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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사신도와 주작, 그리고 현무
고구려의 사신도와 주작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은 지금까지 8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분포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강서군(江西郡), 대동군(大同郡), 중화군(中和郡) 등지의 평양지방과 길림성 집안현의 통구지방이다. 이러한 고분들이 거의 대부분 수도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이루어져 고구려에서 가장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적석총(積石塚)과는 다른 형식이며 그 위치나 규모, 벽화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의 묘로 생각된다. 이러한 벽화고분은 낙랑, 요동 등지에 남아 있던 한대(漢代)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아 4세기 경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변천에 따라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개 초기(4∼5세기), 중기(5∼6세기), 후기(6∼7세기)로 크게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벽화는 큰 벽돌처럼 다듬어진 돌들을 쌓아서 만든 석실의 내부 벽면에 회칠을 한 후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려진 것이 보편적이나, 벽돌 모양의 돌 대신에 넓적한 대형의 판석을 짜 맞춘 벽면에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표현한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묘실의 벽면과 천정에 모두 그리는 것이 상례였는데 대체로 초기와 중기의 경우 벽면에는 무덤의 주인공 초상화 및 주인공과 관계가 깊었던 현실세계의 일들을 기록적,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인물풍속이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무덤을 지켜 주는 사신(四神)을 그려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정에는 죽은 묘주의 영혼이 향하게 되는 내세, 즉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일월성신(日月星辰)․신선(神仙)․신수(神獸)․서조(瑞鳥)․영초(靈草)․비운(飛雲) 등을 그려 넣어 하늘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무덤의 내부는 현실을 나타낸 벽면과 내세 혹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천정이 어우러져 일종의 소우주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안악 3호분의 예에서 확인되듯이 아무리 늦어도 서기 357년부터는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며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믿어진다. 무덤의 벽면에 벽화를 그려 넣는 이러한 풍조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벽화를 그렸던 이유는 아마도 현세에서서의 권세와 부귀영화가 내세에서도 계속된다고 믿었던 계세사상(繼世思想)과 관계가 깊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벽화의 내용이나 주제 면에서 그 시대적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초기에는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고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초상화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조금 시대가 흐르면 약수리 벽화고분, 쌍영총이나, 각저총 등의 예들에서 보이듯 부부병좌상(夫婦竝坐像)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상화와 더불어 초기나 중기의 벽화들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과 관계가 깊은 인물풍속이다. 주인공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벽화들은 따라서 서사적, 기록적, 풍속화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유명한 무용총의 벽화는 이러한 유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물풍속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사신(四神)이다.
사신은 천정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차차 벽면으로 내려오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벽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초, 중기에 지배적이던 불교의 영향이 감소하고 그 대신 도교가 득세하기 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전권을 휘두르던 보장왕(재위, 642∼668) 때에 국가적 차원에서 도교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시대적 풍조가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사신도가 벽면 전체에 표현되는 것은 초, 중기의 불교 강세적 경향이 후기의 도교 득세의 풍조로 종교적 측면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한다.
어쨌든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 면에서 ‘인물풍속→인물풍속과 사신→사신’으로 변화했음이 확인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행렬도나 수렵도가 5세기 이후에는 사라지게 된 점도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신들에 의거하여 보면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나 내용면에서 점차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단순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법이나 화풍은 초기의 고졸한 것으로부터 점차 세련되고 능숙한 것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이와 함께 힘차고 동적이며 긴장감이 감도는 고구려적인 특성도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채색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총괄하여 보면, 한대(漢代)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는 중국문화 및 서역문화와의 교류가 엿보이고 아울러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 미친 영향도 확인된다.
고구려 전기의 사신도와 주작
고구려 전기의 고분벽화에는 사신도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데, 한대(漢代) 사신도의 형태를 빌어다 그것을 수용했던 단계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몸체의 비례가 전혀 맞지 않은 점, 동물이 지니고 있는 부피나 깊이감이 고려되지 않은 점, 철묘선법(鐵線描法, 굵기가 균일한 약간 딱딱한 선)으로 그려진 매우 딱딱하고 긴장된 필선 등은 이 시기의 사신도가 아직도 상징적인 동물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전기 사신도는 대부분 현실(玄室)의 벽면을 기둥을 그려 넣어 나눈 뒤 그 상단에 주로 표현되는데, 기둥 아래에 그려진 주제 그림에 비해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었다.
