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권역별 명소-경주 시내권
寺寺長星-塔塔雁行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
이 말은 천 년 고도 신라를 가장 잘 표현한 말 중의 하나로서
신라시대 때의 경주는 그만큼 번화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반달 같은 궁궐, 대규모의 저택과 절들 그리고 엄청난 위용의 고분까지…,
그 화려하고 찬란했던 신라를 상상하며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는 것,
분명히 경주에서만 가질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정과 오릉에서의 박혁거세, 반월성의 석탈해, 계림의 김알지처럼
신화나 설화와 얽힌 장소가 셀 수 없이 많은 것도 천년 고도 경주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고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의 삶과 문화가 공존하는 경주는
천 년 고도 신라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이며,
신라 천 년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점이자 출발점이다.
< 굴불사 지석불상 > | |
굴불사지석불상
주소 : 동천동 산 4
-소금강산 기슭 백률사 바로 아래쪽에 있다.
절은 35대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절터에
불상만이 남아 있다.
꽤 큼직한 자연 암석의 사방에 조각된 불상은 그 독특한
모습으로 시선을 끈다. 이처럼 사면에 조각된 불상을
‘사면불’이라고 하는데,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방정토를 상징한다.
동쪽에는 약사여래,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 남쪽에는 석가
삼존불, 북쪽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미륵불과 얼굴이
열 하나, 팔이 여섯 달린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불상이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는데,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을 시켜 땅을 파 보았더니 큰 돌의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짓고 이름을 "굴불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구황동 313
이 불상은 보광전(寶光殿)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盒)의 뚜껑 안쪽
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
九年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英祖) 50년(177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
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다. 대좌(臺座)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황남리고분군)
황남동 6-1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
무덤(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
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교동 최씨고택 : 교동 69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에 자리한 고택, 경주 사는
사람치고 이 "최 부잣집" 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본래는 원효대사와 정을 나눠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터였다고 한다.
최씨 집안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 10대
300년 동안 만석꾼이었을 정도로 부유했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했으니,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명문가이다. 그뿐인가!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말도
이 집과는 인연이 없는 듯.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온
가훈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를 거론할 때마다 모범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원래 99칸 집에 대지만도 약
6천 6백㎡, 후원은 약 3만 3천㎡에 달했다고 전해
지는데, 지금은 ㅁ자 안채와 대문채, 사당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70년 화재 이후 원형 복원이 미루어져
오다 최근 복원되었다. 이곳에서 빚은 교동법주는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씨고택의 바로 옆은 최
부잣집의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요석궁"이라는 전통
한식집이 있다. 이 자리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의 궁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 미추왕릉 (舊 신라미추왕릉)
황남동 89-2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
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높이 12.4m, 지름 56.7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陵)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 |
경주김호장군고택
탑동 633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부산첨사
김호가 살았던 집이다. 신라 때는 절터였다고 하며, 현재 가옥은 17세기
전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에 문짝을 단 모습이 이채롭다.
신라왕경숲
숲머리길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숲이 어우러진 도심공원으로 숲머리길
(보문단지로 가는 길 우측) 입구부터 강산면옥까지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 및 화장실, 휴식공원과 실개천을 만들어 시민과
관광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노서리고분군)
노서동 112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마을은 노동동, 길 서쪽마을은
노서동이 되었다. 길 좌우에 작은 산만큼이나 큰 무덤들이
잇대어 있다. 노서동쪽에 있는 것이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쌍상총, 은령총, 천마총 등을 비롯한 14기의 고분
이다. 노서리고분군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금관총이다.
< 금관총 :보물 제 339호>
봉분 없이 50cm 정도 높이의 평평한 잔디밭으로 덮인
쌍봉이 서봉총이다. 금관이 나와 주목을 받은 고분들이다.
특히 금관총은 1921년 신라 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되어 그렇게 이름 지어졌으며, 경주의 고분 발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주의 왕릉은 그 자체가 역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굴한 경위 또한 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 1926년에는 금관총에 바싹 붙어 있는 무덤을 발굴했는데,
이곳에서도 금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일제는 금관의 발굴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아돌프가 신혼여행으로 일본을 여행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금관을 굴출(掘出)해내도록
안내하였던 것이다.
