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살면서 고민과 걱정이 많은데 그것이 천국 못 가게 하는 문제라면 그것은 문제지만 천국과 무관한 문제는 사실은 문젯거리가 안 되고 천국과 상관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내가 문제고 내가 말썽거리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힘들게 해요. 성령이 하는 혼인잔치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평소에 자기를 너무 고귀하게 생각했어요.
자기를 너무 높였어. 처음부터 자기를 너무 높게 봤어요. 값을 너무 높게 쳐준 거예요. 자기한테 자기가 너무 인기가 높아요. 맨 날 ‘나는 ~다.’ 노래방에서 노래 한곡만 불러도 나는 가수가 되어버려요. 나는 목사다, 맨 날 앞에 ‘나’가 붙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보석이 아닌 인간들은 아예 사람취급을 안 합니다. 혼인잔치의 신부의 그 자태가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는 사람취급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는 아예 흉물스럽게 만들어요. 사람을 그토록 무시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개까지 와서 무시합니다. 개가 와서 핥을 정도로 그렇게 거지 나사로가 무시당해요. 그게 바로 주께서 준비해놓은 높은 자리고 주께서 이 세상에 보여준 낮은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사람 힘으로 그 낮은 자리를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성질대로 사세요, 막 사세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거지가 될 수 없어요. 우리 힘으로 우리 앞집에 사는 부자가 흥청망청하는 것을 안 부러워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어있지 안 부러워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거지 나사로에게는 새로운 공간이 덮친 거예요. 지금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가 중요하겠지요.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서 이단입니다. 이단이라는 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 안돼요. 이단과 이단 아닌 경우를 이야기해요. 하나님에게 이단 아닌 경우는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방법은 ‘너는 이단이다. 예수님만 이단 아니다. 이단인 자가 예수님 공로로 어떻게 이단 아닌 자로 변하는지를 네가 알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된다.’ 그것을 초점으로 하는 겁니다.
그 초점이 뭐냐, 우리는 스스로 뭔가 불행해져야 내가 죄지었다는 의식을 갖는데 주님께서는 불행이나 행복과 관계없이 말씀이 내려왔다는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죄인으로 규정되고 말았어요. 어떤 인간도 그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말씀에 의해서 죄인 되었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이단을 위해서 이단 아니신 예수님께서 대신 피를 흘리심으로서 그 중에서 이단인자를 이단 아니게 만드는, 백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혼자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그 죄씻는 작업을 혼자 관통하시는데 그 관통을 하시면서 주변에 퍼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하고 그 다음에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것을 이야기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썩어야 될 자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아무리 ‘우리 집은 너무 행복해.’라고 해도 지금 썩어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해서 밥이 쉬면 쉰내가 나잖아요. 지금 쉰내가 펄펄 나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행복하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냄새를 맡아보면 쉰내가 펄펄 나요.
그 다음에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되어 있지요. ‘네 행세하는 것을 보니 모욕을 당해도 마땅해.’라는 식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람 아닙니까?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느냐, 모욕당해도 마땅한 욕된 것으로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문제 되게 간단하지요. 우리는 죽을 것으로 살고, 썩을 것으로 살고, 모욕당해 마땅한 것으로 살고, 그 다음에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하다 하는 것은 병드는 것, 그 다음에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계속해서 45절 이하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이것이 어떻게 우리가 교회 출석한다고 해서 성사시킬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은 예수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혼인잔치라 하는 것은 ‘너는 처음부터 욕되고, 썩었고, 육에 속했고, 땅에 속했고 죽은 인간이었잖아.’라는 것을 지적받는 가운데서 혼인잔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가 혹시 혼인잔치?’ 하고 척 문 열고 들어가면 ‘욕된 것이 들어왔구나, 죽은 놈이 들어왔구나, 이 썩어질 놈아!’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썩을 놈’이라는 것이 전라도 판소리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주님께서 일상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하는 소리에요. 우리는 행복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여기고 불행하면 ‘죄지은 것 없나.’ 하고 약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이 엉뚱한 혼인잔치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려는 우리의 썩어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순간입니다.
남 높은 자리 올라갔다고 시기하면서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끄집어 내리는 것, 그게 높은 자리라고 착각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그 성질들이 다 썩어질 것이에요. 이게 평생 우리 마음속에서 지워지겠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에요. 거지 나사로가 누워있던 문간의 그 집 부자가 나사로 보고 얼마나 측은했겠습니까? ‘인간아! 나 같으면 자살했다. 난 너같이 그렇게 안 산다.’