또한 회칠한 벽면 위에 검은 선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으며, 갈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색이 그다지 선명하지 못하다. 약수리고분, 대안리 1호분, 매산리사신총, 삼실총 등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사신이 이러한 전기 사신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고분벽화들 중에서 약수리 고분에 그려진 사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선 북쪽의 현무가 부부병좌상 바로 옆에 그려져 있는 특이한 형식을 이루고 있으나, 나머지 동물들은 모두 단독형태로 표현되었다. 사신은 벽면을 크게 이등분하고 있는 갈색의 기둥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하늘을 상징하는 운문 그리고 별자리 혹은 달과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기둥 아래의 현실 세계에 대비되는 천상의 세계 혹은 사후의 세계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철선묘법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엷은 담채를 표현하여 그렸으나, 동물의 부피감이나 무게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필력이 거칠고 조잡한 편이다.
남쪽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는데, 굵기가 비슷한 선으로 형태를 이루고 주요 부분에 붉은 색의 채색이 가해졌다. 부피감이나 무게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생동감 있는 주작의 모습과는 거리고 있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닭의 모습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단지 하늘로 치솟은 날개라든지 바람개비 모양을 한 머리털의 표현, 그리고 몸통 부분 외에 꼬리 부분에 날개를 표현함으로써 상상속의 동물 주작을 표현하려 한 듯 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매우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중기의 사신도와 주작
중기는 사신도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동물의 모습을 보이는 단계이다. 동물 몸체의 비례가 어느 정도 들어맞아 구도상 안정감을 보이며, 생기 있고 율동적인 형태, 약간의 비수(肥瘦)가 있는 유연한 필선, 세밀한 세부묘사 등 전대에서보다 진전된 회화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벽화 주제에 비해 사신은 여전히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회칠한 벽면 위에 그려진 점 등으로 미루어 전대의 화법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중기에 속하는 사신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통구 무용총의 사신도가 있다. 이것은 삼실총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신도가 천정(天井)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분에서는 구체적으로 현실(玄室, 곧 主室)의 동, 서벽 제 3층 천정 받침에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무용총 사신도에 사용된 필선은 약수리 사신도에서 사용된 철선묘법에서 벗어나 약간의 비수(肥瘦, 균일한 굵기가 아니라 때로는 굵게 때로는 얇게 윤곽선을 그리는 것)가 섞여 있는 것으로서 생기가 돌고 율동미에 넘친다. 이러한 율동미는 고구려적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남쪽 천정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약수리 고분벽화의 주작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회화 표현에 있어서 훨씬 성숙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윤곽선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그 위에다 약간의 채색을 가하여 주작의 형태를 충실히 표현하였고, 신체는 좀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양 날개는 서로 대칭되는 것을 피하여 약간의 변화를 두었고, 몸통 부분에는 털과 근육을 적절하게 묘사하여 사실감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발 역시 단지 선으로 그 형태만을 그려내던 데에서 나아가 땅에 확고하게 딛고 있는 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와 주작
고구려의 사신도 발달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단계가 바로 고구려 후기이다. 절제되고 조화 있는 완벽한 구도, 긴장감에 넘치는 역동적인 형태, 선명한 색채의 배합, 특히 다리 부분에 골절을 그려 넣어 몸체의 유기적인 연결이 실제감 있고 자연스러운 점 등 사신도 표현상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사신도는 종래에 보이던 생활풍속도를 밀어내고 주실(主室)의 주벽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벽화의 주요 화제로 등장한다. 또한 사신도는 회칠을 하지 않고 석면 위에 직접 그려졌으며, 안료의 발달로 인해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구름무늬나 인동문(忍冬文), 수문(樹文), 산악 등으로 화면을 장식하고 그 위에 주제를 설정했으며, 이 모든 것이 한쪽 방향을 향하여 유연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양식을 대표하는 고분으로는 강서대묘와 중묘, 집안 사신총, 그리고 진파리 1호분, 집안 4호분․5회분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속하는 주작도들은 거의 쌍(雙)으로 그려졌는데, 색이나 얼굴묘사로서 자웅(雌雄)을 구분하는 예도 있다.(예, 통구 사신총, 진파리 1호분) 구성 면에서 볼 때 양 날개가 위로 치솟아 보주형(寶珠形)을 이루는 몸체와 알맞게 균형 잡힌 긴 다리는 옆으로만 퍼지던 전대의 주작도에 비해 훨씬 안정된 구도를 하고 있다. 주작들은 양 날개를 펼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산악문이나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다.
