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비행 중인 U-2R의 3차 생산 분인 TR-1A의 일러스트. 해당 기체는 전량 업그레이드 실시 후 U-2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삽화: 알파캣>
개발의 역사
전 세계는 20세기까지 인류가 경험한 최대의 비극이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평화를 찾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종전과 함께 소리 없는 전쟁인 ‘냉전’이 시작되었고, 곧이어 ‘철(鐵)의 장막’과 ‘죽(竹)의 장막’이 유라시아 대륙에 드리우며 전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양자 대결구도로 재편되었다. 특히 이 양자 구도의 정점에는 ‘초강대국(超强大國: Superpowers)’으로 일컬어진 미국과 소련의 줄다리기, 그리고 이들 진영에 참가한 고객국가(Client States: 자유진영 참가국을 ‘자본주의’ 체제의 ‘고객’ 개념에 빗댄 용어)와 위성국가(Satellite States: 소련을 중심으로 해 주변에 위성처럼 떠 있는 국가들이라는 의미로 붙은 용어) 간의 대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은 일찍이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같은 편에 서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소련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고 ‘철의 장막’이 드리우면서 소련의 내부와 능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소련 영내의 지형 정찰이나 위성 촬영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미국이 입수할 수 있던 최선의 영상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공군(루프트바페)이 소비에트 연방 성립 초창기에 소련 영내로 진입하여 촬영한 항공사진뿐이었다. 그나마도 이 사진들은 우랄산맥 이서(以西) 지역을 촬영한 것인데다 수십 년 전의 사진이었으므로 활용도가 높지 못했다.
소련은 1950년 이후부터 주변 국경에 접근하는 모든 항공기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일본 영공에 떠 있는 항공기까지 격추했다. 미국은 폭격기인 B-47을 정찰기로 개조한 RB-47을 투입해 소련 인근 정찰을 실시했지만, 이들 정찰기는 소련의 방공포나 미사일, 전투기 요격을 회피하기 어려웠으므로 임무 수행이 쉽지 않았다. 이때 항공 첩보 전문가인 미 공군의 리처드 레그혼(Richard Leghorn, 1919~2018) 중령은 소련의 주력 요격기인 MiG-17의 실용 상승 한도가 13,700m에 불과하므로 18,300미터 정도까지 상승하여 정찰을 실시한다면 소련의 요격기나 방공포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미군 당국은 소련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장비로 제작한 레이더가 최대 19,800m까지 탐지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결국은 미군 고고도 정찰기가 소련에게 포착 당할 것이라 판단했다. 1950년대 기준으로 서방세계에서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고고도 항공기는 잉글리시 일렉트릭(English Electric)사의 캔버라(Canberra)로, 캔버라는 최대 14,600m까지 비행이 가능했다. 이에 미 공군은 잉글리시 일렉트릭 사에 도움을 요청하여 캔버라의 미국 면허생산 형상인 마틴(Martin, 1967년 마리에타 항공에 합병/現 록히드-마틴) B-57을 개발하면서 엔진, 주익, 동체 설계에 개조를 가해 실용 상승 한도를 최대 20,400m까지 상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때 미 공군 연구개발사령부(현 미 공군 체계사령부)는 동체 설계를 변경하여 B-57을 전투에도 적합하게 개조하기를 요청했는데, 이 때문에 기체 중량이 증가해 1955년에 출고된 RB-57D는 실용 상승 한도가 19,500m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특히 이 시점에서 소련이 자체적으로 레이더 탐지 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최대 19,800m까지 수직 탐지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B-57은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미 공군은 고고도 정찰용으로 RB-57D를 개발했으나 충분한 고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출처: 미 공군>
미국은 그때까지 수집한 정보와 기술력을 근거로 21,300m(7만 피트)는 올라갈 수 있어야 소련의 전투기, 미사일, 레이더를 회피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미 공군의 존 시버그(John Seaberg)는 1953년에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을 발행하면서 운용 범위 2,800km, 실용 상승 한도 21,300m를 충족하는 항공기 설계 제안을 각 기업에 요청했다. 미 공군은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더 폭넓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중소기업에서만 제안서를 수령했으며, 사업명에는 “볼드 이글(Bald Eagle)”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제안요청서에는 벨(Bell) 항공, 마틴 항공, 페어차일드 엔진 및 항공(2003년 폐업/現 엘빗 시스템즈)사가 제안서를 제출했고, 입찰 참여 자격이 맞지 않지만 록히드(Lockheed) 또한 민간제안사업(unsolicited proposal) 형태로 제안서를 제출했다. 여기서 록히드 항공은 기체 중량을 줄여 비행 고도를 높일 목적으로 동체에서 랜딩기어를 제거하고 전투 하중계수를 맞추지 않은 설계를 제안했다.
