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침탈당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과 위훈을 기념하고자 1939.11.21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조약(1905)이 늑결(勒結)된 날인 11월 17일을 전후하여 많은 분들이 순국하였으므로 이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광복 후 광복회등 민간단체가 주관하여 추모행사를 거행하여 왔으나 1997. 5. 9 정부기념일로 제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 1905년 11월 29일, 을사조약 후 서울거리를 활보하는 이토 히로부미(뒷자리 왼쪽에 앉은 이)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그 오른쪽)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미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목적이었다. 이토는 11월 10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회유와 협박으로 고종을 압박했지만 완강히 거부당했다. 11월 17일 일본공사 하야시도 한국 정부의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승인을 종용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는 고종이 머무는 덕수궁 별채 중명전에서 어전회의를 열고 결단을 촉구했다. 남산에는 대포가 설치돼 서울을 겨누고 있었고, 궁 밖은 무장한 일본병이 포위하고 있어 공포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자 하야시는 이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토는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들어와 대신들 각각에 찬부를 물었다.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이 반대하고, 이완용·박제순·이근택·이지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5적’이 찬성으로 기울자 이토는 다수결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로 하여금 ‘한·일협상조약’에 날인케 했다. 그러나 조약은 최고통수권자인 고종의 날인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였다./조선
[1917년] 조각가 로댕 사망
←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 의 가운데 팀파눔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 1917년 11월 17일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로댕은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 시기부터 생활을 위한 건축 장식업에 종사하면서 유럽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러한 여행들은 훗날 로댕의 그 후 예술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 체재 중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했는데, 이것은 작품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으로 인해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그 뒤 그의 예술은 더욱 발전해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 등 걸작들을 낳았다. ‘지옥의 문’은 거의 40년 동안 만들었던 조각 작품이었으나 결국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완성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단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키스’ ‘세 망령’ 등 거의 이백 개에 가까운 조각상들이 합쳐져 있는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다./조선
[1734년] 젱어, 명예훼손죄로 구속 1734년 11월 17일 <뉴욕 위클리 저널 New York Weekly Journal>의 발행인 존 피터 젱어가 명예훼손죄로 구속되었다. 1697년 독일에서 태어나 13세에 뉴욕 시로 이민 온 젱어는 중앙 식민지 지역의 개척 인쇄업자 밑에서 8년 동안 견습생활을 한 후 1726년 인쇄소를 시작했다. 1733년 11월 5일 젱어는 당시 식민지 총독 윌리엄 코즈비의 정책을 반대하던 주민들 모임의 정치적 기관지 <뉴욕 위클리 저널>을 창간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학식이 뛰어난 동료들이 썼고 젱어는 법적인 발행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코즈비를 통렬히 공격하던 <뉴욕 위클리 저널>의 발행인으로서 젱어는 1734년 명예훼손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러나 젱어는 1735년 최종 공판에서 무죄 석방되어 북아메리카가 영국 식민지에서 거둔 언론 자유를 위한 첫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변호를 맡은 앤드루 해밀턴은 기사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판결 권한은 배심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식민지 배심원들은 젱어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점은 이후 명예훼손 소송사건에서 핵심적인 고려 대상이 되었다. 젱어는 그후 뉴욕과 뉴저지 2곳에서 공공 인쇄업자로 일했다./브리태니커
[1911년] 아동문학가 이원수(李元壽) 출생
1911년 11월 17일 태어남 / 1981년 1월 24일 죽음
"한 편의 시(詩)가 예술작품(藝術作品)일진대, 구태여 어떤 연령의 독자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크게 보아서 시(詩)는 만인(萬人)의 것이어야 한다." - 이원수
이원수는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인 동시와 동요 <고향의 봄>의 노랫말을 쓴 시인이다. 1927년 마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윤석중 등과 ‘기쁨사’ 동인이 되었다. 1930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안금융조합에 다니던 중 1935년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 방정환이 펴낸 <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고향의 봄>은 낭만적인 향토애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뒤에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 1940년대에는 현실에 저항하는 동시 <어머니>(1943) · <빨래>(1946) 등을 썼다. 1953년에 발표한 장편동화 <숲속의 나라>는 전래동화를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시집으로 <종달새>(1947) · <빨간 열매>(1964), 동화집으로 <어린이 나라>(1949) · <숲속 나라>(1953) · <파란 구슬>(1960) · <보리가 패면>(1966) 등이 있다. 고마우신 선생님상,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마산시 산호공원에 노래비가,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세워졌다./브리태니커
[1979년] 시인 주요한(朱耀翰) 사망
〈불놀이〉를 지어 한국근대시 형성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본관은 능성(綾城). 필명은 벌꽃·주락양(朱落陽). 호는 송아(頌兒).