이 장에서 후기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회화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통해 고구려 후기 사신도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남쪽 벽에 있는 암수 주작은 두 날개를 원형에 가깝게 활짝 편 자세로 널방 문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부릅뜬 눈과 길게 뻗어 나간 머리 깃, S자꼴을 이룬 목과 몸통, 활짝 편 날개와 반원꼴로 크고 힘있게 말려 올라간 세 갈래 꼬리깃, 위협적으로 쳐든 한쪽 다리 등의 요소들이 거세고 힘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다. 두 주작은 모두 부리에 화려한 인동잎에 싸인 연봉우리를 한 줄기씩 물었다. 암수 주작의 목에는 두 줄의 색 띠가 묘사되었으며 다리 아래에는 산악도(山岳圖)가 그려졌다.
이처럼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 미술의 특성이 후기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졌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를 한 가지 예로 보아도 이를 쉽게 깨닫게 된다. 거북이와 뱀이 머리를 서로 마주하고 노려보는 모습, 거북이의 몸을 휘감은 뱀의 몸체가 마구 꼬이고 뒤틀린 모양, 두 동물들의 격렬한 동작에 따라 마구 튀는 듯한 주변의 그림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극도로 힘차고 폭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후기 고구려 사신도는 사신도중 가장 완벽한 구도와 형태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강서고분의 사신도가, 육조시대, 특히 등현(鄧縣)의 사신도 양식과 형태 표현상 매우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500년을 전후로 해서 발달한 육조의 양식이 6세기 중엽 이후에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서대묘 등,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도에 보이는 역동적이며 활달한 모습의 사신은 일찍이 중국에 없었던 고구려인들이 창출해낸 새로운 사신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의 사신도와 현무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은 지금까지 8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분포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강서군(江西郡), 대동군(大同郡), 중화군(中和郡) 등지의 평양지방과 길림성 집안현의 통구지방이다. 이러한 고분들이 거의 대부분 수도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이루어져 고구려에서 가장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적석총(積石塚)과는 다른 형식이며 그 위치나 규모, 벽화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의 묘로 생각된다. 이러한 벽화고분은 낙랑, 요동 등지에 남아 있던 한대(漢代)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아 4세기 경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변천에 따라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개 초기(4∼5세기), 중기(5∼6세기), 후기(6∼7세기)로 크게 구분하여 살필 수 있다.
벽화는 큰 벽돌처럼 다듬어진 돌들을 쌓아서 만든 석실의 내부 벽면에 회칠을 한 후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려진 것이 보편적이나, 벽돌 모양의 돌 대신에 넓적한 대형의 판석을 짜 맞춘 벽면에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표현한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묘실의 벽면과 천정에 모두 그리는 것이 상례였는데 대체로 초기와 중기의 경우 벽면에는 무덤의 주인공 초상화 및 주인공과 관계가 깊었던 현실세계의 일들을 기록적,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인물풍속이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무덤을 지켜 주는 사신(四神)을 그려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정에는 죽은 묘주의 영혼이 향하게 되는 내세, 즉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일월성신(日月星辰)․신선(神仙)․신수(神獸)․서조(瑞鳥)․영초(靈草)․비운(飛雲) 등을 그려 넣어 하늘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무덤의 내부는 현실을 나타낸 벽면과 내세 혹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천정이 어우러져 일종의 소우주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안악 3호분의 예에서 확인되듯이 아무리 늦어도 서기 357년부터는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며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믿어진다. 무덤의 벽면에 벽화를 그려 넣는 이러한 풍조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벽화를 그렸던 이유는 아마도 현세에서서의 권세와 부귀영화가 내세에서도 계속된다고 믿었던 계세사상(繼世思想)과 관계가 깊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벽화의 내용이나 주제면에서 그 시대적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초기에는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고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초상화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조금 시대가 흐르면 약수리 벽화고분, 쌍영총이나, 각저총 등의 예들에서 보이듯 부부병좌상(夫婦竝坐像)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상화와 더불어 초기나 중기의 벽화들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과 관계가 깊은 인물풍속이다. 주인공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벽화들은 따라서 서사적, 기록적, 풍속화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유명한 무용총의 벽화는 이러한 유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물풍속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사신(四神)이다. 사신은 천정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차차 벽면으로 내려오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벽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초, 중기에 지배적이던 불교의 영향이 감소하고 그 대신 도교가 득세하기 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전권을 휘두르던 보장왕(재위, 642∼668) 때에 국가적 차원에서 도교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시대적 풍조가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사신도가 벽면 전체에 표현되는 것은 초, 중기의 불교 강세적 경향이 후기의 도교 득세의 풍조로 종교적 측면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한다.