"서봉총"이라는 이름도 이와 같은 사연에서 연유한다.
스웨덴의 한문 표기인 "서전(瑞典, 스웨덴)서 "서"자를
따고 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 장식이 붙어있다는
점에서 "봉 "자를 따온 것. 서봉총 앞에는 이와 같은
인연을 담은 "서전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서봉총
발굴기념비" 가 있다. 호우총은 1946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
이라는 점과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기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고분이다.
그 고구려왕은 바로 광개토대왕. "광개토지호태왕
호우"라는 글씨가 새져진 그릇의 발굴로, 당시 신라가
고구려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유물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뚜껑 달린 청동합이다. 금관 신라의 관(冠)은 재질에 따라 금관, 금동관, 은관, 동관
으로 나뉘어지며, 은관은 초기에, 동관은 말기까지 일부
보이나 전형적인 신라관은 역시 금관과 금동관이다. 신라의 금관은 모두 6점이며, 금관에 표현되어 있는 나뭇
가지 모양과 사슴뿔모양의 장식들은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체로서의 나무와 사슴을 상징화한 것이다. 금관에는 또 태아를 상징하는 곱은옥과 열매를 상징하는
달개가 달려 있어 매우 화려하다.
관모와 관식 관모(冠帽)와 관식(冠飾)은 금관과 함께 착용자의
사회적인 지위, 즉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신구로서
금제품은 왕에 한정하여 소유했던 것 같다. 관모는 일반적으로 고깔 모양이지만 예외적으로 위가
각진 것도 있다. 관식은 새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날고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금귀걸이 신라고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다량의 귀걸이가 출토되었
는데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신라의 귀걸이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며, 신라
인들의 미적 감각과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을 잘 보여준다.
능·원·묘·총·분 "능" 은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히 밝혀진 경우, 특히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 은 세자나 세자비 또는
왕의 부모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의 무덤을 말하며, "총"은 무덤의 주인을 모르는 경우(외형상의 특징이나 발굴
유물을 보고 이름을 짓는다)의 무덤을 말한다, "묘"는 기타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을 말하며, "분" 은 누구의 무덤
인지도 모르고 발굴 유물도 없을 때 붙이는 무덤의 이름이다. | |
경주 대릉원 일원(舊 황남동고분군)
첨성로 140 (황남동)
황남동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잘 알려져 있는 않은
곳으로 대릉원옆, 황남초등학교 앞에 위치해 있다.
다섯그루의 메타세콰이어가 사철 멋진 자태를
보여 주는 곳으로 사진애호가들의 발길을 사로
잡는 숨은 명소이다.
특이하게 서 있는 메타세콰이어, 연꽃 연못,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나무 한그루. 모두 사진의
소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노동리고분군)
노동동 261
경주를 가장 독특하게 만드는 풍경 중의 하나가
고분군이다. 대표적인 고분군이 대릉원인데, 이곳이 미용실
에서 한껏 모양을 낸 도시 처녀 같은 느낌이라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는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은 수더분한 시골 처자 같다. 집채보다 더 큰 천년
전 고분이 21세기 생생한 삶과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편안하면서도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동동에는 금방울이 출토된 금령총, 화려한 금동제 신발이
출토된 식리총, 그리고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가 있다. 봉황대는 높이가 빌딩 7층 높이인 23m에 둘레가 250m나 된다.
봉황대는 고분이라기보다 동산에 가까운 느낌, 봉토 위에
고목 몇 그루가 자란다. 1970년대 정부에서 고분을 정비
할 때, 고분들 사이의 집은 허물고, 고분 위에 자란 나무
들은 캐내고 무너진 곳은 쌓은 뒤 잔디를 씌웠으나,
봉황대는 나무가 자란 채로 그대로 두었다.
마치 자연이 만든 분재같다.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봉황대의 이와 같은 인상적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온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황남리고분군)
황남동 6-1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
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舊 임해전지,안압지)
인왕동 26-1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674년 궁 안에 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세 개의 산을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고 갖가지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궁 안의 못"이라고만 기록되었다.