제가 가락교회 강의하면서 이 대목을 이야기했어요. 요한계시록에서 막이 두 개가 있는데, 연극무대 막이 두 개가 있다고 한다면 앞의 막은 첫 번째 도배지라고 했어요. 두 번째 막은 두 번째 도배지에요. 일곱 천사가 달려들어서 첫 번째 도배지를 뜯어내 버립니다. 갑자기 무대의 막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거지요.
그 막에 뭐가 쓰여 있느냐 하면, 이명박은 대통령, 이 건희는 삼성재벌, 아무개는 축구황제, 아무개는 컴퓨터 업계거물, 우리가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모든 화려함, 아이돌스타, 최고라는 것, 성공했다는 것, 출세했다는 것이 가득 쓰인 그 막, 그 도배지를 천사들이 뜯어내 버립니다. 뜯어내니까 그 뒤편에는 어린양의 피로 천국에 들어가는 14,4000의 도배지가 나오지요.
그 숨어있는 것을 가지고 계시, 묵시라고 합니다. 역사가 묵시를 가리고 있으니까 천사가 재앙으로 그 역사를 뜯어내는 작업을 실시하는 그 책이 요한계시록이에요. 뜯는 작업, 그 때 거지 나사로는 뭘 봤느냐, 바로 뒤쪽에 있는 아브라함언약을 본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으로 설치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것, 죄가 없다는 그것,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두 번째 도배지를 본 거예요.
그리고 자기 자신의 역할은 뭐냐, 이 땅에서 낮은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를 모델로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두 번째 도배지를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역할로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숨어 있는 혼인잔치를 위해서 이 땅에서 진정 낮은 자라는 것이 자기가 욕되고 썩어지고 죽어지고 흙에 속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그것이 진정 낮은 자의 모습인거예요. 그러한 역할을 맡은 겁니다.
그냥 역할을 맡았을 뿐인 자가 자기 자신에게 실적이 어떠니, 혹은 자기역할이 맘에 드니 안 드니, 이런 말썽을 스스로 부리지 마세요. 우리의 것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가 자아가 되는데, 하나님의 그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데 왜 자꾸 복음을 우리가 저지합니까? 내속이 내 것으로 남아 있으면 안돼요. 내 것은 뜯겨져 나가야 돼요.
내 도배지, 나를 아름답게 하는 도배지, 나를 크게 만드는 도배지를 뜯어내 버리고 주님의 도배지, 알록달록 말씀의 도배지가 여기에 새겨져야 되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말씀,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 우리가 보석이라는 사실, 성령이 있으니까, 그 역할 그 배역을 맡은 겁니다. 그 안쪽의 도배지를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살아가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TV드라마에서 기업중역회의장면이 나왔어요. 회사중역들이 죽 앉아있는데 다 배우들이에요. 배우들이 중역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안 우습습니까? 이 대목에서 웃어야 되는데. 당연하지요. 드라마기 때문에 배우들이 하는 거예요. 진짜 중역들은 한 사람도 없어요. 연기를 못하기 때문에 안넣어주는 거예요.
배우들이 상무이사, 전무이사 다 하고 있어요. 바로 그것이 역할입니다. 지금 천국에서 영사기 가지고 예수님의 필름을 돌려보니까 그 필름이 우리한테 되비쳐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중역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24장로의 역할, 그리고 면류관을 반납하는 하늘나라 14만4천의 역할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낮춘다는 것은 양반 코미디 하듯이 낮추는 그것이 낮춤이 아니고 ‘우리는 이 땅에서 남들 보기에는 무시 안당해도 되는데, 인간 대 인간의 비교에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무시당할 만한 신부가 아닌데, 주님 신랑 앞에서 우리는 모멸당해도 괜찮고, 썩어질 존재고,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흙에 속했다.’ 하는 그 말씀에 해당되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할 수 없는 낮은 자의 자리입니다.
말씀이 곧 우리이고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낮은 자리에,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데 낮은 자리에 가게 만드시는 주님의 역할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빠질 수가 없어요. 더럽고 속되고 욕되고 한 그 자리를 우리가 애써 거부하거나 부정하면 안 됩니다. ‘난 옛날에는 못됐지만 지금은 예수 믿고 훌륭한 사람이다.’ 이러면 안돼요. 그러면 높은 자리가 돼버려요.
이 높은 자리는 예수님 한분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철저하게 낮은 자, 라는 것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 거지가 되어도 감사하고 거지가 안 되어도 감사하고, 모욕 받아도 감사한 자리,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주님이 이미 다 아시고 다 처리했기에 빼도 박도 못하게 욕된 자리에서 영광된 자리로 합류해야 될 영광스러운 나의 신부라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직접 집어넣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