어쨌든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면에서 ‘인물풍속→인물풍속과 사신→사신’으로 변화했음이 확인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행렬도나 수렵도가 5세기 이후에는 사라지게 된 점도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신들에 의거하여 보면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제나 내용면에서 점차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단순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법이나 화풍은 초기의 고졸한 것으로부터 점차 세련되고 능숙한 것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이와 함께 힘차고 동적이며 긴장감이 감도는 고구려적인 특성도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채색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총괄하여 보면, 한대(漢代)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는 중국문화 및 서역문화와의 교류가 엿보이고 아울러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 미친 영향도 확인된다.
고구려 전기의 사신도와 현무
고구려 전기의 고분벽화에는 사신도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간헐적으로 나타나는데, 한대(漢代) 사신도의 형태를 빌어다 그것을 수용했던 단계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몸체의 비례가 전혀 맞지 않은 점, 동물이 지니고 있는 부피나 깊이감이 고려되지 않은 점, 철묘선법(鐵線描法, 굵기가 균일한 약간 딱딱한 선)으로 그려진 매우 딱딱하고 긴장된 필선 등은 이 시기의 사신도가 아직도 상징적인 동물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전기 사신도는 대부분 현실(玄室)의 벽면을 기둥을 그려 넣어 나눈 뒤 그 상단에 주로 표현되는데, 기둥 아래에 그려진 주제 그림에 비해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었다. 또한 회칠한 벽면 위에 검은 선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으며, 갈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색이 그다지 선명하지 못하다. 약수리고분, 대안리 1호분, 매산리사신총, 삼실총 등의 고분벽화에 표현된 사신이 이러한 전기 사신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고분벽화들 중에서 약수리 고분에 그려진 사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선 북쪽의 현무가 부부병좌상 바로 옆에 그려져 있는 특이한 형식을 이루고 있으나, 나머지 동물들은 모두 단독형태로 표현되었다. 사신은 벽면을 크게 이등분하고 있는 갈색의 기둥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하늘을 상징하는 운문 그리고 별자리 혹은 달과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기둥 아래의 현실 세계에 대비되는 천상의 세계 혹은 사후의 세계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철선묘법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엷은 담채를 표현하여 그렸으나, 동물의 부피감이나 무게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필력이 거칠고 조잡한 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북쪽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 현무는 채색이 가해지지 않고 선묘만으로 표현된 거북이를, 선묘에 붉을 채색이 진하게 가해져 표현된 뱀이 휘감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북이는 등에 갑(甲)이 없어 일반적인 거북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호랑이 비슷한 맹수를 표현한 듯 보인다. 그리고 뱀 역시 짙은 붉은 색 안료로 채색을 가하여 비늘이 표현되어야 할 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으며, 거북을 휘감은 형태에선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도에서 느낄 수 있는 동세(動勢)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중기의 사신도와 현무
중기는 사신도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동물의 모습을 보이는 단계이다. 동물 몸체의 비례가 어느 정도 들어맞아 구도상 안정감을 보이며, 생기 있고 율동적인 형태, 약간의 비수(肥瘦)가 있는 유연한 필선, 세밀한 세부묘사 등 전대에서보다 진전된 회화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벽화 주제에 비해 사신은 여전히 작게 그려져 종속적인 부수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회칠한 벽면 위에 그려진 점 등으로 미루어 전대의 화법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중기에 속하는 사신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통구 무용총의 사신도가 있다. 