생애와 활동 목사인 아버지 공삼(孔三)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설가 주요섭은 그의 아우이다.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선교목사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등부를 졸업했다. 중학시절에 회람잡지 〈사케비〉를 펴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도쿄 제1고등학교[東京第一高等學校]에 다니면서 1919년 2월 김동인·전영택 등과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펴냈고, 그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1925년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했다. 1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아보았다. 192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기자로 입사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사건 때 잠시 투옥된 적도 있었다.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조선일보사 편집국장 및 전무를 역임하고, 1935년부터 실업계에 입문하여 화신상회 이사로 근무했다. 8·15해방이 되자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민주당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60년 재선되었으며 부흥부장관 및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1965~73년 대한일보사 회장, 1968년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안장되어 있다.
문학세계 그가 우리말로 쓴 최초의 작품은 1917년 〈청춘〉 11월호에 발표한 단편 〈마을집〉이다. 이 소설은 한 유학생이 조선현실을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고 일본에서 귀향했다가 현실의 완강한 힘에 좌절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도망치듯 돌아간다는 이야기로서, 그가 지니고 있던 근대관과 개혁사상의 허와 실을 잘 보여준다. 이어 〈시내〉·〈봄〉·〈눈〉·〈이야기〉·〈기억〉 등 5편의 시를 '에튜으트'라는 제목으로 〈학우〉에 발표했으며, 1921년 〈창조〉 창간호에 시 〈불놀이〉를 발표하면서 시창작에 전념했다. 〈불놀이〉는 최근까지도 한국 최초의 근대자유시라고 알려져왔으나 그보다 앞서 김억과 황석우의 자유시 형식실험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역사적 의의는 다소 달라졌다. 그러나 근대자유시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작품임에는 변함이 없다. 사월초파일에 여는 전통적인 관등놀이를 소재로 종래 한국 시가의 율격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산문조의 유장한 호흡을 시도했는데, 이는 서구 신낭만주의와 상징주의적 표현기교에 영향받은 듯하다. 그의 문학세계를 형성했던 큰 축은 당시 일본에 활발히 소개되고 있던 프랑스의 신낭만주의나 이미지즘 시이다. 따라서 시에 대해 비교적 유미주의적 입장을 지녔으며 현실반영에 힘을 쏟는 '민중시'나 사회주의 계열의 시를 배척하는 태도를 지녔다. 그런가 하면 그의 사상형성에 바탕이 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우리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민요의 율격을 현대시를 통해 되살리려는 새로운 시도를 펴기도 했다. 그의 시들은 대체로 밝고 건강한 서정을 드러내며 섬세한 우리말을 시어로 즐겨 사용했다. 시집으로 〈아름다운 새벽〉(1924)·〈3인시가집〉(이광수·김동환 공저, 1929)·〈봉사꽃〉(1930) 등이 있고, 그밖에 소설집으로 〈사막의 꽃〉(1935), 산문집으로 〈철학하는 삶을 위하여〉(1986)·〈안도산전서〉(1963) 등을 펴냈다. 197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80]년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사망
1907. 7. 17 함남 원산~1980. 11. 17 경기 파주.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교회 전도사인 어머니 김자선을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음악과 접했다. 1927년 일본 도쿄[東京] 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인 광명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내합창단을 조직했으며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 홍난파의 주선으로 경성보육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1936년 홍난파와 같이 경성방송국 소속 방송관현악단을 창단했다. 또한 피아노 3중주단을 만들어 실내악운동도 벌였다. 배재중학교, 풍문여자중·고등학교,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으며 서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또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회 회장,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34년 〈이흥렬작곡집〉을 출간했고, 〈음악의 종합연구〉(1958)·〈가서나 살고 싶은 곳〉(1971)·〈음악감상론〉(1976)을 출간했다. 유명한 작품으로 〈내고향〉(1926)·〈봄이 오면〉·〈바위고개〉·〈코스모스를 노래함〉·〈고향 그리워〉 등이 있다.
