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찬송가』역사적 비판을 통해 찬송가는 조금씩 발전해 간다. 21세기 찬송 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비판을 올바르게 수용할 때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 이다. 21세기 찬송가는 선교 122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인 작사 작곡의 찬송가 128곡을 비롯하여, 지난 10년 동안 신학자, 목회자, 국문학자들과 교회음악전 문가들을 대거 참여케 하여 더 좋은 찬송가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 다. 그러나 새로 발간된 찬송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어설프기만 한 것이 필 자의 생각뿐이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손대지 못한 편협함이 고쳐져가기를 바라 는 마음에서 이 원고를 올려 본다. 후학들의 연구와 한국찬송가의 발전을 위해 이 글을 올린다. 글을 올림에 있어서 주(root)의 번호와 글자의 크기가 제대로 조정되지 않아 먼저 양해를 구한다.
1. 한국 찬송가를 살펴본다 비판에 앞서 한국 찬송가의 계보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우리 나라 최초의 찬송가는 1892년에 감리교에서 발간된 『찬미가』이다. 간행 자는 미감 리회선교사인 존스(G. H. Jones)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30편을 공동으로 편집하였다.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서울: 아가페문화사, 1997), p.164. 그후 1894년 미 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元杜尤)에 의해 서 간행된 4성부의 『찬양가』이다.
이 『찬양가』는 주로 장로 교회 전용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백과사전』(서울: 기독교문사, 1990), 제14권, p.515 이 찬양가의 곡조는 독일 코랄(Chorale)이나 시편가 곡조(Psalm Tune)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고, 왓츠(13편)와 웨슬리(7편)의 찬송을 비롯한 19세기 영국계 찬송 60 편과 블리스(P. P. Bliss)의 찬송 5편을 포함한 19세기 미국 찬송 20여 편 등 영국 과 미국 의 복음적 찬송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기할만한 일은 한국인 창작 찬송 7편 (4, 29, 38, 61, 93, 113, 115장)이 수록된 것이다. H.G. 언더우드(편), 『찬양가』 (일 본 : 요꼬하마, 1894), 셔문 참조 그후 장로 교회의 공인 찬송가로 출간된 것이 1895년에 발간된 『찬셩시』이 다. 선교 사리이(Graham Lee)와 기포드(Mrs. M. H. Gifford)의 공편으로 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악보가 첨부된 곡보 『찬셩시』는 1905년에 출간되었다. 찬셩시(1905) 서 문 참 조. 『찬셩시』는 14편의 운율 시편 번역이 수록된 것이 특징인데, 시편가의 수록 은 어느 정도 ‘개혁 교회’의 전통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곡조에 있어서는 제네바 시편가나 영어 시편가의 곡조가 전혀 채택되지 않고 있다.
조숙자 · 조명자, 『찬송 가학』(서울: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88), p.215. 이리하여 1896년에는 ⌈찬양가⌋, ⌈찬미가⌋, ⌈찬셩시⌋ 3개의 찬송가가 사용되었 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식순의 하나로 애국가를 불렀는데, 이 윤치호(尹致昊)가 작사한 ‘애국가’는 1905년에 발 간된 윤치호 역술, 김상만 발행의 ⌈찬미가⌋에 수록되어 나타났다. 이 애국가는 1908 년에 재판된 ⌈찬미가⌋(14장)에 ‘올드랭 사인’(Auld Lang Syne) 곡으로 실려 있다. 독서 신문(제 249호) 1975년 10월 19일. 