록히드는 사내(社內) 전설의 설계자로 ‘스컹크 웍스(Skunk Works)’ 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클레런스 “켈리” 존슨(Clarence “Kelly” Johnson, 1910~1990)에게 설계를 요청했으며, 켈리 존슨은 이에 부응하여 기존 XF-104 ‘스타파이터(Starfighter)’ 설계를 바탕으로 삼은 CL-282 설계를 완성했다. 그는 CL-282에 제네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사의 J73 엔진을 넣은 설계를 내놓았으며, 이 기체는 설계 상으로 최대 실용 상승 한도는 22,300m, 작전 범위는 2,600km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런 항속 거리가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CL-282가 제트추진식 글라이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공군은 1954년 6월, 랜딩기어가 없고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 사의 J57보다 덜 검증된 J73 엔진을 썼다는 이유로 CL-282를 탈락시키고 벨사의 X-16과 B-57 개조 형상 설계를 채택했다. 당시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1906~1990) 대장은 CL-282 프레젠테이션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 그는 훗날 ‘나는 바퀴도 안 달리고 총도 없는 항공기에는 관심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스컹크웍스의 켈리 존슨이 제안했던 CL-282 설계안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해롤드 탈봇(Harold E. Talbott) 미 공군장관의 보좌관이던 트레버 가드너(Trevor Gardner, 1915~1963) 같은 인물은 실용 상승 한도가 더 높은 데다 레이더 피탐지면적(RCS: Radar Cross Section)이 더 작다는 점 때문에 CL-282 설계 쪽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는 CL-282 설계를 중앙정보국(CIA) 내 과학정보실에 추천했으며, 보고를 받은 CIA의 앨런 덜레스(Allen Dulles, 1893~1969/국무장관을 지낸 존 포스터 덜레스의 친동생) 국장도 마침 완전히 기계에만 의존하는 정보 수집보다 사람이 개입한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가드너의 추천안에 흥미를 보였다.
여기에 미 공군과 CIA 인원으로 구성된 정보체계 협의회는 기존의 RB-57D가 실용 상승 한도 21,300m 요구도를 못 맞출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RB-57을 계속 운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때 CIA는 CL-282 설계를 협의회에 제시했고, 미 공군은 약점이라고 판단했던 부분들이 정보 협의회에서는 장점으로 부각되면서 CL-282 채택 쪽으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때 ‘폴라로이드(Polaroid)’ 카메라의 개발자인 에드윈 랜드(Edwin Land, 1909~1991)와 협의회 위원인 CIA의 리처드 비셀(Richard M. Bissell, Jr. 1909~1994)은 만약 공군이 CL-282 같은 고공정찰기를 운용하다가 적 영공에서 격추당할 경우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으므로 이런 정찰항공기는 CIA가 비밀리에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해 미 공군은 고공정찰기 운용을 빼앗기는 것이 싫어 반대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에드윈 랜드의 의견을 청취한 뒤 CIA를 해당 정찰기의 운용 주체로 지정했다. CIA는 CL-282를 정식으로 채택했으며, 이 사업은 1954년 11월부로 미 공군-CIA 합동 사업 형태로 승인이 났다.
훈련 임무를 위해 비행 중인 미 공군 소속 U-2 드래건레이디. (미 공군/Master Sgt. Rose Reynolds)
CIA는 고고도 정찰기 운용 사업을 추진하면서 비밀 예산을 사용했으며, 1955년 3월에 초도 물량 20대 계약금으로 록히드에 2,250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2억 1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CIA와 록히드는 첫 양산기를 1955년 7월부터 인도했으며, 최종 기체는 1956년 11월까지 인도를 마치는 것으로 계약했다. 록히드 역시 이 사업의 은밀성을 유지해야 했으므로 항공기의 구성품을 대부분 비밀리에 구입했고, CIA는 그것이 실험용 로켓 항공기 개발용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U2가 초창기에 JP-7 항공유를 사용했는데, 1955년에 U2기가 사용하기 위해 미 정부가 수십만 갤런에 달하는 물량을 사 모으는 바람에 동일한 원료를 사용하는 에소(Esso)사의 플릿(FLIT) 모기 살충제가 미국 전역에서 동이 나는 현상이 발생했었다는 사실이다.
