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잘 먹고 잘 사는 법〉패널리스트로
방송에 복귀한 영화배우
유지인,방송 복귀 사연과
최근 근황
수다에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16년차 아줌마의 진수를 공개합니다
1970년대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던 절대 미인 유지인(46세). 결혼과 동시에 방송계를 떠났다 1995년 드라마 〈여울〉로 컴백한 이후, 방송 출연을 고사하며 가정주부로 만족했던 그녀가 돌연 요리건강 프로그램 패널리스트로 전격 재기했다. 마흔여섯 살의 가정주부이기 때문에 출연 제의에 선뜻 응했다는 아름다운 여자 유지인의 최근 근황 및 방송 복귀 사연.
●취재/고민정 기자 ●사진/안진형(프리랜서)
누군가에게 잊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토끼 같은 아들딸 낳고 아침저녁으로 부엌에 매달려 산 지 10년, 20년. 어느새 여고시절 따윈 까맣게 잊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대청소를 한답시고 옷장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발견하는 낡은 사진첩 한 권.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한 장 두 장, 추억의 앨범을 넘기면 여고 동창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시절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지, 새삼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시절이 못내 그리운 이유는 함께한 추억만큼이나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가고픈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눈가 주름을 걱정하며 매일 밤 아이 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되던 그 시절, 세수만 해도 예뻤던 그 시절로 말이다.
방송인 유지인을 대할 때마다 ‘어쩜, 하나도 안 늙었네. 그대로야’라며 감탄해 마지않는 시청자들이 있다면 마음속 한구석에 자신도 그녀처럼 옛날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수다로 대기실 휘어잡는 카리스마
연예계 떠나 대전 지역 유지(?)로 활동
〈생방송 잘 먹고 잘 사는 법〉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열 다섯 살의 딸을 둔 중년 여성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예전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신 헤어 스타일인 밖으로 삐친 듯 날리는 바람머리 커트, 화
사한 연둣빛의 트렌치 코트를 입은 모습은 세월도 그녀의 미모를 함락시키는 것을 잠시 유보한 듯했다.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도 있다. 무엇보다도 털털한 성격으로 생방송 시작 전 대기실 분위기를 수다로 휘어잡는 카리스마였다. 오늘의 수다 주제는 다이어트.“ 젊어서 뚱뚱하면 빠질 가능성이라도 있잖아. 나이 들어봐. 거꾸로 매달려서 아무리 운동해도 안 돼(웃음).
나도 여기저기에 자꾸 살이 찌더라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실 여성 동지(작가, 코디네이터 등등)들의 따가운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 꽂힌다. 손이 큰 장정 같으면 한 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날씬한 몸매의 그녀가 다이어트를 운운하니 다들 야유 아닌 야유를 보낸 것이다. 그녀는 애써 잡히지 않는 살들을 잡아 보이며 이게 ‘나잇 살’이라며 아줌마 특유의 수다를 한껏 풀어낸다.
더러 수다 동지들을 향해‘결혼 아직 안 했지? 한 번 살아봐, 그게 되나’ 혹은 ‘그 방법 내가 써봤는데 살 잘 안 빠져’등 결혼 선배로, 다이어트 선배로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수다 떨며 방송을 준비하는 그녀를 마주한 것은 꼭 6년 만이다.
1973년 동양방송 14기 탤런트로 데뷔, 영화 〈심봤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으로 70년대에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린 최고의 은막 스타 유지인. 그러나 정확히 16년 전, 그녀는 의사 조태봉 씨와 결혼하자마자 미련 없이 은막을 떠나 전업주부로 전환을 했고, 비교적 본분에 충실했다.