참고로 애국가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느님이 보호 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 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우 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3절, 가 을 하 날 공활 한대/ 구름 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 단심일세. 4절, 이 긔상 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것은 현행 애국가 가사와 거의 같은 것으로 처음에 “Auld Lang Syne"곡으로 불리 다가 안익태의 곡조로 바뀐 것은 1936년 6월 초순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 회에 서 개창식을 가진 뒤였다.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한국에 있어서 교파 합동을 목적으 로 연 합 공의회를 결성했다. 찬송가 편집 위원은 배위량 부인(Mrs. W. M. Baird), 민로아 (F. S. Miller) 목사, 벙커(D. A. Bunker)였으며, 합동 원칙은 이미 사용하던 찬송가 를 토대로 새찬송가도 첨가하되 “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며, 의가 졍당 고 교리에 뎍절 것만 쓰기로”하였다. 『찬숑가』(1931) 서문 이 찬송가는 1908년에 266편의 찬송이 수록되어 ⌈찬숑가⌋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수록되었으며, 곡조 찬송가는 1909년 피터 목사 부부가 그들의 사비로 226곡을 수록하여 발행하였다. 염행수, 『讚頌 神學』(서울 : 도서 출판 생수, 1985), p.62. 이 『찬숑가』의 특징은 6곡(10, 11, 12, 13, 14, 40장)은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한 것과 한국 고유의 곡을 붙인 찬송은 교창으로 부를 수 있게 하였고, 절기 찬송을 한데 묶었으며, 번역문이 세련되고 완벽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이 ⌈찬숑가⌋는 1908년에서 1930년까지 ⌈신정 찬송가⌋가 나오기까지 22년간 무 려 43판, 874,500부를 발행하여 찬송가 역사상 가장 많은 부수를 세상에 내놓았다.
1924년에 조선 기독교 연합공의회가 새로 조직되었는데, 그 첫 사업으로 1924 년 장 · 감 연합공의회는 다시 새로운 찬송가의 간행을 계획하고, 장로회 측 대표로 공위 량(William C. Kerr), 김인식, 그리고 감리교 측 대표로 아펜셀라(H. D. Appenzeller)와 변성옥을 편집 위원으로 개정 작업을 맡겼다. 그러나 1928년 불 의의 화재로 관계 자료가 모두 소실되어 부득이 찬송가 간행 계획이 연기되었다. 그 후 다 시 작업을 서둘러 1931년 314곡의 찬송가를 편집 간행했는데, 곧 ⌈신정 찬송가⌋ 이다. 이 ⌈신정 찬송가⌋에는 314곡이 수록되었는데, 반수 이상이 『찬숑가』에서 온 것이 고, 70편이 청년 찬송가에서, 그밖에 새로운 번역 찬송과 현상 모집으로 채택 된 한국인 찬송 6편을 싣고 있다. 신소섭, 『예배와 찬송가』(서울: 아가페문화사, 1993), op. cit., p.171. 그러나 비 신앙적인 찬송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교파간의 의견 차이와 사전 협의 부족 등으로 장로교 측에서는 사용을 거부하고, 장로교는 독자적인 새 찬송가를 편집하여, 간행했는데 곧 ⌈신편 찬송가⌋이다. 기독교문사, 『기독 교 대백과사전』, op. cit., 10권, p.432. 이 『신편 찬송가』편집에 있어서 ⌈신정 찬송가⌋에서 70여 곡을 선정하고, 성 결교 회 ⌈복음가⌋ 중에서도 여러 곡을 선택하여 잘 부르지 않는 찬송가 40장을 삭제 하고, 새로운 곡 100장을 증보한 후 모두 400장으로 된 ⌈신편 찬송가⌋를 1935년 6월 에 발행 하였다. 이 일에는 미 북장로회 선교사 앤더슨(W. Anderson; 安大善)이 주축이 되어 실무적인 일을 진행하였고, 한국인 음악가 현재명 · 황재경 등이 참여하였다. Ibid., p.467. 결국 이 ⌈신편 찬송가⌋의 발행으로 1908년 이후에 지금까지 24년이나 같이 써 오던 찬송가를 두 권의 찬송가로 분리시켰다. 염행수, op. cit., p.66-67. 그 동안 장로교에서는 ⌈신편 찬송가⌋를, 감리교에서는 ⌈신정 찬송가⌋를, 성결 교회 에서는 ⌈부흥 성가⌋를 사용해 오다가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 · 감 · 성 세 교 파에 서는 찬송가합동을 추진하여 ⌈찬송가⌋라는 이름으로 한국 기독교 사상 처음으 로 한국인의 손으로 편집하여 통일된 찬송가를 1949년에 발행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찬 송으 로 임배세의 작사 작곡인 “금수강산 내 동포여”(496장), 김활란 작사의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195장), 고(P. K. Ko)씨의 작사인 “눈물 밭에 떨어 진”(205 장), 오(P. Oh)씨의 “캄캄한 밤중에 빈들에서”(363장), 남궁억(Nam Kung Ok) 작사 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459장) 등이 실렸는데, 한국인 작곡은 한 곡이며, 작사로는 5편이 실려 있다. 