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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을 거름으로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주차장에 길쭉하게 반듯이 자른 노란 빛을 띈 종이 조각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몇 해 전, 송구영신 기도회 때 여러 색깔의 도화지를 잘라 저마다 소명성구를 적도록 한 기억이 떠올랐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징검돌처럼 계속 떨어진 종이 조각을 보면서 문득 북한에서 남하(南下)한 오물 풍선 속 내용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깨끗한 하나를 주어 먼지를 털어낸 뒤 성경 갈피에 넣어 두었다.
그날은 6.25 다음 날이었다. 전날 강화 동검도를 다녀오면서 74년이나 된 한국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강화를 방문한 이유는 동검도 채플에서 강화지역에 있는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회 성직자들이 함께 ‘그리스도교 평화기도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물론 128곳에 이르는 감리교회 목회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그곳에서 귀한 존재였다. 스테인드글라스 전시장을 갖춘 채플은 갤러리를 겸하였는데, 사방으로 무려 1천만 평의 너른 갯벌을 정원으로 두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얼마 전에는 동검도 반대편 건평항 인근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강화지역 전쟁의 상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화도에 있는 마을마다 전쟁의 양상이 오락가락하면서 비슷비슷하게 복수와 복수가 이어졌다는 사례들이었다. 주목할 것은 참극은 전쟁 이전에 이미 싹튼 갈등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전쟁이란 비정상적 현실이 사람 사이를 파괴하지만, 전쟁 이전 이미 찢어진 관계가 폭발적인 혐오와 복수심을 가져온 것이었다.
강화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74년 전의 비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을로 간 전쟁>(박찬승)은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 마을 등 다섯 곳의 마을들을 심층 취재하여 전쟁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누구나 잊고 지낸 참극이었는데, 케케묵은 시렁에서 내려놓음으로써 화해를 시도한 셈이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었다. 7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국가폭력의 실체가 밝혀지고, 조금씩 국가배상을 추진하고 있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마을까지 들어와 내부의 적들을 소탕하기에 이른 결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최태육)도 같은 문제의식의 눈높이에 있다. 저자는 강화 교동지역에서 목회하면서 전쟁의 씻을 수 없는 후과(後果)에 눈을 떴다. 이미 과거의 일로 치부하지만 상처는 마을을 쪼개고, 교회를 쪼개고, 사람들의 마음을 쪼갰다. 비록 지나간 전쟁에 대해 겉으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면에는 증오의 저류가 흘렀다. 바로 전쟁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역사학자 김성칠은 <역사 앞에서>란 일기를 써서 6.25의 생생한 증인이 되었다. 그는 ‘폭격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의 눈’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존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절실히 느껴지는 점은 난리가 났을 때 교묘히 숨느니보다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또 세상에서 아무와도 원수를 맺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경우라도 살아남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김성칠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서로를 돌보는 화해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민족화해주간(6.23-29) 마지막 날인 어제 임진강 변 생태탐방로를 방문하였다. 우리 지역에서 평소 사회적 참여 활동으로 알고 지내던 40여 명이 동행한 일정이었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출발하여 율곡습지공원까지 민간인 통제선을 따라 걸었다. 두 명의 군인이 동행하며 통문을 열어주고, 또 닫았다. 임진강 변 철책은 뙤약볕 아래 개망초, 붉은토끼풀, 애기똥풀, 금계국, 지느러미 엉컹퀴로 아름다웠다. 키보다 한참 웃자란 칡꽃은 철조망을 너머로 보라색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해설사는 한동안 근심없이 살던 민통선 접경지역 마을들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오물 풍선은 그 위기감의 상징이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진행자가 참석자를 소개하던 중, 나더러 ‘한 말씀’을 요청하였다. 나는 앞서 언급한 오물 풍선 속 노란 빛 종이 조각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종이 조각에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성구를 적어 성경 책갈피에 보관하면서 두고두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간밤, 이맘때면 늘 가뭄에 시달리는 북한으로 장마전선이 빠르게 북상(北上)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