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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귀하게 쓰이는 그릇(최한나)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말씀 아멘!!
본문은 주로 복음 사역자의 자세와 관련한 교훈과 격려를 다루는 본론 전반부의 1:6—2:26의 종결부분이다. 여기서는 올바른 말씀 사역자로서의 헌신 당부와 이단 사설에 대한 경계를 기록하고 있는 2:14-19에 이어 복음사역자가 갖추어야 자세와 관련하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필요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말씀에서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며,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은 다양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그릇들은 하나님의 쓰심을 받기 위해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나 재능으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마음가짐에 따라 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다. 즉, 금이나 은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귀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의 조건은 무엇이가? 본문에서 바울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릇이 귀하게 쓰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 깨끗함은 죄와 부정함으로부터의 분리이며,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주방에서 음식을 담을 그릇이 지저분하다면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그 안에 음식을 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도 깨끗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날마다 정결하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선한 일을 준비함 이다.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단순히 깨끗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릇이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언제든지 주인의 명령을 받아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것인가?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일상 속에서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준비된 사람의 자세이다.
마지막으로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 사랑과 화평을 따를 것을 명령한다. 특히 ‘정욕’이라는 단어는 일시적인 쾌락이나 유혹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이를 피해야만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정욕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 쾌락을 쫓는 삶 등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것들 대신, 의와 믿음,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가치관을 갖고, 신앙 공동체와 함께 나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단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된 자는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기쁨으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큰 집에 속한 그릇들이다. 우리의 재능이나 능력,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깨끗하며, 선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날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의 선한 일에 준비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길 소망한다.
34.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가이심이라 하니라
막1:21장 말씀 아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의 의미와 그분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모두가 되시를 바란다.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본질과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여호수아”에서 유래되었으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사명을 나타낸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의 역할이나 사명을 예언하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이 죄로 인해 죽음에 갇힌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임을 보여줍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묘사된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구원은 단순히 육체적 해방이나 정치적 구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한 윤리적 잘못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인류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렸고, 이로 인해 죽음과 심판이 세상에 들어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 자체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그 대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셨다.
본문 중 이 구절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이 구원은 개인적으로 적용된다. 즉, 믿음을 통해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구원은 단지 객관적인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 개인의 삶에 실질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구원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요구한다. 또한, 우리는 이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죄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그 구원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삶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그분의 사역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다. 우리는 이 구원의 메시지를 붙들고,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며, 그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35.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절 말씀 아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씀 중 하나이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약적 배경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에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도가 있었다(레위기 16장). 특히, 출애굽기 12장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에서 구원받는 장면은 중요한 배경이다. 이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해 희생되었으며, 그 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받았다.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하는 분이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제물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세상’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가리키며,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전 인류에게 확대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 어린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하셨다(히브리서 9:28).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속죄와 희생의 분이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이라는 표현에서 ‘지고 가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지속적으로 짐을 지고 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한 순간에 우리의 죄를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시간에 걸쳐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지고 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그 효과는 모든 인류에게, 모든 시대에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물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로 선택하셨다. 이 자발적 희생은 그분의 사랑과 순종의 절정이다(빌립보서 2:8).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며,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로마서 5:10).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구속사적 완성을 본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 제도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히브리서 10:4).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속죄 제사로, 율법을 성취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로마서 3:21-26).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죄의 문제와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세상의 죄란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와 악을 포함하며,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심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이 구절은 단지 신학적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도 죄에서 자유케 된 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얽매인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린도후서 5:17). 또한, 우리는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이 그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모두의 사명이다.
36.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14.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15.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16.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삼하20:14-19 말씀 아멘!!
사무엘하 20장은 다윗 왕국의 내부 혼란을 다루고 있다. 세바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 왕에 맞서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윗 왕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14절부터 19절의 말씀은 아벨이라는 작은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이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우리는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는 주제로, 이 본문이 우리 신앙생활에 어떤 교훈을 주는지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세바는 베냐민 사람으로서 다윗 왕의 통치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우리는 다윗과 상관이 없다”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여 다윗을 배신하게 만들었다(삼하 20:1). 세바의 반란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에 큰 위협이었다. 이 상황에서 요압은 세바를 추격하여 그가 피신한 아벨 성읍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압이 이 성읍을 공격하기 전에 성 안의 지혜로운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다윗 왕국이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도 분열과 갈등의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지혜롭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본문에서 요압은 세바를 잡기 위해 아벨 성읍을 공격하려 한다. 그러나 그 성 안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등장해 요압과 대화하게 된다. 이 여인은 요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더니, 그 일을 끝마치려 하거늘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삼하 20:18-19). 이 여인은 자신과 성읍이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세바가 성안에 있긴 하지만 그로 인해 성을 파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 속에는 지혜와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는 단순히 세바를 내어주는 것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녀는 대화와 중재를 통해 더 큰 파괴를 막고자 했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여인처럼 지혜롭고 평화를 중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며, 갈등의 순간마다 지혜를 구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한 지혜로운 여인의 등장은 지혜가 갈등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아벨 성읍의 여인은 다윗 왕국의 한 부분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이는 오늘날 신학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나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지혜는 단순히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 목회자로서, 신학생으로서 우리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지혜로운 자로 살 수 있음을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아벨 성읍의 여인은 하나님의 화평과 평화를 사랑하는 자로서 공동체를 지키려 했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떠오르게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화해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삶입이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의 왕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아벨 성읍의 여인이 세바의 반란으로부터 공동체를 구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다.
오늘 본문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순간에 평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신학생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실제 삶에 적용하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는 이 말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구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성장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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