어쨌든 이 찬송가는 1962년 새 찬송가와 1967년 개편 찬 송가 가 나올 때까지 무려 20만 부나 출판되었다. Ibid., p.69. 2. 한국 찬송가를 역사적으로 비판한다 위에서 한국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한국기독교가 1세기를 지나 2세기 에 접 어들면서, 그 동안 한국 찬송가는 여러 차례 바꿔 편집되었다. 그러나 찬송가 가 피 선교국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흐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부분의 문 화나 문명이 대륙에서 흘러 들어오거나 바다를 건너서 들어왔다. 기독교의 복음도 마 찬가 지였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등의 찬송가를 살펴보더라도 자국의 창작시나 창작 찬송 곡의 비율이 우리나라와 같이 낮지는 않다.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 op. cit., p.192. 자국의 창작시 비율이 일본고급성가집(1924) 25%, 찬미가(1931) 11%, 찬미가(1954) 12%나 되고, 중국 『普天 頌讚』(1955) 12%, 『萬民 頌揚』 (1956) 7% 다. 그러나 한국의 『개편찬송가』 4%, 공회 『찬송가』 3%에 그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88%나 된다.
한국인의 찬송을 7편을 실은 『찬양가』(1984년), 6곡을 한국 고유곡으로 부르게 한 『찬숑가』(1908년)가 있었으나, 정작 한국인의 손으로 편집된 『찬송가』 (1949 년)에는 한국인 곡이 한 편, 작사가 5편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억눌려왔던 우리 나라를 기독교 문화가 민족을 일깨 웠고, 또한 개화기에 앞장선 분들이 기독교 신앙 인이었던 것이다. 술과 노름으로 패가 망신 하던 사회적인 부패를 기독교의 복음과 찬송이 그들을 바로 잡아갔던 것이다. 그예로 『합동찬송가』 486장에는 임배세 작사, 작곡인 “금주가”(Bb장조, 2/4박 자)가 실려있다. 그리고 오락과 가무를 즐기던 우리 민족에게 서양 음악을 전해준 것은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가 그간의 교육기관인 서당을 대신 했고,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르쳐진 ‘창가’ 시간을 통하여 서양 음악이 전해진 것이다. 이러다 보니 찬송가의 보급은 빨랐지만 우리의 고유한 민속 예술과 음악은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1915년에 발행된 『챵가집』의 편집자도 당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 있던 베어드 부인과 베커 부인이다. 그녀의 번역찬송이 현 『찬송가』(한국찬송가공회, 1983) 에 30편 이상이 수록되어 있으며, 80여 년간 한국교회에서 애창 되어온 찬송가 중 상 당수가 그녀의 번역이다. 베어드 부인은 초대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배위량(W. M. Baird, 1862-1931) 선교사의 첫째 부인으로 찬송가 번역, 편찬이외에도 동물학, 식물학, 역사 교과서 등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어교본』(1897 초판)을 저술하고 선교사 들을 위한 한국어 교사도 하였다. 신소섭, 『한국교회음악사』, (서울: 아가페 문화 사, 2001), p.263. 베커부인도 미국인으로 그녀의 경력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유선 씨의 『한국양악사 80년사』에는 “연희전문학교의 음악교육은 1915년, 예배시 간에 합창과 찬송가를 지도한 베커(L. B. Becker)부인에게서 시작된다.”라고 했다. 이유선,『한국양악 80년사』, (서울: 중앙대학교, 1989년), p.185. 한국 찬송가의 문제점은 찬송가가 대부분 외국 찬송의 번역찬송인데, 번역가 사가 문제다. 