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죄'가 주체로서,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엿보다가 '취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리슨의 말대로 본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의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본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롬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은 '아나자오'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롬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할 기회를 주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도하고 규정하여 생명을 보존하자는데 있다.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은 시 119편의 저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언급해온 율법은 그 진정한 정신이 망각된 형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그 율법이다.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그 계명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비참한 절망감과 정죄(定罪)만 주었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 개혁자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형식적인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사망의 상태가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본절의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데'는 '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휴리스코'의 단순 과거 수동태 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서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롬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속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세파테센'이 '여사파타오'의 단순 과거 능동태 형으로서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혹자는 바울이 죄로 인한 '사망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을 추종하던 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 의해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이로 보건대 - 계명 자체가 사람에게서 죄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속이고 정죄하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본절의 접속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율법도 거룩하며...의로우며 선하도다 - 이 선언은 직접적으로 7절의 '율법이 죄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만,
문자적으로는 율법과 계명이 지닌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투영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