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라시대 중앙정부가 일종의 볼모를 이용해 지방세력을 통제하던 방식.
고려시대 기인제도(其人制度)의 전신이다. 상수리제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조에만 전하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나라 제도에 해마다 바깥 주(州)에 있는 관리 한사람을 서울의 여러 관청에 올려보내 일하게 하였다.[주: 지금의 기인(其人)이다]
기인(其人)제도란 고려∼조선 중기에 지방의 향리(鄕吏) 혹은 향리의 자제(子弟)를 도읍에 머물게 하며 볼모로 삼아 지방을 통제했던 제도이다. 이에 학계에서는 위의 기사 가운데 "바깥 주[外州]의 관리[吏]를 서울로 올려보내 일하게 한다[上守]"는 대목에 주목하여 신라시대의 향리 볼모제도를 [상수리(上守吏)제도'라고 이름지었다.
신라가 언제부터 상수리제도를 실시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서기 392년에 내물(奈勿)마립간(麻立干)이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실성마립간은 402년과 412년에 내물마립간의 아들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각각 왜(倭)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늦어도 5세기에는 대립세력에 대한 견제책의 하나로서 볼모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기인제에 볼모의 성격이 있긴 하지만, 기인(其人)을 곧 볼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볼모와 기인제는 그것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기반 내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기인제=볼모제도'와 같은 단순화는 부당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