이것은 삼실총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신도가 천정(天井)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분에서는 구체적으로 현실(玄室, 곧 主室)의 동, 서벽 제 3층 천정 받침에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무용총 사신도에 사용된 필선은 약수리 사신도에서 사용된 철선묘법에서 벗어나 약간의 비수(肥瘦, 균일한 굵기가 아니라 때로는 굵게 때로는 얇게 윤곽선을 그리는 것)가 섞여 있는 것으로서 생기가 돌고 율동미에 넘친다. 이러한 율동미는 고구려적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북쪽 벽의 현무를 살펴보면, 그 전체적인 모습 특히 뱀이 현무를 휘감고 있는 모양은 앞서 보았던 약수리 고분 벽화에 그려진 현무와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용총에 그려진 현무는 거북이처럼 등갑이 표현되어 있고 뱀도 비늘이 조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등 그 이전 현무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북이의 얼굴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모호하고, 네 개의 다리는 모두 J자 모양으로 비슷하게 처리하여 회화적인 미숙함이 드러난다.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와 현무
고구려의 사신도 발달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단계가 바로 고구려 후기이다. 절제되고 조화있는 완벽한 구도, 긴장감에 넘치는 역동적인 형태, 선명한 색채의 배합, 특히 다리 부분에 골절을 그려 넣어 몸체의 유기적인 연결이 실제감 있고 자연스러운 점 등 사신도 표현상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사신도는 종래에 보이던 생활풍속도를 밀어내고 주실(主室)의 주벽면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벽화의 주요 화제로 등장한다. 또한 사신도는 회칠을 하지 않고 석면 위에 직접 그려졌으며, 안료의 발달로 인해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구름무늬나 인동문(忍冬文), 수문(樹文), 산악 등으로 화면을 장식하고 그 위에 주제를 설정했으며, 이 모든 것이 한쪽 방향을 향하여 유연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양식을 대표하는 고분으로는 강서대묘와 중묘, 집안 사신총, 그리고 진파리 1호분, 집안 4호분․5회분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현무도는 전대와 달리 단독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형태면에서 볼 때 거북이 목을 뒤로 돌려 뱀을 바라보는 모습과 타원형을 이루며 꼬여진 뱀의 형태 등(뱀머리 모양의 거북머리) 전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 장에서 후기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회화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통해 고구려 후기 사신도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북쪽벽의 현무는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뱀은 거북의 몸 뒤편 두 다리 사이를 지나 귀갑을 한 번 휘감은 다음 앞의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거북의 목 앞을 지나면서 반원을 이룬 뒤, 이미 한 번 꼬이면서 원을 이룬 자신의 꼬리 부분을 얽은 후 고개를 뒤로 돌린 거북의 머리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마주 보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허공을 쳐다보는 자세인 거북과 뱀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서는 불꽃이 뿜어 나온다. 거북이 자아낸 운동감과 뱀이 이루어낸 탄력성이 잘 어우러지면서 현무를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나, 뱀과 거북의 뒤틀림 묘사에서 발생된 부피감 표현의 실패는 환상적 신수(神獸)인 현무의 실재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 미술의 특성이 후기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졌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를 한가지 예로 보아도 이를 쉽게 깨닫게 된다. 거북이와 뱀이 머리를 서로 마주하고 노려보는 모습, 거북이의 몸을 휘감은 뱀의 몸체가 마구 꼬이고 뒤틀린 모양, 두 동물들의 격렬한 동작에 따라 마구 튀는 듯한 주변의 그림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극도로 힘차고 폭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서고분의 사신도가, 육조시대, 특히 등현(鄧縣)의 사신도 양식과 형태 표현상 매우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500년을 전후로 해서 발달한 육조의 양식이 6세기 중엽 이후에는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서대묘 등 후기 고분벽화의 사신도에 보이는 역동적이며 활달한 모습의 사신은 일찍이 중국에 없었던 고구려인들이 창출해낸 새로운 사신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