CL-282는 1955년 7월에 “U-2”라는 제식 번호를 새로 부여받았고, 항공기는 은밀하게 운용해야 했으므로 초도 항공기는 일명 “에어리어 51(Area 51)”로 불리는 그룸 레이크(Groom Lake)로 인도됐다. U-2에 정찰기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U”라는 알파벳이 부여된 점도 독특한 부분인데, 원래 항공식별부호를 따른다면 정찰기라 “R(Reconnaissance)”이 붙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러 U-2의 용도를 감추기 위해 다목적 항공기(Utility)의 식별부호를 붙인 것이며, 이미 이 “U”자 식별부호를 받은 다목적 경비행기인 U-1(드 하빌랜드 사의 DHC-3)와 U-3(세스나 310)가 존재했으므로 2번이 부여된 것이다. CIA는 U-2기를 이용한 정찰 사업에 아쿠아톤(AQUATONE)이라는 암호명을 붙였고, 미 공군은 CIA를 지원하는 내용의 작전에 오일스톤(OILSTONE)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U-2S: 미국 아이콘의 최신 세대 <출처: 록히드-마틴 유튜브 채널>
이후 U-2는 냉전 시기에 걸쳐 소련과 소련 위성국가 상공을 비행하며 위험한 정찰을 실시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충돌한 수에즈(Suez) 위기 때에도 투입되어 활약했다. U-2는 비록 1960년 5월 소련 상공에서 격추당하는 바람에 미국의 불법 영공 침입과 정찰을 인정하게 만드는 외교적 치욕을 안기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반세기 넘게 전 세계 하늘을 누비며 쿠바 미사일 사태를 시작으로 수많은 적지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U-2는 한때 퇴역이 결정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무인기와 교대하면서 단계적인 퇴역 절차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는 U-2의 성능을 따라올 첩보 항공기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퇴역은 멀어질 전망이다. 오늘날까지 U-2는 B-52 스트라토포트리스(Stratofortress), KC-135 스트라토탱커(Stratotanker) 등과 더불어 50년 이상 운용된 미 공군의 대표적인 항공기 중 하나이다.
특징
아래에서 올려다 본 U-2의 모습. U-2는 장기 체공을 위해 긴 날개를 갖춘 글라이더와 흡사한 외양을 갖고 있다. <출처: 미 공군/Airman 1st Class Bobby Cummings>
U2는 기본적으로 단좌식에 단발 엔진을 장착한 고고도 정찰기로 주 목적은 신호 정보, 영상 정보, 계측 및 기호 정보(MASINT)를 수집하기 위한 항공기이다. 외양적으로 동체뿐 아니라 주익까지 길고 가느다란 형상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며, 이는 글라이더와 유사한 특성을 이용해 중량이 무거운 센서 탑재 장비를 우주에 근접한 고고도까지 들어 올리고, 최대한 장시간 체공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U2는 다층 전자광학 센서, 적외선 센서, 합성 개구식 레이더(SAR) 등을 이용해 적 영공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도록 제작되었다. U2에는 고해상도, 광각 촬영 카메라가 장착되어 비행 간 연속 촬영을 실시하며, 이렇게 촬영된 정밀 영상은 모두 촬영 후에 수거되어 인화된 후 정보로 활용된다. U-2에 설치된 카메라는 고도 10,000m에서 아래로 내려봐 7m까지 판별이 가능한 해상도를 자랑한다. U-2의 조종석 뒤에는 큐베이(Q-Bay)라 불리는 카메라 수납 공간이 있고, 날개에도 윙 포드(Wing pod)가 설치되어 있다. U-2는 사진 촬영을 실시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신호 정보나 영상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고고도 시료 채취 프로그램(HASP) 장비가 장착된 U-2의 모습. U-2는 길쭉하고 얇은 동체에 주익이 긴 형태로 설계되어 있어 착륙 간 균형을 맞추기 어려운 기체에 속한다. 해당 사진은 U-2가 착륙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착륙 후 기체 균형 때문에 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해당 사진은 1961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하던 U-2가 피지를 경유하며 촬영된 사진이다. <출처: 미 공군>
U-2에 탑재된 가장 중요한 장비류는 정보 수집을 위한 탑재 장비들이다. 앞서 언급한 촬영 장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집 정보는 지상과 직접 연결되거나 인공위성을 거친 데이터링크 방식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송하며, 이를 통해 야전 지휘관들에게 가장 적절한 적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계측 및 기호 정보는 관심 지역 내 적에 대한 가장 최신 활동을 확인할 수 있고, 인간이 창조한 물체라면 거의 무엇이든 탐지 및 파악할 수 있으므로 정보 수집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체계로 분류된다. U2는 업그레이드가 실시되면서 2001년부터 레이시온(Raytheon)사가 제작한 원거리 공중 센서인 RAS-1R이 탑재되어 라디오 주파수 신호 정보를 수집한다. U-2에는 또한 SYERS로 명명된 전자광학 정찰체계가 탑재되어 주야에 관계없이 장거리에서 고화질 영상을 수집할 수 있다.
