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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전 역사 속으로의 시간여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옥산서원 및 양동마을
우리나라 전통고택마을로 안동 하회마을은 잘 알려져 있으나 경주 양동마을에 관하여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2010년 7월 31일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경주 양동마을이 새로운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히 경주는 2010년 11월부터 KTX가 연장 운행되면서 서울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이면 갈 수 있어 교통면에서도 당일관광이 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20km에 위치하고 있어 신경주역이나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쉽게 가볼 수 있는 멀지않은 거리이다(터미널에서 양동마을까지 약 30분).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또 경주시티투어코스로도 개발되어 있어 이를 이용하면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신라시대의 무열왕릉에서부터 조선시대 양동마을까지 역사 속으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시내버스의 경우에는 200,201-208, 212,217번 버스를 이용, 경주역에서 승차하여 양동마을 입구에서 하차한다. 15분 간격으로 40분 정도 소요되며, 마을입구에서 양동마을까지는 1.2km 걸어들어가야 한다. 경주터미널에서 승차하는 203번 버스의 경우에는 양동마을에서 하차하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첫차 06시 20분, 막차 20시 15분.
2022년 9월 28일, 독락당,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을 찾았다. 필자의 경우에는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직후인 2010년 12월에 이곳들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번에는 사진동호인들과 함께 먼저 독락당(獨樂堂)과 옥산서원(玉山書院)을 둘러본 후 양동마을을 돌아봤다. 독락당과 옥산서원이 위치한 옥산리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아름드리 회화나무 숲과 함께 궁궐같은 전통가옥들을 만난다. 이 마을이 조선시대의 대유학자(大儒學者)요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분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1491-1553)이 머물렀던 집과 서원이 있는 세심마을이다.
먼저 회재 선생이 살던 독락당을 찾았다. 독락당은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서 거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조선 중종 27년(1532)에 세웠으며, 일명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보물 제 413호로 지정돼 있다. 500년을 지켜 온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 옥산정사, 그리고 관어대(觀漁臺)가 있는 계곡으로 통하는 동선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져 있다.
옥산(玉山)은 신라 때부터 옥천(玉川)이라 부르던 곳을 여주 혹은 여강 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이 입거하면서 옥산(玉山)이라 개명하여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고 한다. 1532년 회재 선생이 고향에 와서 옥산정사(玉山精舍) 즉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다음해 계정(溪亭)을 지으면서 이곳을 계정마을, 계정동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행정구역상 경주시 안강읍 옥산1리이다.
이 마을은 회재 선생이 독락당에 기거하면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 주변의 산과 경치 좋은 곳을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 부른다. 사산(四山)은 마을을 둘러싼 산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화개산(동쪽), 자옥산(서쪽), 무학산(남쪽), 도덕산(북쪽)이라 불렀으며, 오대(五臺)는 옥계천(玉溪川) 주변의 경관이 수려한 곳에 붙인 이름으로 세심대(洗心臺), 관어대(觀漁臺), 탁영대(擢纓臺), 징심대(澄心臺), 영귀대(詠歸臺)를 뜻한다.
옥산 세심(洗心)마을의 명칭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도(道)의 근본인 마음 닦음을 자연에서 저절로 느끼고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산오대(四山五臺)중 하나인 세심대(洗心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곳은 특히 옥계천가에 지어진 정자인 '계정(溪亭)'이 관어대와 함께 아름답고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독락당의 별당으로 자계천 물가의 관어대라는 반석 위에 올라앉은 이 정자는 자연과의 조화가 절묘해서 ‘한국정자의 본보기’로 꼽힌다.
‘溪亭’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정자의 좌우에는 회재 선생이 심었다는 주엽나무(천연기념물 115호)가 있다.
또한 이 정자는 양진암(養眞庵) 이라고도 불리며 이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독락당을 둘러보고 독락당에서 약 700m 떨어진 옥산서원으로 향했다. 독락당에서 옥산서원으로 갈려면 회화나무 숲을 지나 자계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아래는 계곡물이 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외나무다리 건너에는 관어대 보다도 넓은 마당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세심대(洗心臺)라고 부르는 곳이다.