[1980년] 중국 공산당, 공자 복권 발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에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켜, 계속 혁명을 추진한다"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궈모뤄(郭沫若)와 린뱌오(林彪) 등 주요 인물이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공자를 숭배하는 과오를 저질렀다고 숙청되었다.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 무제한적으로 정신문화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중국 대륙을 몰고 갔다. 한편으로 공동경작 경제정책인 인민공사를 추진해 능률이 땅에 떨어지고 10억 인구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마오쩌둥(毛澤東)은 4인방을 숙청하고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을 기용해 당의 중심 역할을 맡겨 가까스로 난국을 해소해 나아갔다. 이 때 중국은 다시 공자를 인정하게 되는데, 문화대혁명 기간에 철저히 모든 것을 파괴해 공자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의식마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은 한국의 성균관에 사람을 보내 공자 사당의 제사 지내는 의식을 배워 갔다. /yahoo
[1972년] 페론 前아르헨티나 대통령, 망명 17년 만에 환국 1964년 브라질 군사정권의 출현과 그들이 거둔 경제적 성공은 전통적으로 브라질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르헨티나 軍部를 자극했다. 1966년 집권한 軍部는 개발독재를 표명하고 나섰지만, 비전 있는 지도자의 不在, 산업기반의 취약, 그리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먼저 요구하는 페론주의자들의 발호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한편 1960년대를 거치면서 「페론주의」마저도 舊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과격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게릴라 집단 「몬테네로스」는 前 대통령 에우헤니오 아람부루를 납치, 살해했다. 쿠바의 카스트로를 모방하여 軍·警 부대들을 습격하는 게릴라들이 속출했다. 더 이상 국가통합의 자신을 잃게 된 軍部 정권은 1972년 11월 페론(Perón, Juan Domingo, 1895~1974) 前 대통령의 귀국을 허용했다. 78세의 페론이 귀국하던 날 5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페론은 이듬해 9월 대통령 선거에서 62%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권좌에 복귀했다. 그가 스페인 망명 기간 중 얻은 後妻(후처)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이 되었다. 페론의 권좌 복귀는 국가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집권 기간 중에도 左翼 게릴라들의 준동과 그에 맞선 右翼 테러는 계속되었다. 1974년 7월1일 페론이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은 단지 「페론」이라는 남편의 姓을 가진 한 여성에 불과했다. 그녀를 페론주의의 「상징」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부패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모순들을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기력했다. 일찍이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멍들게 했던 페론은 무능한 아내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또 한번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던 셈이다. 좌익 게릴라들의 도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위기를 軍部는 「병든 사회」의 징후로 해석했다. 軍部는 病理의 근원을 1945년 혹은 1930년까지 추적하여, 아르헨티나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병균과 대항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는 진단을 내렸다(마셀로 카바로치). 1976년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이끄는 軍部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정권을 전복시켰다. /Google
[1970년] 미국에서 컴퓨터 마우스 특허 취득
← 지난 1963년 더글라스 앵겔바트가 만든 최초의 마우스는 나무에 톱니바퀴로 좌표를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특허번호 US3541541. 1970년 11월 17일 미국 스탠퍼드연구소(SRI)는 더글러스 엥겔바트 연구원이 발명한 ‘디스플레이 시스템용 X-Y 위치 표시기’의 특허를 취득했다. 이 ‘표시기’의 첫 발명은 이보다 7년 앞서 1963년 이미 이루어졌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연구하던 엥겔바트 씨는 나무상자에 작은 바퀴 2개를 집어넣어 각각 위아래와 좌우방향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했다. 상자 윗면에는 소형버튼을 달아 모니터에 표시를 하거나 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엥겔바트 씨는 컴퓨터 이용자가 한 손에 이 기계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키보드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IBM이 ‘개인용 컴퓨터(PC)’를 출시했을 때가 18년 뒤인 1981년이니 그의 예지는 놀랍기만 하다. 엥겔바트 연구팀은 이 기계를 ‘버그(bug)’라고 불렀다가 훗날 본체와 기계를 연결하는 선이 꼬리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마우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마우스는 연구실에서 시제품으로 운명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984년 마우스를 보조 입력 장치로 사용한 애플사의 매킨토시 PC가 출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도스(DOS) 운영체제의 막을 내리고 1995년 ‘윈도95’ 시대를 열면서 마우스는 필수품이 됐다. 특히 1991년 월드와이드웹(www)의 탄생 이후 인터넷이 널리 사용되면서 마우스는 핵심 주변기기로 등극했다. 그러나 정작 ‘마우스의 아버지’는 한 푼의 특허권 사용료도 받지 못했다. 마우스 특허는 1987년 기간이 만료됐는데, PC와 마우스 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전인 데다 이후에 개발된 마우스들이 ‘오리지널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엥겔바트 씨는 한 인터뷰에서 “마우스 특허가 쓸모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특허를 얻은 몇 년 뒤 연구소가 애플사에 약 4만 달러를 받고 사용허가를 내줬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우스 발명 외에 한 번의 클릭으로 다른 정보로 이동하는 ‘하이퍼텍스트’ 기술을 개발했고, 인터넷의 전신인 미 국방부 산하 국가방위네트워크 ‘아르파넷(ARPANET)’의 구축도 주도했다. 1925년생인 엥겔바트 씨는 1988년 딸과 함께 컨설팅 연구소 ‘부트스트랩’을 차렸다. 