우주복과 흡사한 독특한 비행복을 착용하고 조종석에 오르는 U-2의 조종사 모습. <출처: 미 공군/Senior Airman Tyler Woodward>
U-2의 대표적인 방어 체계로는 최신 방어 시스템으로 꼽히는 AN/ALQ-221이 장착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에는 레이더 경고 수신기(Radar Warning Receiver: RWR), 전자전 대응체계, 합성 개구식 레이더(ASARS) 등이 통합되어 있다. 특히 ASARS는 약 160km 범위 내 지상의 모든 이동 및 고정 표적을 탐색할 수 있으며, 해당 정보는 듀얼 데이터 링크 2 시스템을 통해 즉각적으로 전 세계 전역의 필요 군으로 정보를 전송할 수 있다.
U-2의 설계 자체는 스텔스 설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소련에서 격추당한 이후 CIA에서 "레인보(Rainbow)" 사업을 실시해 U-2의 레이더 피탐지면적(RCS: Radar Cross-section)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계획을 폐기되었으며, 대신 A-12나 SR-71 같은 후속 정찰기부터 스텔스 설계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초기형 U-2 기의 조종석 <출처: 미 공군>
초기형 U-2는 적의 방공망이나 전투기 요격을 회피하기 위해 실용 상승 한도인 21,000m에 최대한 근접하여 비행해야 했으므로 실속 속도에 가깝게 비행해야 했다. 최대 고도에서 최고 속도와 실속 속도 간의 차이는 19km/h에 불과했으므로 조종사들은 이 아슬아슬한 한계 안에서 비행해야 했으며, 이 속도를 넘어갈 경우 기류 분리(airflow separation)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영역을 풋볼 게임 용어에 빗대 “코핀 코너(Coffin corner)”라 불렀다. 통상 정보 수집 임무를 위해 U-2는 실속 속도에서 불과 9km/h 빠른 수준으로 비행한다.
U-2는 24,000m까지 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조종사는 우주복과 흡사한 압력 조종복을 착용해야 하며, 저고도에서는 불안정한 항공기 특성과 거의 두 발 자전거와 유사한 랜딩기어 때문에 이착륙 간 정밀한 통제를 요구한다. 심지어 기수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있는 설계 특징 때문에 U-2의 전방 시계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통상 U-2는 착륙을 실시할 때 외부에 한 명의 ‘체이서’ 조종사(통상 교대한 다른 조종사가 역할을 맡음)가 차량으로 항공기를 따라가며 기체 고도와 활주로 평행 여부 및 기체 수평 상태를 무전으로 외부에서 불러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 때문에 U-2는 명실공히 가장 조종하기 어려운 항공기로 꼽힌다.
최신형 형상인 U-2S의 전면 디지털식 조종석. <출처: 미 공군>
U-2의 조종석은 2003년 전면 디지털식 조종석으로 개선되면서 컬러 평면 다목적 디스플레이 패널이 추가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는 조종석 고도 감소화, 통칭 CARE(Cockpit Altitude Reduction Effort) 사업이 진행되면서 동체 기골이 보강되고, 밸브류가 모두 교환되었으며, 공연비 제어 소프트웨어를 개선하여 고고도 비행 시 조종사가 받는 고도 부담을 낮추도록 했다. 그 덕에 기존에는 고고도 장기체공 임무 간 조종석에서는 8,992m 상공을 비행하는 부담을 받았지만, CARE 개선 후에 조종석에 가해지는 부담은 4,570m 수준으로 떨어져 임무 수행 후 체력적인 부담이 덜하게 되었다. 조종석에는 감압병(減壓病) 방지를 위해 조종사에게 100% 산소를 공급하는 산소 공급 장치가 설치되어 조종사의 혈액에서 질소를 지속적으로 제거한다.
U-2의 고도 21km 비행 간 조종석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초창기 U-2에는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사의 J57 터보제트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으나 U-2C형 이후부터는 P&W사의 J75 엔진이 장착되었고, 후기인 U-2S 이후부터는 중량이 가볍고 연료 효율성이 높은 제네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사의 F118-101 엔진이 장착되어 장시간 동안 비행을 실시할 수 있다. 연료로는 최초 JP7을 사용했으나, 곧 1950년대에 U-2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JPTS(Jet Propellant Thermally Stable)를 사용하고 있다. JPTS는 일반 항공유보다 고온 안정성이 높고 어는점이 낮으며, 점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미 공군은 1999년에 약 1,130만 달러를 투입해 저가의 대체 연료 개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001년경 JP-8 항공유를 바탕으로 개량한 JP-8+100LT가 약 56도에서도 안정성을 보여 대체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고려되었지만 기본적으로 JPTS와 거의 가격 차이가 나지 않는 데다 JPTS보다 보관이 용이하지 않아 결국 대체 연료로 채택되지 못했다.
