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시편72,7).
(노숙자 예수/서소문 성지 07/07)
“정의”와“평화”가 짝을 이룬다.“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라는 것은 시간적 제한이 없이 정의와 평화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꽃피게 하소서”는 6절에서 비와 소나기가 온 땅에서 씨앗의 싹을 틔우는 것에 이어 꽃이 피는 것으로 연결된다.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이후로 당신의 양 떼를 돌보실 평화의 왕좌로 예언되었다.
시편 72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72편에서 시인은 이상적인 임금의 통치를 기원한다.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이 임금을 통해 다스린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다윗 임금 이후에는 모범적인 임금이 많지 않았다.벤시라는 이렇게 말한다.“다윗과 히즈키야와 요시야 말고는 모두가 잘못을 거듭 저질렀다.과연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법을 저버렸기에 유다 임금들이 사라지게 되었다”(집회49,4)이 시편에서 임금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주님과 세상을 정의와 공정으로 다스려야 한다.임금의 정의는 불쌍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특히 임금은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며 폭행하는 자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이상적인 임금의 과제는 속량하는 것이다.그래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 시편은 영원히 다스리시고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그분의 공정이 지속되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그리스도인들은 이상적인 임금이 궁극적으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의 다스림이 임함을 발견하는 자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승리를 안겨주셨다.그래서 이 시편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리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예수님은 말씀하셨다.“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다.오늘날 교회의 모든 지도자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해야 하며 특히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보살핌으로써 참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으로써 백성의 안녕과 평화와 행복에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이 시편을 통해 깊이 숙고해야한다.(거룩한독서를 위한 구약성경주해32-2 시편42-89편/바오로딸)
Ⅲ.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 역설적으로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실재보다는 기술적 사고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습니다.“이러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나 살아가는 거처로 여기지 않습니다.인간은 자연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물건을 만들려는 자리와 재료로 여기며,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하든 관심이 없습니다.”그래서 세상의 고유한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인간은 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되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맙니다.“인간이 그 본래의 선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땅이 하느님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인간도 인간 자신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졌으며,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자신이 타고나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해야 합니다.”
116. 근대에는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가 있어 왔고,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동의 이해와 사회적 결속 강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저해하고 있습니다.그래서 현실과 인간 중심주의가 불러온 한계를 새롭게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이는 개인과 사회가 더욱 건전하고 풍요롭게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그리스도교 인간학이 적절하게 제시되지 못한 것이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낳았습니다.프로메테우스처럼 세상을 지배하려는 꿈이 퍼져 나가면서,자연 보호는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나타났습니다.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의‘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라는 의미로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117.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악과 인간의 결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에 태만한 것은 자연의 구조 안에 새겨진 메시지에 대한 무관심을 뚜렷하게 보여 줄 뿐입니다.예를 들어,현실에서 가난한 이,인간 배아,장애인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 자연의 울부짖음 자체에도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워집니다.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자를 자처하면,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됩니다.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대신,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118.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끊임없이 정신 분열로 이끌어 왔습니다.여기에는 다른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인하는 기술 지배에 대한 찬양부터 인간의 그 어떠한 특별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응까지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인간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인간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올바른 인간학 없이는 생태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인간이 단지 여러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우연이나 물리적인 결정론의 산물로 여겨질 때,“우리의 전반적 책임 의식은 약화될 것”입니다.그릇된 인간 중심주의가 반드시‘생물 중심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이러한 생물 중심주의는 오늘날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문제들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불균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지성,의지,자유,책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 세상을 책임 있게 대할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119.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관계의 가치를 떨어뜨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근대성의 윤리적,문화적,영적 위기의 발발이나 발현을 의미한다면,모든 근본적인 인간관계를 치유하지 않고는 우리가 자연과 환경과 맺은 관계를 감히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다른 모든 피조물에 견주어 인간이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리가 모든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게합니다.알고 사랑하며 대화할 수 있는‘너’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따라서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사회적 측면은 물론,하느님이신‘당신’께 마음을 여는 초월적 측면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사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그러한 관계가 분리된다면,이는 생태적 아름다움으로 위장된 낭만적 개인주의로 내재성 안의 숨 막히는 단절이 될 것입니다.
120.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자연 보호와 낙태의 정당화도 양립할 수는 없습니다.비록 임신으로 불편과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도 인간 배아를 보호하지 않는다면,우리 주변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성가시거나 귀찮게 하는 약한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새 생명을 받아들이려는 개인적 사회적 정서가 사라지면 사회에 소중한 또 다른 것들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121. 지난 수 세기 동안 전개된 그릇된 주장을 극복할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그리스도교는 그 고유한 정체성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와 보화에 충실하면서,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그 영원한 새로움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지금까지 비교역사적 맥락에서 중국.일본.조선 천주교의 역사적 경로를 그 외면적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서술해왔다.간략히 살펴본 대로,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장기간의 박해기를 겪었던 점,이 사이에 교황청과 선교회들의 선교정책이 적응주의적인 것에서 배타주의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던 점,19세기에 세 나라 모두가 서구 열강의 東進과정에서 강제적으로 개항하게 되고 개항과 함께(혹은 직후에)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후 배타주의적 필자는 선교정책의 대표주자였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주도권아래 이 지역의 천주교 선교가 전개되었던 점,‘제국주의와 선교의 결합’에 따른 선교사들의 특권층화,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반기독교적운동의 고양,근대적인 민족국가 수립운도의 등장 및 발전 등은 세 나라의 몇 가지 중요한 차이들 또한 드러났다.박해기 이전에 받아들인 신앙의 유형과 박해시대에 선교사들과 관계한 방식의 차이,그리고 개항의 시기와 방식에 따라 선교사들의 특권화 정도와 반기독교운동의 빈도.강도.성격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드러났으며,이런 역사적 경험들이 이 세 나라에 자리잡은 천주교의 진로와 역정을 미묘하게 달라지게 만들었다.이런 미묘한 차이들은 근대적인 민족국가가 수립되고 보다 근대적인 유형의 민족주의운동이 새롭게 고양되는 단계에서 보다 현저하고도 결정적인 차이로 발전하게 된다.요컨대 중국과 일본은 강력한 민족주의운동에 편승하여 강력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반면에,조선에서는 민족국가 수립의 실패와 식민지화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고,이 같은 상황 전개의 종교적 함의,특히 그것이 천주교에 대해 갖는 함축은 엄청났던 것이다.(본문 44-45쪽 발췌)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은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오롯이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저마다,꽃’중에서/이종암)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