사무실은 마우스 제조업체로 잘 알려진 ‘로지텍’이 무상임대 형식으로 마련해 줬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책갈피 속의 오늘] /동아일보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루이 14세도 토목기술상의 문제로 단념하고, 나폴레옹도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를 10m로 너무 높게 측정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가 이토록 수에즈 운하에 집착한 이유는 막강 해운대국으로 대서양에서 누리는 영국의 절대적 우위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1854년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다시 운하 뚫기를 시도했다. ‘수에즈운하 만국회사’를 설립한 그는 주식을 프랑스와 이집트 왕 몫으로 나누고, 개통일로부터 99년간 운하를 독점 운영하는 계약을 이집트와 체결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돼 150만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수천명의 목숨이 희생된 끝에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이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영국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개통 6년 뒤였다. 사치로 빚에 시달리던 이집트 왕 이스마일 파샤가 1875년에 주식 전량을 영국에 팔아넘긴 것이다.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국유화를 선언, 운하는 이집트 소유가 됐다. /조선
[1558년]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Mary I, 1516~1558) 사망 메리 튜더라고도 한다. 헨리 8세와 제1왕비 캐서린의 딸이다. 부왕(父王)의 종교개혁 시대에는 불우하였으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열렬한 구교도로서, 즉위 이듬해에 구교의 나라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아버지와 동생의 종교개혁 사업을 부정하고 구교 부활에 주력하였으며 많은 신교도를 처형하였다. 그 때문에 후세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렸다. 대외적으로도 남편에게 협력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대륙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거점 칼레를 잃었다. /naver
[1503년] 이탈리아의 화가 브론치노(Bronzino, Agnolo, 1503~1572) 출생
△ Venus, Cupid, Folly, and Time
1503년 11월 17일 피렌체 근교의 몬티첼리에서 출생하였다. 라파엘로 델 가르보에게 배우고, 뒤에 폰토르모에게 사사하였다. 1523년 스승과 함께 발 데마수도원의 벽화제작에 종사하여 《피에타》와 《성(聖) 라우렌티우스의 순교》를 그리고, 30년 우르비노 후작을 섬기다가 1540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코시모 1세를 섬겨 궁정화가로서, 메디치가의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원숙기의 대표작 《아들 조바니와 함께 있는 톨레도의 예리아노르의 초상》은 정밀한 사실(寫實)이 지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데다가, 그의 주관에 따라 구성된 일종의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초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외 마니에리스모 대표작으로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 등이 있다. /naver
[1448년] 세종대왕, 동국정운 반포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조선 전기 세종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로서 활자본으로 6권 6책이다. 국보 제71호(간송문고본, 권1 ·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 완질)가 있다. 왕명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사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강희안(姜希顔)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曺變安) ·김증(金曾) 등 9명이 편찬에 착수하여 1447년(세종 29) 완성, 이듬해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산실되었으나,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이 발견되었고, 1972년 강원도 강릉에서 6권 6책의 전질이 발견되었다. 1443년 훈민정음(訓民正音) 완성 후, 한국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 명나라의 운서(韻書)인 《광운(廣韻)》 《집운(集韻)》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을 참고로 삼아 엮었다. 내용은 모두 91운(韻), 23자모(字母)로 되어 있으며, 글자마다 국어음을 먼저 표기한 다음 그 밑에 한자를 달았는데, 엄선한 이 23자모는 그대로 훈민정음의 초성체계와 일치한다. 조선 초기의 한자음과 훈민정음 연구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1973년 4월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전6권을 영인(影印), 간행한 바 있다. /naver
그밖에 2002년 조중훈 한진 회장 별세 2002년 반달가슴곰, 지리산에서 무인카메라에 잡힘, 20년 만에 첫 공식확인 2000년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2000년 국제 인터넷주소 관리기구(ICANN) 최상위 도메인 7개 추가 2000년 유엔군사령부-북한, 경의선 철도와 군사분계선 내 도로에서 발생하는 군사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처리하기로 합의 1998년 한국-홍콩, 형사사법공조협정 체결 1994년 한국-베네수엘라, 문화협정 체결 1994년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은퇴 1992년 새한국당 창당(대표 이종찬 의원) 1989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에 화가 황용엽씨 선정 1983년 버마, 북한 아웅산테러범 대역죄로 기소 1980년 이스라엘, 중국과 비밀 군장비 판매협정 체결 발표 1980년 KBS, 공영체제로 기구개편 발표 1978년 소련, 중성자탄 시험 성공 발표 1971년 태국 타놈수상 친위 쿠데타 1971년 국제노동기구(ILO), 자유중국 축출하고 중공 가입 가결 1969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 협상시작 1967년 유엔총회, 통한(統韓)결의안 가결 1965년 유엔총회, 중공가입안을 찬반동수(47:47)로 부결 1955년 군당국, 평화선 침범 일본어선에 대한 발포방침을 발표 1952년 유엔총회, 남아공화국 인종차별정책 비난 결의안 채택 1942년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지 출생 1933년 미국, 소련연방 승인 1932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순국 1902년 의학교장 지석영, 황성신문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 1887년 2차대전의 영웅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출생 1717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르롱 달랑베르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