‘체이서’ 차량에서 본 U-2 착륙 현장 <출처:유튜브 채널>
U-2는 은밀성을 유지해야 하는 임무 특성 때문에 동맹국에도 기체 주둔 사실을 알리지 않아야 할 경우를 대비해 항모 운용을 고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군은 레인저(USS Ranger, CV-61) 항모에서 한차례, 아메리카(USS America, CV-66)함에서 한차례 항모 이함 테스트를 하면서 U-2의 항모 운용 개념을 시험했다. 하지만 실제로 U-2가 항모에서 이함하여 임무를 수행한 것은 1964년 5월, 프랑스가 남태평양 환초 지대에서 핵실험을 실시하자 이에 대한 첩보 수집을 위해 레인저함에서 한차례 이함한 것이 유일한 사례로 기록됐다. 이후 1969년에도 아메리카에서 U-2R이 한차례 이함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식적으로는 1969년 이후 U-2의 항모 운용은 중단되었다.
운용 현황
U2는 반세기 이상 미국 역사상 가장 은밀한 정찰 플랫폼으로 군림했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민감한 지역의 항공정찰을 실시하고 영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록히드 스컹크 웍스의 명 설계자로 꼽히는 켈리 존슨이 설계한 이 기체는 1955년 8월에 초도 비행을 실시한 이래 역사적인 주요 분쟁 지역이나 전장의 까마득한 높은 하늘 위를 누볐다.
U-2는 1950년대 말부터 소련 상공을 넘나들며 소련군의 능력을 파악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때에는 쿠바 내 소련의 미사일 전개 상황을 촬영했으며, 6·25 전쟁 이래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한반도 상공을 넘나들고, 유고 내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장 등에도 투입되어 미군과 동맹군에게 핵심 정보를 공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평시 작전에도 활용되어 홍수, 지진, 삼림 대화재 같은 재난 구호 작전에도 투입되어 기상정보나 피해 지역 상황 정보를 수집했으며, 각종 수색 구조 작전에도 참가하여 위성에 준하는 고도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구조 세력을 지원해왔다.
U-2 초도 비행 <출처: 록히드-마틴 유튜브 채널>
냉전 당시 U-2 조종사는 CIA에서 주로 선발을 담당했으며, 선발 사업 자체의 암호명을 ‘드래건 레이디(Dragon Lady)’로 명명한 것이 U-2의 별칭으로 자리 잡았다. 미 공군이 공식적으로 CL-282의 채택을 거부하면서 CIA가 이 사업을 인수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가급적 미국 국적자 외의 조종사도 U-2 조종사로 채택하기를 희망했고, 이에 따라 일곱 명의 그리스 출신 조종사와 한 명의 폴란드 인이 선발되어 교육을 함께 받았으나 오직 두 명의 그리스 조종사만 U-2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 장벽이나 비행 경험의 문제 때문에 이들의 운용 효과가 좋지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1955년부터 외국 출신 조종사 탑승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1966년, 록히드의 전설적인 항공기 설계자 켈리 존슨(Kelly Johnson/좌)과 U-2기 피격 사건의 주인공인 프랜시스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 대위(우)의 모습. 파워스 대위는 미 공군 소속이었으나 1956년 CIA에서 U-2기 조종사로 선발해 소련 영공까지 진입했다가 격추를 당했다. <출처: Lockheed Company>
U-2와 관련된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60년 5월에 발생한 U-2기 격추 사건일 것이다.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그랜드 슬램(Grand Slam)’ 작전을 실시하면서 1960년 5월 1일 자로 소련 남부에서부터 U-2기를 진입시켜 소련을 종단한 후 바렌트(Barent)해로 빠져나가는 대담한 첩보 수집 계획을 세웠다. 당시 투입된 조종사는 이미 27회나 적 영공 진입을 실시한 베테랑 파일럿인 프랜시스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 1929~1977) 대위였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당시 미국은 U-2의 투입 일자부터 잘못 골랐는데, 5월 1일은 소련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영공 상태가 한산한 편이었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방공 감시체계에 여유가 있어 U-2의 진입이 눈에 띄기 쉬운 상황이었다.