자계천 암벽과 마당바위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세심대 옆에 위치한 건물이 옥산서원이다. 독락당과 옥산서원 사이에는 도로정비가 잘 되어 있어 자동차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奉鄕)하고 있는 서원(書院)이다. 옥산서원은 사적 제154호로 우리나라 도학의 종장이신 회재 선생을 추모 봉사하고 선비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 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19년 후인 선조5년(1571년), 당시 경주부윤 이제민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이듬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1573년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또한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우리나라 47개 서원중의 한 곳이다.
이 서원은 출입구·강당·사당 등이 일직선상에 놓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르고,
무변루(無邊樓)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서로 마주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의 중정(中廷)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강당 뒤편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편액(篇額)은 당대의 명필가(名筆家)인 아계(鵝溪) 이산해, 석봉(石峯) 한호, 추사(秋史) 김정희, 퇴계(退溪) 이황 선생 등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서재인 청분각(淸芬閣)은 총 866종의 4,111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해동명적(海東名蹟) 등은 보물(寶物)로 지정되어 있고, 그 밖에도 회재(晦齋) 선생의 저서, 친필, 역대(歷代) 명인(名人)들이 남긴 유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1491년 경주 양동의 송첨고택에서 태어나 24세에 문과 급제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의 선구자로서 이기철학에 관한 이론적 체계를 최초로 완성한 대철학자로, 수많은 저서가 있지만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구인록(求仁錄),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은 선생의 3書로써 오늘날의 학문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다음 일정은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옥산서원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 18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7월 3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이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유서깊은 반촌(班村)이다.
안강평야의 동쪽 구릉지에 위치한 양동민속마을은 마치 500년 전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고풍스러운 가옥과 정자, 그리고 초가집까지 빼곡히 들어 차 있다. 마을 우측에 솟아있는 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빽빽이 들어찬 기와집과 초가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새벽에 이곳에 오르면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장관이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은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현재의 찰스 3세 왕)도 이 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며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어 아름다운 우리 예절과 전통문화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양동마을 관광코스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6코스를 추천하는데 시간이 여의치않을 경우에는 관가정-향단-무첨당-송첨종택-심수정 등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코스(하촌) :안락정→이향정→강학당→심수정(20분 소요)
2코스(물봉골) :무첨당→대성헌→물봉고개→물봉동산→영귀정→설천정사(1시간 소요)
3코스(수졸당) :경산서당→육위정→내곡동산→수졸당→양졸정(30분 소요)
4코스(내곡)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송첨종택→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5코스(두곡) :두곡고택→영당→동호정(30분 소요)
6코스(향단) :정충비각→향단→관가정→수운정(1시간 소요)
7코스(대표가옥) : 송첨종택-무첨당-향단-관가정(2시간 소요)
마을에 들어서면 정면 좌측 상단에 관가정(觀稼亭)이 보이는데 이집은 청백리로서 조선 중종 때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가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라 한다. 본채의 뒷쪽에 손소공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라 한다. 양동마을의 다른 집들과는 달리 관가정은 안채가 개방되어 있어 안채구조와 마루 등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인 향단(香壇)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정면 중앙 비탈에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기와건물이다. 이 건물은 회재(晦齎) 이언적(李彦迪) 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임금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준 집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줬으며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香壇公) 이의수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무첨당(無忝堂)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다.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남자들이 독서와 휴식, 손님접대를 하였던 큰 사랑채로도 쓰였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송첨종택은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월성(月星) 손씨(孫氏)의 종가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라 한다.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심수정(心水亭)은 이언적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李彦适)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성주봉 아래 큰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는 집이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자로 꺾고 그 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마을안팍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다. 안락정(安樂亭)과 강학당(講學堂)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서당역할을 했다.
양동마을의 양대 성씨(姓氏)인 손씨와 이씨는 각기 자문(自門)의 서당을 보유하고 있는데, 안락정은 조선 정조 4년(1780)에 건립된 손씨 문중의 서당(書堂)이고 강학당은 조선 고종 4년(1867년) 경에 지족당 이연상공(李挻祥公, 1819년)이 세운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심수정은 철종 때 불에 타서 1917년경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