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부대 국내 진공작전
포로 석방-위치 탄로, 연승가도서 내리막길로
함북 경흥서 일본군 사살·진지 점령
회령 운성산·배상봉서도 연전연승
영산전투서 참패당하고 얀치혜 귀환
연해주 의병세력 점차 약화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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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의병들의 국내
진공작전. |
의병들은 최재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가 40여 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4명뿐이었다.
특히 1908년 6월
안중근 의병부대는 첫 번째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안중근과 엄인섭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건넌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안중근 부대는 일단 두만강을 건너 크라스키노로 귀환했다.
1908년 7월 7일,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회와
이범윤이 이끄는 창의회의 동지 300여 명이 포병사령관 정병무, 우영장 안중근, 좌영장 엄인섭 등의 지휘하에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의 홍의동을
공격했다. 이때 경흥군 수비대 병사 2명과 헌병 1명을 사살했다. 또한, 1908년 7월 9일 의병 200여 명은 두만강을 건너 7월 10일
새벽, 경흥·회령 근처 운성산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러시아 문서에는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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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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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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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에 회령시로부터 25베르스타(26.6㎞) 떨어진 운성산 지역에서 매복에 걸린 일본군 중대는 엄청난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투는
아침에 시작돼 종일 계속됐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회령시로부터 구출부대가 접근했고, 반란군을 격퇴했습니다. 일본인의 사망은 64명,
부상자는 30명이었습니다. 반란군은 겨우 4명만이 부상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는 그 파의 지휘자인 오내범도 포함됐는데 그들 가운데 사망자는
없습니다. 접근한 일본 군대가 무기와 부상자들을 거두어 가서 어둠을 틈타 몰래 회령시로 물러났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무기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반란군은 총수가 160명이나 되기 때문에 그들을 추적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두 번째 충돌은 부령읍 인근의 배상봉에서
발생했습니다. 한인 불교 승려로서 배교한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점심 식사를 하던 부대가 약 100명이었는데 그중에는 30명의 호랑이 사냥꾼과
뛰어난 사격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 부대를 급습했는데 일본군의 첫 발포 이후에도 반란군은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고, 반란군은 즉각
반격을 시작해 일본인들을 좁은 분지로 몰아넣고 거의 몰살시켰습니다. 그들은 오직 1명의 부상자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9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는데 부상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모든 무기는 반란군 차지가 됐습니다.”
위의 러시아 보고서를 보면 호랑이
부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홍범도 부대를 이르는 것이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연해주 의병은 1908년 7월 19일 회령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바로 전 전투에서 안중근은 다수의 일본군과 일본인 상인을 생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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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일대 의병들이 국내
진공작전 당시 넘나들었던 한·러 국경지역. 필자 제공 |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해 사로잡은 적병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 아래 부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들을 석방하기로 했다. 이에
의병들은 식량도 부족하고 게릴라 전투를 해야 하는데 포로들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다며 살려주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해 포로들을 석방했고 석방된 포로들에 의해 의병부대의 위치가 탄로 나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게 됐다.
안중근은 여러 날 동안 풍찬노숙하면서 간신히 크라스키노로 귀환했다. 이때 안중근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피골이 상접해 의병들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엄인섭은 안중근 부대를 떠나 8월 4일 부대원 20~3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서수라의 일인 어장
대성조를 습격해 일본인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했으나 연해주 의병은 영산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점차 그 세가 꺾이고 말았다.
최재형과 이범윤은 간도와 훈춘,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얀치혜 지역으로 이동한 세력은 호도세(노우키스코 서방 2리)에
20여 명, 주라미(얀치혜 동남방 23리)에 50여 명, 나부란(소도살장)에 100여 명, 일부는 러시아 안방비(얀치혜 동남방 23리 반)에 약
150여 명으로 총 320여 명이었다.
이범윤은 국내 진공작전 이후 자금이 없어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이범윤을 제거하려고 암살범을 파견하며 1만 루블의 현상금까지 내걸어 이범윤의 활동을 막았다. 이범윤은 블라디보스토크·얀치혜 등지에 은둔해야 했고
의병세력은 극히 약화됐다.
참고서적: 박환의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