1980년대 "월지" 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
되었으니, 본래 이름은 "월지 "였을 것이고, "안압지"는
신라 멸망 이후 본래 모습을 잃은 못가에 오리와 기러기
만 날아다니자 이를 본 시인 묵객들이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이 곳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만
무려 3만여 점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 하나가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만 채워진 것을 보더라도,
단일 유적지인 안압지에서 얼마나 대량으로 유물이
출토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뿐인가. 출토된 유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라 왕실이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는지도 알 수 있다.
연못의 서남쪽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 자리인데, 문무왕
19년(679)에 이 궁을 완성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해전은
동궁의 정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압지 유적
으로 미루어 당시 신라 왕실이 통일된 신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울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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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을 경주한방 병원 :탑동 46-1
남산 기슭 오릉 옆에 위치한 초대형 한옥,
첫눈에 들어오는 외관부터가 병원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깬다. "대한민국 보건 관광 제1호 지정
병원" . 한방 치료와 유적지 답사를 겸한 헬스 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자연 속에
몸을 맡기는 느낌으로 쉬어가자.
건강을 챙기는 내외국인에게 색다른 "헬스 투어"
코스가 될 것이 틀림없다. | |
국립경주박물관 : 인왕동 76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유물과 유적이
넘쳐나는 곳이다. 치밀한 계획이 없거나, 어지간히 발품을 팔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억하기도 힘들다. 신라의 알짜배기 유물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국립경주
박물관은 경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정보를 쉽고도
가치있게 알려주는 좋은 가이드이다. 경주의 매력을 한눈에 알아차리거나 경주를 이해하는
큰틀을 마련하려는 이에게는 필수 방문 코스. 관람할 곳은
상설 전시관 세 곳(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과 특별
전시관, 야외 전시관이다. 고고관은 말 그대로 신라 초기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 선사.원삼국실, 천마총.황남대총 등
에서 출토된 유물을 위주로 전시해놓은 신라실1, 2가 있다.
신라1실에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하여 금의
나라 신라를 느낄 수 있는 각종 금속 공예와 기마인물상이
있고, 신라2실에서는 다양한 표정의 토우를 만날 수
있다. 미술관은 임신서기석 등의 금석문, 신라왕경도 등을
볼 수 있는 역사자료실과 각종 불교 조각품을 볼 수 있는
조각실1, 2가 있다. 금속공예실도 따로 마련돼 있으며,
황룡사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전시해놓은 황룡사실도
꼭 들러야 할 코스이다. 안압지관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여 점의 유물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선별해
전시해놓았다. 통일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실생활용품들이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곳이 박물관 뜰이다. 경주 곳곳에서 가져온 석탑, 석불,석등, 비석받침 등 불교
관련 석조 유물을 모아 놓았다. 말 그대로 야외 전시관인
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성덕대왕
신종도 야외 전시관에 있다. 1954년에는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교육.체험위주의 어린이박물관이
개관됐다.
백률사대웅전 : 동천동 406-1
법흥왕은 불교를 구심점으로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여간 거센 것이
아니었다. 이에 이차돈이 나서서 “비상한 사람이
있고서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하며 자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의 반대를 잠재우도록 왕께 청하였다.
이에 왕이 부득이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는데, 피 대신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천지가 침침해졌으며 땅이
진동하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감히 불교의 전파를 반대하지 못하였고,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로 솟구쳤던 이차돈의 목이 소금강산의
중턱에 떨어졌고, 법흥왕은 이차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소금강산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처럼 백률사는 신라
불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 하지만 명성에 비해 경내는 퍽이나 조용한 편이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신라 41대 헌덕왕 9년
(817)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는 독특한 기념물이 세워
졌으니, 그것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차돈
순교비"이다. 가슴을 펴고 엉덩이를 쑥 빼어 구부정한
자세로 당당히 칼을 받는 신체, 그 몸에서 솟아오르는
젖빛 피, 그리고 그 옆에는 관을 쓴 채로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다 꽃으로 떨어지고 땅이
진동하는 모습인데, 이차돈 순교의 광경을 어찌 그리 생생
하게 전하는지. 작고 조용한 절이지만, 소금강산 정상에
올라서면 경주 시내로 시야가 트여 시원한 눈맛을 느낄
수 있다. 이차돈의 흰 피가 의미하는 것은? 연꽃은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지닌다 하여 불교에서는 극락을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연꽃의 줄기를 꺾으면 줄기에서 하얀 수액이 나온다.