방송과 영화, 서울을 떠나 그녀는 철저히 ‘대전 아줌마 유지인’으로 살았다. 결혼 후 대전으로 내려가자마자 아파트 반상회를 자청, 그녀 스스로 ‘공인 유지인’을 버리고 ‘주부 유지인’으로 살아남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연예인으로 지내는 동안 휴식다운 휴식을 제대로 취해보지 못했던 그녀는 결혼 후 여유로운 생활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안방 마님은 결코 될 수 없었다. 결혼 직후 남편이 전문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야 했고, 이웃에 사는 시어른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는 등 맏며느리 노릇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살림 밑천인 딸 희수가 태어난 데 이어 연년생으로 딸 연수가 태어나 한동안 육아전쟁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가끔씩 전업주부 이외의 외도(?)도 감행했다. 그 결과 자칭, 타칭 ‘지역 유지’로 등극했다는 것. 유명 연예인이 거주하는 일이 드문 대전에 살면서 그녀는 엑스포 박람회 명예도우미로, 월드컵 대전 홍보도우미로 활동한 이력도 있다. 매년 12월 마지막 날 대전 시장과 함께 재야의 종을 울리는 자리에 참석해 ‘지역 유지’로서 누릴 수 있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최고의 경쟁자, 장미희와 절친
두 딸 키워놓고 드라마 〈여울〉로 컴백
연예활동을 중단했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연락을 끊은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엔 좀더 예뻐 보이는 화장법을 알아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경쟁자였지만, 지금은 동지가 된 장미희, 정윤희와의 인연은 특히 소중하다. 자신보다 더 지독한(?) 전업주부로 살면서 연예활동을 일체 하지 않는 정윤희보다 비교적 장미희와 자주 만난다는 그녀. 80년대를 주름잡던 두 여배우가 20년이 지나서 한 명은 전업주부로, 한 명은 교수로 각각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수다 떠는 소재가 다양해 좋다고. 1996년 드라마 〈여울〉에 그녀가 출연할 때도 장미희는 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녹화까지 해가며 꼼꼼히 모니터 해주는 정성까지 보여 경쟁자에서 친구로 변한 우정이 깊다는 것을 보여줬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간간이 도우미로 외도하는 쏠쏠한 재미를 느끼던 그녀가 돌연 연기자로 복귀한 것은 6년 전 드라마 〈여울〉. 똥 기저귀 치우며 뒷바라지하기 바빠 세월 가는 것도 몰랐는데, 어느새 희수와 연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이제 내 일을 가져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하는 두 딸이 믿음직스러웠다. 남편 역시 그녀가 자신의 일을 갖겠다는 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엄마가 8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가령 학부모 모임에 나가거나 길거리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엄마가 유명한 배우였구나’를 실감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드라마 〈여울〉 이후 그녀는 다시 전업주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6년이 흐른 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주부 패널리스트로 방송 복귀
연예계 20년간 지각한 적 없어
올 3월 그녀가 다부지게 마음먹고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지난 2월 채식 열풍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기초로 만든 SBS 교양프로그램 〈생방송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 주부 16년차인 그녀에겐 딱 맞는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이윤민 프로듀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인이면서도, 패널리스트로서 시청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출연진을 물색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 8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고, 은퇴 후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유지인 씨를 생각하게 됐다. 16년 동안 살림하면서 주부로서 느낀 솔직한 궁금증 등을 편안하게 잘 풀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 유지인 씨 역시 교양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서 출연 요청을 했다”고 그녀에게 러브 콜을 보낸 이유를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역할은 일반 주부를 대신해 식생활 전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패널리스트. 때로는 진행자가 미처 몰랐던 생활 속 작은 아이디어와 지혜를 양념처럼 곁들여 16년차 주부의 저력을 실감나게 했다.
6년 만에 방송을 재개하는데도 그녀에겐 좀처럼 낯선 기색이 없다. 오히려 다른 출연진보다 일찍 대기실에 도착해 의상과 메이크업을 꼼꼼히 체크한 뒤 대본도 세심하게 챙긴다. 다른 출연진이 대기실에 들어오면 먼저 인사를 건네며 웃으며 맞이한다. 타인에 대해 배려해주는 태도는 20년 전 이미 영화계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뿐 아니다. 20년 연예계 생활 동안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먼지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부지런한 생활은 전업주부로 살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편보다 먼저 깨어나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곱게 화장까지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그녀. 결혼생활을 시작
한 뒤로 아직 한 번도 그 규칙을 깬 적이 없는 그녀. 그녀의 철저한 자기 관리는 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남을 돕진 못할 망정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란 그녀도 자신으로 인해 촬영이 늦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특히 〈생방송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생방송이라 자칫 잘못하면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는 생각에서 더욱 조심스럽다.
방청객 끼니 거를까 염려해
나는 은막 스타보다 전업주부가 좋다
생방송은 실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긴장감이 스튜디오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방송 시작 5분 전. 그녀는 생전 처음 본다는 듯이 광고를 쳐다보기도 하고, 출연진과 수다를 떠는 등(1부 반상회는 대기실에서, 2부 반상회는 막간 스튜디오에서 계속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긴장감을 요리한다.
방송 1분 전, 돌연 그녀가 방청객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아침밥 먹고 왔어요?”
“아-뇨.”
“아침밥 안 먹고 다니면 감기에 걸릴 확률이 많대요. 요즘 감기는 약도 안 듣는데…. 아침 꼭 먹고 다니세요.”
엄마가 아침밥을 거르는 딸을 타이르듯 방청객들의 건강까지 염려하는 그녀, 그녀에게선 진한 화장품 냄새 대신 엄마의 향기가 풍겨나왔다.
연예계의 러브 콜을 한사코 고사하며 전업주부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왕년의 스타’유지인. 작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를 ‘유지인 영화주간’으로 지정, 그녀가 출연한 영화 다섯 편을 매일 한 차례씩 상영했다. 아직도 그녀가 은막에서 은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예전의 잘나가던 그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바람인지 시사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왕년의 은막 스타’라는 말보다 ‘전업주부’라는 단어에 거는 자부심이 더 크다. 영화배우라는 직업과 대중의 인기를 포기한 대신 그녀가 선택한 전업주부라는 직함과 가족의 사랑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밥상을 준비하는 일, 사랑하는 남편과 딸들을 위해 식탁 위에 오른 반찬의 영양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엄마, 아내, 며느리인 유지인. 영원한 은막의 스타인 그녀는 대한민국 공식 지정 전업주부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