소련이 U-2를 전혀 포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과 달리 소련은 U-2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오기 24km 전 지점인 스베르드로프스크(Sverdlovsk) 상공부터 포착하여 감시를 시작했으며, 4시간 반 동안 U-2가 영공 내에서 비행하는 것을 추적하다가 SA-2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고도 21.5km를 비행 중이던 U-2를 노렸다. SA-2는 총 세 발이 발사되어 한 발은 U-2를 추격하던 소련 측 요격기를 격추했고, 다른 한 발은 요격에 실패했으며, 마지막 한 발은 U-2의 동체 후방 쪽에 명중했다. 개리 파워스는 사출에 성공했지만 소련 영내에서 생포됐고, U-2는 고고도에서 추락했음에도 완전 파괴가 되지 않아 소련은 잔해에서 상당수의 부품 장비를 수거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소련 영내에 불법 침입하여 정찰 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 시기에 진행되고 있던 파리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CIA는 혹시 U-2 조종사들이 생포 당할 경우 적국의 취조자들에게 ‘아는 대로 모든 것을 말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미국이 임무 전에 조종사들에게는 그저 정보 수집 목표만 알려줬을 뿐, 임무의 상세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학대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 파워스는 최대한 민감한 정보를 소련에 불지 않았고, 소련에서 재판을 받은 후 실형을 받기 직전 상황까지 갔다.
하지만 이때 미국과 소련이 막후 협상을 실시하던 중 1962년 2월 10일 자로 동독에서 구금되어 있던 두 명의 미국 학생들과 교환이 성립되면서 그는 극적으로 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소련은 격추한 U-2 잔해를 이용하여 역설계를 시도해 베리에프(Beriev) S-13으로 명명했으나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곧이어 MiG-25R 같은 정찰기나 정찰위성이 등장함에 따라 개발 중간에 폐기되고 말았다.
1961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하던 중 피지에 잠시 연료 보급을 위해 착륙한 미 공군 소속 U-2의 모습. 동체 좌측 하단에 공기 샘플 채취용 흡입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전 세계 지역에서 실시되는 핵 실험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 대기 중의 시료를 채취하기 위한 장비이다. <출처: 미 공군>
U-2가 투입된 또 한차례의 극적인 사건은 쿠바 미사일 사태였다. 1961년, CIA는 공중급유가 가능한 U-2F를 쿠바에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1962년 8월에 쿠바에서 소련제 SA-2 SAM 포대를 일부 발견했다. 이에 U-2가 다시 집중 투입되어 정보를 수집한 결과 MiG-21과 미사일 포대가 추가로 발견했다. 10월 14일에는 리처드 헤이저(Richard S. Heyser) 소령이 조종하는 U-2F가 쿠바에서 처음으로 MRBM(중거리탄도미사일)을 포착했으며, 이후 쿠바 미사일 사태가 지속되는 기간 내내 U-2를 계속 쿠바 영공에 투입했다.
그러던 중 10월 27일 자로 한 대의 U-2F가 SA-2에 격추당해 조종사이던 루돌프 앤더슨(Rudolph Anderson) 소령이 전사했다. 이 사건 직후 CIA는 쿠바에 대한 정보 수집 비행을 중단했으며, 1970년대까지 미 공군 전략사령부가 이를 대신하여 ‘올림픽 파이어(Olympic Fire)’라는 작전명으로 쿠바에 대한 정보 수집을 계속했다.
1960년경 에드워즈 공군기지에서 촬영된 미 공군 소속 U-2D의 모습. 조종석 뒤쪽에 설치된 장비는 적외선 센서로, 미사일 탐지 및 경계 체계, 일명 마이다스(MIDAS: Missile Detection and Alarm System) 장비이다. 이 기술은 소련의 탄도 미사일 발사를 사전에 포착할 수 있는 위성 기술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동체 전방 상부만 검게 칠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조종석 바로 뒤에 하얀색으로 설치된 센서가 혼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주변을 검게 칠한 것이다. <출처: 미 공군>
U-2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가 실시되어 왔으며, 용도에 따라 다양한 파생형이 제작되어왔다. 가장 최신형에 속하는 U-2S 블록 10형은 전자체계가 구형 장비와 교체되었고, 무엇보다 와이어링(wiring)에 최신 광섬유 기술이 적용됐다. 또한 전자 노이즈 특성이 최소화되어 센서류 운용에 간섭이 적게끔 개선되었다. 1967년에 초도 비행을 실시한 U-2R형은 첫 기체인 U-2A형에 비해 40% 이상 동체가 커지고 능력이 확장되었으며, 1981년 8월에 초도 비행을 실시한 TR-1A는 전술 정찰 용도로 설계되었다.