이차돈의 흰 피는 이차돈을 연꽃에 비유하여 그 신성함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경주 월성 : 인왕동 387-1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 21년에 궁을 만들어
"금성 " 이라 불렀으며,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경주 월성에는 아무런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숲이 우거지고 텅 빈 뜰에 잔디가 깔려 있을 뿐이다.
예전의 금성이나 만월성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는 안압지와 더불어 월성
일대는 신라의 궁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경주 월성은 ‘반월성’이라고도 하는데, 반달 모양으로
구릉을 깎아 흙과 돌을 섞어가며 궁의 주위를 감싸 안도록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망한 뒤로 궁을 보호하는 기능이 약해지면서
자연적으로 무너져내리고, 없어진 것을 수리하거나
보존하지 않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성문터와 성벽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인공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조선 영조(1738)때
만든 석빙고 시설이 남아 있다.
왕성 터라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사이에 길쭉하고 도톰하게 솟아오른 언덕이나
산책하고 뛰어놀기에 썩 좋은 풀밭 유원지 쯤으로
기억하기 십상이다. 월성 북쪽 자락에는 벚나무, 월성과
첨성대 사이에는 유채꽃밭이 조성되어, 제철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경주월성은 경주 월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2011. 7.) | |
안압지 주변 연꽃단지
인왕동 26-1
안압지 주변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수면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연못이 있는데 가족과 연인끼리 정다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 군자를 뜻하며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 청결하고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하여
예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
김유신장군동상 : 황성동 황성공원 일원
황성동 황성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16m의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였고,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쳤다.
문무왕 때에는 태대각간이라는 관작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능은 밑둘레가 50m, 지름이 18m, 높이는 5.3m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경주 탈해왕릉(舊 신라탈해왕릉) : 동천동 산 17
2대 남해왕의 사위로 4대 왕에 오른 탈해왕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신라에서 석씨 성을 가진 여덟 왕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은 탈해왕릉 뿐이다.
용성국 왕과 적녀국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알이 궤짝
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졌는데, 아진포에서 한 노파가
발견하여 길렀더니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한다. 한편 신라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7일 동안 서라벌을 관찰하여 반월
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였다. 그곳이 살기 좋다고 여겨
내려왔지만,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집을 차지해버렸다.
이 과정을 눈여겨본 남해왕이 지혜롭다 하여 탈해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숭신전 : 동천동 350-7
신라의 왕은 박씨 아니면 석씨, 김씨이다.
이들 세 성씨의 첫 왕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 각각
"숭덕전(박혁거세, 경주 오릉 내)" , "숭신전(석탈해,
탈해왕릉 옆)" , "숭혜전(미추왕, 대릉원 내)"이다.
해마다 춘분과 추분에 이들 세 곳에서 동시에 향사가
봉행된다.
