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목사님 제자 전도사님 수고가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
확증편향에 따른 윤영상, 정이철 목사 난독증.
朴埰同 (2019. 02.19. 10:24)
‘{바른 믿음} 정이철 <연중론과 함께 교단 이대위 차원 문제로 다룰 전망>’에서 정이철 목사는 “노 목사 측은 한편으로 정 목사도 이전에 노 목사와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는 억지를 부리며 물 타기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고경태, 정이철 목사 주장을 반대하면 “노 목사 측”인가?
조롱어 “ㅋㅋ”를 좋아하시는 노승수 목사님은 ‘연중론을 반대한 나’를 ‘정신병자’로 여기시는 손성은, 윤영상 목사님과 함께하시는 분인데 말이다. ‘{개혁교의학}에서 드러나는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중생론을 <중생→ 성화→ 회심>으로 정리해 비평한 나’를 두고 지난 2015년 6월 9일에 {페북} 윤영상 목사님 담벼락에서 “ㅋㅋㅋ. 참 지성을 왜곡하는 인간 심성의 부패는 바닥이 없는 거 같습니다.”라는 댓글을 쓰신 분인데 말이다. ㅡ나는 노승수 목사님 “ㅋㅋㅋ”에서 희롱의 달인 손성은 목사님 ‘교만’한 영성을 본다.ㅡ
지금은 ‘{바른 믿음}에 가입하지 않고도 스마트폰으로 댓글을 쓸 수 있는 기능’이 차단된 상태이지만, 지난 2월 15일 밤과 16일 밤 이틀에 걸쳐 나는 현장 숙소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른 믿음}에 댓글들을 남겼다. ‘새 관점 신학은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고경태, 정이철 목사가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남긴 댓글들이었다. 별명은 ‘늘 푸른 솔’이었다.
‘{바른 믿음} 고경태 <바빙크, 성육신 목적은 예수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에 쓴 댓글이 “내로남불입니까? 정이철 목사님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속죄(구속)사역 혜택을 받으셨다’는 주장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바른 주장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한 이단 김성로 목사 동지 목사들에게 이단몰이를 당하셨는데,”였다. “바른 주장”이 어찌해서 정이철 목사에게는 “오류”로 읽히는 것일까?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이전, {양무리 마을}에 연중론이 소개되자, 연중론을 놓고 이의를 제기하며 맨 처음으로 반대한 분이 계셨다. 서철원 목사님 총신 제자이셨다. 별명 ‘카이로스’를 쓴 전도사님이셨다. 내가 {양무리 마을}에 가입하기 이전인 2007년 여름이었다.
예장 합동 총회가 연중론을 잘 검증해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중생론 교과서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에서 개혁 신학 “변종”, “미혹”, “원조”로 ‘이단시’당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 ‘단회 순간중생 시 확정성화와 회심’론이 ‘성경의 진리’임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20세기 개혁신학자들께서 “20세기 개혁 신학 보물”로 높이시는 ‘확정(결정)성화’ 진리, 이 진리를 밝히신 우리 개혁신앙의 선조 존 머레이 목사님 명예를 회복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은 목사님이실 카이로스 전도사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철원 목사님 제자 전도사님 수고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위 그림(도표)은 {페북} 윤영상 목사님 담벼락에서 가져온 것이다. 연중론 도표 “죄 각성”은 제임스 뷰캐넌 도표에서는 “1)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심”이다. 물론, 연중론 도표 “죄 각성”과 “믿음과 회개”는 수태 뒤 열 달 임신 기간으로 ‘참된 회심’을 위해 태아가 분투하는 기간, 연중론 도표 “회심 사건”을 위해 태아가 ‘거짓 회심’을 되풀이하는 ‘중간 단계’ 기간이다. 즉, 태아가 출산(참된 회심)을 위해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회개하지 말까?’ 갈등하며 성숙하는 ‘불신’의 기간이지만 ‘어느 정도 회심’하는 기간이다.
그러면 제임스 뷰캐넌 목사님께 ‘좁은 의미의 중생: 하나님만의 단독사역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에게 값진 생명의 씨(새로운 본성)를 주심’은 어디에 위치할까? 연중론으로 하면, 당연히 “1)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심” 앞이다. 그런데 제임스 뷰캐넌 목사님께 “3) 의지와 마음을 새롭게 하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뜻하지 않는가!
《중생 받은 불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 뷰캐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신호섭 역 (서울: 지평서원, 2011)’ 203쪽.
《회심은 점진적 단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인은 그 본성상 모두 악하지만 다소간 차이가 있으며, 중생 받은 신자 상태 역시 모두 거룩하지만 그 거룩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회심에는 차이가 없다. 죄인은 어느 정도만이 회심하고 또 어느 정도는 회심하지 않을 수 없다. 회심하든지 회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곧 중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살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제임스 뷰캐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207쪽.
≪몇몇 개혁파 선생들과 목사들에게 알려져 있는 한 가지 현저한 예로는, 다 자란 아이나 성인이 신자가 되기 전 얼마 동안 (회심하지 않고) 중생한 채로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명쾌한 수업에서 이 점에 관해 논평한다. ㅡ기억을 더듬어 보자면ㅡ 성경으로 고찰할 때 ‘중생한 불신자’라는 개념은 “기괴한 것”이다. ≫ ‘리차드 개핀 {안식, 종말, 성신에 대한 성경 신학적 교훈: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서울: 성약출판사, 2007)’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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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제 담벼락에서 옮겨옵니다.
첫댓글 크로스 님을 보면, 참으로 ‘총명’하십니다. 연중론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혼의 의사}를 {성경}에 버금가는 중생론 교과서로 삼으신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을 ‘총명’하신 분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생론’ 부분에서는 ‘좌충우돌 서술’로 이뤄진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을 분별 못 한 채 ‘피터 마스터스 혼란스러운 영혼’에 미혹 당해 그 ‘총명’이 ‘피터 마스터스 영혼’에 지배당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 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역사’을 읽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