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살아있다
김순이
오름에는 바람이 있다
지난 밤의 그 지독했던 바람에 한없이 떨어야 했던
풀잎들의 휘인 모습은
어쩌면 삶에 지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눈에 밟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꽃은 불평 한 마디 없이
꽃봉오리를 열어 세상을 바라보려한다
그 삶에의 경건함이
마음의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오름에서 만나는 돌멩이 하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몇 천만년의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냐
자신이 그럴듯한 산악山嶽도 아니고
하다못해 바위도 못되고
그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찮은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곳에 불평 한 마디 없이 있다
거기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떳떳하다는 듯이
어제도 불었고 오늘도 불고 있는 바람 속에서
마음의 검은 구름이 날아 간다
집이 없는 설움이 날아간다
찢어진 사랑이 날아 간다
외토리의 소외감이 날아간다
돈과는 영 인연이 없는 찌그러진 날들이 날아간다
외상장부가 날아간다
세간의 명성이 날아간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야멸차게
때로는 간지럽게
때로는 독살스럽게
오름에서 부는 바람은
우리 마음에 켜켜이 쌓인 찌꺼기와 때를
속속들이 쓸어내고 털어낸다
오름에는 울림이 있다
오름의 울림은 껍질이 아니라 속살의 가락이다
야성의 혼이 부르는 노래이다
저 한라산정에서 발원하여
심산유곡을 에돌아 흘러
바다에 이르는 유장한 음악이다
시초에 울림이 태어나면서 타올랐을
용암의 불꽃이 내면으로 침잠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듯이
그것은 정적 속에서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하여 오름의 울림은
잠든 우리 혼을 흔들어 깨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오름과 오름의 파노라마
그것은 차라리 울림의 악보樂譜다
오름과 오름이 서로 화답하고
오름과 사람이 내통한다
오름은 살아있다
촌스런 고향이 죽도록 싫어서 기어이 떠난 사람,
머리카락 희어가는 어느 날 홀연히
그의 가슴에서 고향의 오름은 되살아난다
그것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모성의 울림
오름에는 빛깔이 있다
오름의 모습은 하나이되 결코 하나가 아니다
보는 방향에 따라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해마다 다루고 날마다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르고
햇빛에 따라 다르고
바람에 따라 다르고 구름에 따라 다르고
안개에 따라 다르다
오름은 대자연의 탤런트이다
싸락눈이 왕소금처럼 얼얼하게
귓싸대기를 후려갈기는 그런 한겨울날
오름 위에 올라 보라
문득문득 찢어지는 구름 사이에 보이는 하늘빛은
어찌 그리 푸르른가
절망 속에서 움튼다는
희망의 빛깔이 그러하단 것일까
녹작지근하게 무르익는 봄빛 속에서
높이높이 날아오르는 종달새의 노래는
어찌 그리 맑은가
적금통장도 없고 퇴직금이 보장된 직장도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즐거이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냐
우리의 무채색인 나날들
상투적인 빛깔들이 문득 부끄럽게 돌아다보인다
아, 나는 무엇하며 살았나
내 빛깔은 언제 적부터 길을 잃었나
허심탄회하게 문을 열고 가라
탁해진 마음의 눈빛을 맑혀주는 빛깔이
오름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오름에는 소리가 있다
소멸과 생성을 순환하는 생명의 소리가 있다
사람의 마을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귀에 쑤셔박힌 소리들이
오름을 오르는 발자국마다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심장을 졸아붙게 하고 숨을 멎게 하고
눈앞을 깜깜하게 하던
소리의 더께들이 떨어져 나간다
자동차의 급브레이크 소리, TV 소리,
한밤중의 불자동차 소리,
냉장고의 콤프렛샤가 돌아가는 소리,
직장의 상관이 쏘는 눈총 소리,
주택가를 돌아다니는 잡상인의 소리....
원하지도 않았는데
마음과는 상관없이 달려와
귀를 때리고 정신을 흩어놓았던
그런 소리들이 떨어져나간 그 자리에
싱그럽고 해맑은 소리들이 고즈넉하게 깃든다
떠오르는 아침해의 뜨거운 숨소리가 들린다
지하로 흘러가는 생수生水의 차고 맑은 소리가 들린다
꽃봉오리를 실잣는 들꽃의 물레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빗자루질하는 구름의 소리가 들린다
달빛 아래서만 문을 여는
어떤 신비한 꽃의 소리가 들린다
오랜 번데기의 고행 끝에
허물을 벗는 곤충의 소리가 들린다
거미줄에 맺히는 이슬방울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들린다
빈약한 영혼을 고해告解하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슬픔어린 소리
오름에는 향기가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끄러운 여인,
드러누워 되새김질하는 소,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삼형제,
처녀의 젖가슴, 벌판에 떨어진 샛별,
불끈 솟아오른 남근男根, 로마의 콜로시움,
탐스러운 여성의 조개,
마악 차오르는 초생달....
330여개의 제주오름은 그 모습이 모두 다르다
거기에 몸붙여 살고 있는 생명들이 다르기에
빚어내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러나 한가지 같은 점이 있다
어느 오름에 올라가더라도 다른 오름의
둥글고 어진 선線이 바라보인다
다정한 이웃처럼, 형제처럼, 친구처럼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내가 여기 있잖니
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야한 자세로 누워있는 오름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그 모습에서 욕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 고요하고 정갈한 자연의 누드에서
성性스러움 보다는
오히려 聖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짙어가는 가을날 햇살 아래서
서둘러 짝짓기하는 메뚜기들이 연민으로 다가오고
물매화 새하얀 꽃송이가 그렇게나 대견스럽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섯부른 지식이 빛을 잃는다
이 세상 만물에게도
나와 같은 애증의 고통이 있고
영혼에의 갈구가 있다는 깨달음이
문득 가슴을 친다
이기심 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이
거울앞에 선 듯 비쳐 보인다
걸어왔던 길들에 뿌려진 오욕이 선명하게 부끄럽다
짧은 한철을 살고 한 마디 변명도 없이
불평도 없이 스러지는
한 송이 들꽃도 지니고 있는 향기
사람인 내게서는 어떤 냄새가 나던가
내 향기는 무엇이던가
그저 오래 살기나 바라고
돈이나 쌓아 놓기를 꿈꾸고
사람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을 가치있는 일이라 여기며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진 않았던가
누구는 이 세상을 향로라 하였다
우리 삶이란 향을 태우는 일이라 하였다
오름에서 향을 사르듯
열심히 살고 있는
나무며 풀들,
그리고 새와 벌레며 짐승들
대자연의 섭리에 순명하는 그들의 빚는
소리와 빛깔은
오름의 향기가 된다
오름의 향기는 말이 없다
요란하지 않다
수선스럽지 않다
다만 고요하다 적막하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첫댓글 오름,,,가보지 않아도 가본 듯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르르님의 시같이,,,낭송하는 모습 또 그려집니다...^^
목련님 목소리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늘도 행복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