U-2의 최종 기체는 1989년 10월 미군에 인도됐으며, 1992년을 기점으로 모든 TR-1/U-2 형상은 모두 U-2R로 형식 부호가 재지정됐다. 미 공군은 1994년부터 17억 달러를 투입하여 U-2 동체 및 센서 업그레이드를 실시했으며, 이때 센서뿐 아니라 엔진도 GE F118-101 엔진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미 공군이 보유 중이던 모든 U-2기는 U-2S로 명칭이 다시 재지정됐다.
미 공군은 2011년 U-2 퇴역을 고려하면서 2015년부터 무인기와 교체하기로 했으며, 당시 교대가 가장 유력한 기종은 RQ-4 글로벌 호크(Global Hawk)로 꼽혔다. 하지만 2012년 1월에 미 공군은 RQ-4 블록 30 사업을 중단하고 U-2를 2023년까지 수명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RQ-4의 카메라와 센서가 U-2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전천후 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가 시간당 운용 비용도 U-2 쪽이 2,380달러, RQ-4가 6,710 달러로 월등히 낮았기 때문이다. 2017년 미 공군 예산 부차관보였던 제임스 마틴(James Martin) 소장은 “미 국방부는 미래에도 계속 이 플랫폼을 유지할 생각이다. (U-2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며 사실상 U-2의 수명 연장을 공식화했다.
U-2 보유에 대한 미군의 방침 변화는 2014년 이후 전 세계 환경이 변화한 이유가 가장 주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중에서도 이라크 지역에서 일어난 ISIS 문제와 시리아 내전 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예산 문제에서도 신규 RQ-4 글로벌 호크를 도입하는 대신 두 기체를 병용할 경우 약 22억 달러가 절감된다는 추산이 2016년경에 나온 적이 있어 U-2의 은퇴가 멀어진 것은 기정사실로 보인다. 2016년경에는 록히드-마틴 사가 무인형 U-2 개발안을 미 공군에 제시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고, 미 공군은 2019년으로 잡혀있던 U-2 퇴역 일자를 2018년에 무기한 연장한 상태다.
U-2는 일부 기체가 퇴역 처리되었기 때문에 종종 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는 기체이다. 예를 들어 CIA가 운용하던 U-2A형의 최종 기체는 현재 오하이오 주 데이튼(Dayton, OH)의 미 공군 연방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U-2는 2014년 기준으로 약 34대가 비행 중이었으며, 잔존 중인 대부분의 형상은 80년대 말에 제작된 TR-1이지만 60년대에 제작된 소량의 U-2R도 현역에 남아있다. 앞서 언급했듯 현재까지 남은 U-2는 1994년에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실시하며 모두 U-2S로 제식 번호를 변경했으나,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운용 중인 단 두 대의 기체만이 ER-2로 지정되어 있다.
2014년 1월 22일, 미 공군 비일 기지에서 착륙 중인 U-2의 모습. <출처: 미 공군/Airman 1st Class Bobby Cummings>
U-2는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 공군에도 소량이 판매되었으며, 제35 ‘흑묘(黑猫)’ 비행중대에서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운용했다. 중화민국 공군은 1950년대에 미국에서 도입한 RB-57A/D형을 정찰기로 운용했으나 이 중 두 대가 MiG-17 및 SA-2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때문에 중화민국과 미국은 1958년에 “흑묘”로 명명한 제35 비행대대 창설에 합의하여 타오위안(桃源)에 부대를 창설했으며, 두 대의 U-2C형이 미국으로부터 인도됐다. 당시 대만 또한 U-2 운용을 비밀로 붙이기 위해 흑묘 부대를 기상 연구 부대로 위장했으며, 미국은 CIA 및 미 공군 인원을 35비행대대로 파견하면서 ‘H 파견대’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다.
해당 부대는 미국과 대만이 공동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은 양국의 공동 재가를 요구했으며, U-2 운용을 위해 26명의 중화민국 공군 조종사가 1958년부터 1973년까지 순차적으로 텍사스 주 러플린(Laughlin) 공군기지로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 후아(Mike Hua)’로 알려진 중화민국 공군 소령은 U-2 비행 중 기체 이상이 발견된 상태에서 콜로라도 주 코르테즈에 야간 비상착륙을 성공시킴에 따라 미군은 이 ‘극비’ 항공기를 무사히 회수한 공로로 그에게 공군 우수 비행십자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35대대는 1961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임무에 돌입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정보 수집을 실시했으며, 주로 중국의 핵무기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5대대는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보 수집도 병행하여 북한, 북베트남이나 라오스 영공에서도 정보를 수집했다.