숭신전은 신라 4대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1898년 월성 안에 지었으나, 1980년 월성정비사업
계획으로 월성 안의 민가들이 철거됨에 따라
탈해왕릉의 옆인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숭혜전 : 황남동 216
숭혜전(崇惠殿) 건물내에는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대 문무대
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처음 월성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제향했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인조 5년
(1627) 동천동에 새로 사당을 지어 동천묘라 하고
경순왕의 위패를 모셨다. 경종 3년(1723) 경순왕전으로
고치고 정조 18년(1794)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황남전
이라 고쳤다. 그 후 고종 24년(1887)에 미추왕의 위패를
모시고, 이듬해 문무대왕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이때 고종황제가 사당을 크게 짓게 하고 숭혜전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앞면 5칸, 옆면 3칸인 맞배집으로 왼쪽에 영육재
(永育齋), 오른쪽에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앞에는 경순왕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길 건너에
계림세묘가 있다. | |
성덕대왕신종 : 국립경주박물관
한국근대의 巨鐘(거종)으로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
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鐘身(종신) 상하에는 肩帶
(견대)와 口帶(구대)를 두고 각각 寶相唐草紋
(보상당초문)을 彫飾(조식)하고, 鐘口(종구)는 八稜形
(팔능형)을 이루어 각 稜(능)따라 연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頂部(정부)에는 龍(용)유와 音筒(음통)이
있어 한국종의 특색을 갖추고 있으며, 견대 밑은 乳廓
(유곽)이 네 곳에 놓이고 연화로 陽鑄(양주)된 九乳
(구유)가 있다. 종신에는 공간을 두고 撞座(당좌)와
二軀(이구)씩 맞대고 있는 四軀(사구)의 飛天(비천)
이, 그리고 一千餘字(일천여자)의 장문을 양주한 종명이
양각되어 있다. 종명에는 신라경덕왕이 父王(부왕)
성덕왕을 위하여 銅(동)12만斤(근)을 들여 鑄成(주성)
하려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심에 다음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同王(동왕) 7년(서기 771년)
에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경주오르골 소리박물관 : 율동 64-4번지
경주 오르골 소리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오르골을 테마로한
박물관으로써 근대 소리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귀로 경청하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체험박물관입니다.
또한 오르골 뿐만 아니라 100여년전의 세계 최대급 댄스
오르간(800여개의 파이프와 27개의 악기가 이루는
환성적 화음)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에디슨의 대표적 발명품인 축음기 등 160여점의
전시품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경주 내물왕릉, 경주 계림, 경주 월성지대
인왕동 450번지 외
신라 17대 왕인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은
약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경주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또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장소로도
전해지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계림은 ‘시림’이었지만 김알지가 태어난 뒤
계림으로 바꾸었고, 나라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숲속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계림의 전설이
적힌 비석과 비각이 있다. 무덤의 남쪽으로는 모양이
반달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 있다.
이는 신라시대의 도성으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사적 제16호로 지정
되었다.이 지대는 신라 왕궁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편안하고 조용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다.
숭덕전 : 탑동 77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世宗) 11년
(1429)에 지었으나 선조(宣祖) 25년(1592)에 불탔다.
동왕(同王)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肅宗) 30년(1704)에 고쳤다. 경종(景宗) 3년(1723)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英祖)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 안쪽으로 영숭문(永崇門)과 숙경문
(肅敬門)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象賢齋), 오른쪽에 동재(東齋)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
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 |
천마총 : 황남동 53
천마총은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라 부른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모양 관식, 금허리띠, 금동
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소금강산 : 용강동
경주 벌판에 야트막하게 솟은 산이 소금강산(178m)
이다. 경주의 남쪽에는 남산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고,
서쪽에는 선도산과 송화산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명활산과 토함산이 있다. 신라의 북쪽을 지킨다 하여
"북악"이라고도 불렸다. 사로국의 여섯 마을 중 양산촌의
촌장이며 시조인 알평공과 고야촌의 촌장이며 설씨의
시조인 호진공이 모두 소금강 품 안에서 탄생했으며, 불교
공인을 위해 죽음을 택한 이차돈의 목이 소금강에 떨어진
이후로는 불교의 성지로 높이 받들어졌다.
경주 오릉(舊 신라오릉) : 탑동 67-1
크기도 간격도 일정치 않게 그야말로 오순도순 마주 누운
고분 다섯 기. 박혁거세와 부인 알영, 2대 남해,
3대 유리, 5대 파사가 묻혔다고 전해진다.
만약 사실이라면 신라의 초기 임금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셈이다. 경주 오릉에 대한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다섯 ]
기의 능이 아니라 박혁거세의 능이라고 전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
갔는데, 17일 만에 유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이를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다섯 동강 난 왕의 유해를 각각 장사지내고 고분의 이름을
"사릉(蛇陵) " 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서남산의 왕릉은 전부 박씨!> 남산의 서남쪽에는 경주 오릉과 삼릉을 비롯하여 모두
여섯 곳에 신라 왕릉이 있다. 그런데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왕의 능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56명의 신라 왕 가운데
박씨 성을 가진 왕은 모두 10명이다. 1대 박혁거세(부인 알영)와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
아달라의 원손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그들이다.