선교사 게일은(James S. Gale)은 그의 선교보고서에서 당시 한국 찬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번역 찬송은 시문학적 표현도 아쉬운 동시에 시 적 형 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특히 서양 찬송곡조를 좋아해서 잘 부르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노래를 음미하여 가슴에서 우러나 오는 노래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The Korean Repository for September, 1896, p.376. "한국 사람은 놀랄 만큼 음악에 대해서 민감하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한국적인 토착 찬송가가 나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 찬송은 내용의 명료 성, 운 율(meter), 억양(stress), 경어(honorifics)에 있어서 결함이 많다. 대부분의 번역 이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색하여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의미 를 깨닫지 못하고 의아할 수가 있다···경어 사용에 있어서도 제한된 글자 수 때문에 ‘옵쇼셔’하다가 ‘’나 ‘게’로 산만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고상한 표현이 아쉽다.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공경심과 위엄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번역으로는 불가능하다.” The Korean Repository(Vol. Ⅲ 1896년) (New York: Paragon Book Reprint Corp., 1964), pp.376-377. 고 하면서 한국 사람의 심성에서 우러나온 토착적인 한국 곡조와 시로 된 찬송이 나와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정찬송가의 서문에 보면 조선 구곡(Old Korean Music) 을 사용할까 하는 문제도 있었으나 좋지 못한 사회와의 관계 때문에 한국인 편 집위원 들이 반대하여 중지하였다고 하였다. 조숙자 · 조명자, 『찬송가학』, (서울: 장로 회 신학대학 출판 부, 1988), p.228. 이와 같이 초기 한국의 교육을 이끌어간 분들도 선교사요, 찬송가의 편집자 들도 선교사였기 때문에 찬송가의 토착화 문제에 있어서는 걸림돌로 별 작용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토착화의 길을 터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 편집인들의 반대로 결국은 무산되고 말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찬송가의 편집에 있어서도 1905년 『찬미가』가 윤치호 역술, 김상만 발행으로 최초 로 한국인이 발행을 하여 세련된 번역가사나 음곡보다도 한국교인의 신앙적 여과를 거친 찬송가였다는데 의미가 깊다. 그러나 선교사주도의 교회찬송가 시대에 환 영을 받지 못했다. 그 후 『신편찬송가』의 편집에서 안대선, 현제명, 허일 부인이 편집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편찬송가』(1935년), 사례의 말씀 안대선 선교사가 대개 편집을 맡았던 것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아직 찬송가를 만들 수 없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찬송가의 사용에 있어서도 감리교는 『신정찬송가』를, 장로교에서는 『신편찬 송가』 를, 성결교에서는 『부흥성가』를 사용하다가 해방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 · 성결 교의 세 교파가 합해서 1949년 『찬송가』라는 이름으로 합동찬송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새 찬송가』와 『개편 찬송가』로 분열되었다가 ‘새찬송가 위원 회’와 ‘찬송가위원회’가 ‘찬송가공회’로 거듭나면서 1983년 현 『찬송가』로 통일 되었 다. 찬송가의 분열은 그만큼 교파의 벽을 높이고, 연합집회 등 성도들의 사용 에 불편 함도 적지 않았다. 또한 찬송가의 전문성의 결여를 안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 나 각 찬송가로서의 특장이 있어서 그 특장들만이라도 잘 살려간다면 좋은 찬송 가로 만들어져 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할 저서 :『예배와 찬송가』『예배와 찬송학』『교회음악학』『한국교 회음 악사』; 작곡집 『시편찬양곡집』1, 2집; 찬송찬양작곡집『다윗의 풀피리 소 리』; 크 리스마스칸타타『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 『오! 임마누엘 이 땅에 임하소 서』; 부활절 칸타타『왕 중 왕 부활하신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