1962년 9월에는 중화민국 공군의 U-2 한 대가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난창(南昌) 근처에서 격추되는 바람에 중국은 미국이 스파이 항공기를 대만에 팔았다고 맹 비난했으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화민국 공군의 U-2는 1963년 11월과 1964년 7월에 각각 한 대씩 더 격추를 당해 이후 대대적으로 레이더 재머(jammer)나 전자전 대응장비(ECM)를 비롯한 기체 방어체계를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하게 중화민국 공군이 언제까지 U-2를 운용했는지, 혹은 아직도 운용 중인지는 불명확하나, 35대대는 70년대 중반에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인 2013년 7월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한 대가 더 추락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부대 해체 후에도 U-2를 계속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생형
U-2A: 초도 양산 기체로 단좌식이며,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사의 J-57-P-37A 엔진이 장착됐다. 총 48대가 제작됐다.
U-2B: 미사일 경보용 정찰 항공기 개발안. 실제 제작되지는 않았다.
U-2C: P&W사의 J75-P-13엔진을 설치한 업그레이드 형상.
'세이버(Sabre)'로 불리는 위장 패턴으로 도색된 U-2C형의 모습. 1975년 경에 촬영됐다. <출처: 미 공군>
U-2D: IR 탐지 사업을 위해 개조된 복좌식 기체. 하지만 훈련기로 설계되지 않았다.
U-2CT: 복좌식 훈련기.
U-2E: 공중 급유가 가능하도록 개조한 형상으로, J-57 엔진이 탑재됐다.
U-2F: 공중 급유가 가능하도록 개조한 형상으로, J-75 엔진이 탑재됐다.
공중급유를 받는 U-2F <출처: Public Domain>
U-2G: 미 해군이 함재기로 운용할 목적으로 개조한 형상으로, A 형상에 강화된 랜딩기어를 설치하고, 어레스트 후크를 달았으며, 날개 끝에 양력 상쇄용으로 스포일러(spoiler)를 설치했다. 총 3대가 개조됐다.
U-2H: 항모용으로 개조되었으며, 공중 급유가 가능하도록 제작된 기체.
U-2R: 동체를 재설계 해 약 30%가량 커졌고, 주익 아래에 증가 탱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한 형상. 총 14대가 개발됐다.
U-2R <출처: 미 공군>
U-2RT: R 형상의 복좌식 훈련기. 한 대가 제작됐다.
U-2EPX: 미 해군 해상초계용으로 제안한 형상. 바탕은 R 형상이며 두 대가 개발됐다.
TR-1A: U-2R의 3차 생산분으로, 측면 탐지 레이더와 신형 항전장비, 고급 ECM 장비 등이 탑재되어 고고도 전술 정찰 임무를 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 총 33대가 제작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 전부 U-2S로 명칭이 변경됐다.
TR-1B: TR-1A 동체를 사용한 복좌형 기체로, 훈련기로 사용됐다.
TU-2S: TR-1B 복좌식 훈련기에 엔진을 향상시킨 형상. 총 5대가 개조되었다.
체이서 차량이 뒤에서 쫓아오는 가운데 착륙을 실시 중인 복좌형 TU-2S. 조종석 시계가 좁고 이착륙 간 균형이 불안한 U-2의 특성 때문에 항상 '체이서' 차량이 무전으로 교신하며 기체 속도와 균형 등을 알려준다. <출처: 미 공군/Airman 1st Class Bobby Cummings>
ER-2: 두 대의 TR-1A 동체를 지구 자원 탐지용 항공기로 개발했으며, 미 공군이 미 항공우주국(NASA)에 양도해 NASA 에임즈(Ames) 연구센터 내 고고도 임무 부서에서 운용하고 있다.
U-2S: TR-1A와 U-2R에 GE F118엔진 및 고급 센서, GPS 수신기를 장착한 형상. 총 31대가 개조되었다.
U-2S <출처: 미 공군>
WU-2: 대기/기상 연구용 항공기.
제원
종류: 고고도 정찰기 제조사: 록히드 스컹크 웍스(現 록히드-마틴) 승무원: 1명 전장: 19.2m 전고: 4.88m 날개길이: 32m 날개면적: 93㎡ 최대이륙중량: 18,144Kg 자체중량: 7,257Kg 추진체계: 17,000파운드(76kN)급 GE F118-101 터보 팬 엔진 최대 연료량: 11,200리터 최고속도: 659km/h 실속 속도: 120km/h 항속 거리: 11,279km 이상 체공 시간: 12시간 실용 상승 한도: 24,000m 이상 상승률: 46m/s 고도 도달 속도: 18,000m까지 12분 30초에 도달 양항비: 25.6 날개 하중: 200kg/㎡ 추력 대비 중량: 0.00417Kn/Kg 연료 소비량: 410kg/h(순항 시) 대당 가격: 950,000 달러(1955년 기준/현재 기준 약 890만 달러)
글 / 윤상용군사 칼럼니스트 /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