<박혁거세 탄생 이야기> 지금부터 2,100여 년 전 경주 평야 일대에 각각 촌장이
다스리는 여섯 고을이 있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나정을 비추고 샘 옆에 흰 말 한 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말은 달아나고,
그 자리에 자줏빛 알 하나가 있었다. 알 속에서 용모 단정한 아이가 태어났으며, 유달리
총명하게 자란 아이는 13살 되던 해, 여섯 고을의 촌장
들이 의견을 모아 한 나라로 합치고 그 아이를 왕으로 추대
하였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 "로 하여 신라 최초의
왕이 되었다.
장군교 : 성건동
위치 : 흥무초등학교에서 강변도로 서쪽으로 위치함
(터미널에서 동국대학방향 강변도로) 장군교는 교량길이 390m, 폭 4m의 야간경관조명은
상판 및 교각조명은 고정식, 상판측면 조명은 여러 가지의
색상으로 다양하게 야간에는 볼 수 없는 교량을 빛으로
장식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색상을 연출하고장군교는
경주시가지의 사적지 경관조명과 더불어 경주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야간 볼거리를 제공하고,
경주관광지로서 새로운 야간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
경주 첨성대 : 인왕동 839-1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어떤 용도로 건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 아니라 천문대를 상징하는
기념탑이 아니었나 추정하기도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건축물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첨성대의 용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첨성대의 구조 자체가 매우
과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첨성대를 이룬 돌 하나
하나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를 주목해 본다.
기단과 상층부를 제외한 27계단을 쌓은 돌의 개수는
모두 361개 반(전체 401개)이다. 이는 1년의 날짜
수와 같다. 둥글게 쌓은 몸통은 27단이고 그 위에 쌓은
우물 정자 모양의 돌까지 합치면 28단이다.
27이라는 수는 첨성대를 건축한 선덕여왕과 관계
(선덕여왕이 27대 신라왕)가 있고, 28이라는 숫자는
동양의 기본 별자리 28수 또는 불교의 28천을 상징한다.
가운데 나 있는 창문을 기준으로 위, 아래 12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하며, 첨성대 꼭대기 우물 정자
모양의 돌은 각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리킨다. 또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사라져 춘하추동을 정확히
나눌 수 있게 한다. 선덕여왕(632~647) 시기에
쌓았으니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사각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견이 있기는 해도, 신라인이 천체, 기상 관측에
대한 의미있는 연구를 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늘, 해, 달과의 관련성 때문일까? 달빛
아래에서의 첨성대는 더욱 감동적이다.
첨성대의 전체 높이는 9.108m이다.
경주 계림 : 교동 1
" 숲으로 가보니 그곳엔 금빛으로 빛나는 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엔 흰닭이 울고 있었다."
전설 때문일까?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자리잡은
울창한 숲은 신비감이 더욱 짙다.
탈해왕이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숲으로 사람을 보내니
그 금빛 궤짝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총명함을 더했고, 이름은
"알지",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이라
성씨를 붙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받지 않았으며, 김알지의 육대손에
와서 김씨가 왕이 된다.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찾아낸
설화를 따라 숲 이름도 계림이다. 계림 안에 있는
고분은 신라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로 김씨에 의해 세습이 유지되었다. 왕의 칭호로
" 마립간" 을 썼다. ※ 경주계림은 경주 계림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2011. 7.)
형산강 : 서면 도리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동해의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강.
길이 62㎞. 유역면적 1167㎢, 남한에서 동해로
흐르는 강 가운데 가장 길고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도 가장 넓다.
북쪽 연장선을 따라 복동쪽으로 흐르다가 경주시
부근에서 지류인 건천(乾川)•남천(南川) 등을
합류하여 경주평야를 형성한다.
계속 흘러 경주시 안강읍 부근에서 기계천과
합류하며 안강평야를 만든다.
여기서 유로를 동북동으로 바꾸어 형산제산지협을
지나 영일만내에 삼각주성 충적평야인 포항평야를
형성하고 바다로 유입된다.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강과 형산강의 지류인 남천,
그리고 경주시 이하의 형산강 본류를 따라 형성된
저지대를 형산강지구대라고 부르지만 아직 확실한
단층구조가 보고되지 않고 있다.
강 유역에 경주, 하구에 포항종합제철이 있고 동해남
부선철도가 뻗어 있다. | |
구미산 : 현곡면
구미산은 경주시 북서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높이
594m의 산이다. 산 기슭에는 동학의 발상지이자
천도교의 성지인 용담정이 있다. 용담정은 천도교 제1대
교조인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천명한 곳이며, 인근에는
최제우 생가터와 유허비, 태묘 등이 있다. 등산객도 적지 않은데 등산로는 대체로 쉬우며 정상에
오르면 경주 시가지를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다. *구미산 등산로 1. 용담정 주차장→바위 전망대→구미산→용담정
2. 용담정 주차장→바위 전망대→구미산→산불감시
초소→인내산→마채마을
최시형동상 : 황성동 황성공원 내
황성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m의 최시형
동상이다. 동학은 '인내천'이라는 인간 절대존엄의 기본
정신을 주장하여 19세기 말 핍박과 수탈에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은 종교로, 최시형은 최제우에
이은 동학 제 2대 교주이다. 182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년) 6월 동학에
입교했다. 1864년(고종 1) 당국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된 후 은신 생활을 하며 안동, 울진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984년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고, 1898년 2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분황사 : 구황동 313
좁은 경내에 석탑, 신라시대의 우물, 비석받침돌밖에
없지만,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 에 세운 신라
명찰 중 하나이다. 자장과 원효가 거쳐간 절로도
유명하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며,
경덕왕 때는 ‘희명’이라는 다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의 그림도 유명했다고 한다. 경내에서 눈길을 우선 사로잡는 볼거리 중 하나는 독특한
느낌의 석탑이다. 돌을 벽돌처럼 잘라 만들었는데, 벽돌
같은 느낌이 나므로 ‘모전 석탑’이라고도 한다. 신라인이 만든 탑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탑이다. 건축 당시에는 9층이었다고 하나
정확히 몇층이었는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단지 3층만
남아 있다. <동경잡기>에는 “분황사구층석탑이
신라 삼보 중의 하나”라고 기록했다. 현재의 모습이 원형은 아닐 터이다. 일제 때 수리하면서
원형을 보존하지 못한 채 마무리한 결과이다. 그때 제자리를 찾지 못한 전돌 들이 여전히 경내 한쪽에
쌓여 있다. "삼룡변어정 " 이라는 우물은 신라시대
때부터 사용해왔다고 한다. 우물 한 켠에는 이 절에 주석하였던 신라의 고승 원효를
기리기 위해 고려 때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한 뒤 "차화정국사지비부
(此和靜國師之碑趺)" 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분황사 출토 유물>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자장과
원효 스님이 계셨던 매우 큰 절이었다. 분황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를 조사한 결과, 분황사는 1탑 3금당의
품(品) 자형 가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품(品) 자형 가람 배치는 신라 문화권에서는 처음
밝혀진 것이다. 분황사 뒷담에서 출토된 머리 없는
불상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으며, 그 밖의
출토 유물은 대부분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 종류로서 1,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경주 향교 : 교동 17-1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신라시대의 교육
기관이 ‘국학’이다. 국학은 신문왕 2년(682)에
세워졌는데, 지금의 경주향교 자리가 바로 국학이
있던 자리다. 고려 때에는 향학으로, 조선에는 향교로
이어졌으니, 배움터로서 이만한 전통을 갖기가 쉽지는
않겠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나주향교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 |
분황사 석정 : 구황동 313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
(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년(795)에 당(唐)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경주 표암 : 동천동 507-7 외 49필지
신라는 본래 서라벌에 있던 여섯 고을이 연합한 사로국
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들 여섯 고을 중 하나인 양산촌의
촌장이 경주 이씨 시조 알평공이며, 알평공이 태어난 곳이
바로 표암이다. 알평공의 탄생과 관련한 표암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한 할머니가 이곳 바위에 박을 심었는데,
유독 차돌처럼 단단한 박이 열렸다. 박을 켜보니 아이가
나왔고, 이 아이가 바로 경주 이씨 시조 알평공이었다.
이후부터 이 바위를 ‘표암(박바위)’이라 불렀다. 기원전 69년에 여섯 촌장이 모여 이곳에서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다고도 한다. 표암 주변에 표암재와 유허비각 등이 있고, 표암재
내에는 경주 이씨 후손이 세운 경모비가 있다.
황성공원 : 황성동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계절마다
아름다운 숲이다. 현재 면적은 약 102만 4천㎡, 넓고도 울창한 소나무
숲은 신라시대 때 북쪽이 허하다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독산에서 유래된다. 신라 당시에는 왕들의 사냥터로, 지금은 도서관,
시민운동장, 실내체육관, 씨름장, 국궁장, 게이트볼장,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연습장, 산책로 등과 함께
경주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 |
천마총 관모 : 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은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이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등 많은 귀중품들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금모는 천마총의 널(관) 바깥쪽에 있던 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16㎝,
너비 19㎝의 신라 때 모자이다. 얇은 금판을 결합
시켜 만든 형태로 1978년 12월 7일,
국보 제 189호로 지정되었다.
대릉원 : 황남동 53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 그 너른 땅
위에 신라시대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23기의 고분이
자리잡고 있다. 남아 있는 고분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 위주로 공원화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출토된 무덤자리와 껴묻거리들이 공개된
천마총은 신라시대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다.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부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황남대총 등이 대릉원의 대표 고분이다.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연들,
그 무덤과 무덤 사이를 오가며 마주하는 풍경들이 편안
하고 고즈넉하여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만족감을
준다. 1970년대에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
(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
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
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모두 1만 5,000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고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발굴 유물이 많으며, 특히
하늘을 날아오르는 백마를 그려놓은(천마도) 다래가
유명하다. 최근에는 "말 " 이 아니라 "기린 "을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신라시대의 그림으로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다래는 말 옆구리에 진흙 같은 것이 튀지 않도록 달아
매는 장치이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능이 붙어 있는
독특한 외형이다. 북쪽의 능이 여자, 남쪽 능이 남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 길이가 80m, 남북 길이가
120m, 높이가 23m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1973년 7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발굴되었는데,
고분 발굴에 동원된 연인원수가 3만 2,800명이었다고
한다. 북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무기, 토기류
가 3만 5,000여 점, 남분에서는 무기가 대부분인 2만
2,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특히 주목할 만한
유물은 유리잔. 지금이야 유리 제품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을 터이다.
이들은 서역을 통해 신라에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 |
천마총금관 : 국립경주박물관
전형적인 신라금관으로 발굴조사 당시 시신의 머리에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의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경주 석빙고 : 인왕동 449-1
이 석빙고는 조선 영조(英祖) 14년(1738) 월성(月城)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이다.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석실[돌방]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
었다가 3년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현재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가 있다.
갤러리나우 : 노서동53 2F(봉황로 문화의 거리)
나우 갤러리는 경주시에서 80억의 예산 투입하여 조성
하는 봉황로 문화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년고도
경주 문화의 거리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사설 갤러리로서 경주시민들에게 예술문화 욕구충족은 물론 미술문화
저변확대에 도움이 되고자 설립하였다. 매주 토요일
어린이를 위한 세계명화감상과 미술무료 강좌 및 일반
인을 위한 유화 및 누드 드로잉 강좌를 동국대 교수 등 외래
강사를 초빙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일반인을 위한 미술의 이해, 세계 미술시장의
흐름과 신진작가를 발굴하여 국제아트페어에 참여와
더불어 유명한 미술관과 국립미술관 탐방을 통하여
미술 애호가의 저변 확대에 노력할 것입니다. | |
유랑아제-펴뮤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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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젠 경주 사람으로써 경주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고 계시네요
천년고도의 경주라써 가보고 싶은곳이 너무 많은데 영 시간이 잘
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