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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연중8주일)/ 이사49:8-16, 1고린3:18-4:5, 마태6:22-34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얼마 전 타계하신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란 책을 다시 한 번 꺼내 보았습니다. 밑줄을 쳐놓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종교와 미신의 분수령에는 여러 가지 푯말이 박혀있지만 그 중에 구하는 바가 청정하고 바른 것이냐, 아니면 사특하고 굽은 것이냐에 따라 그 길은 갈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종교와 미신의 촌수는 실로 모호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마 머리를 깎고 염불을 왼다고 다 중이 아니요, 불상 앞에서 절한다고 다 불자가 아니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청정한 마음은 바로 삶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그것은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데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우선순위가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정말 혼탁해 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은 재물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에 우선순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재물입니다. 세상만사 밥그릇 싸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살다보면 재물처럼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재물이 있어야 좋은 일도 할 수고 풍요로운 삶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권세입니다. 사람은 예부터 입는 것으로 그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옷을 입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합니다. 다음으로 마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쾌락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욕구가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런 것들은 살아가는 없어서는 안 될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가요? OECD국가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삶의 우선순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이런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아름답게 쓰여지고, 추한 마음을 가지면 추하게 쓰여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바로 이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하십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영어 수학도 중요하고,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고, 먹고 입고 즐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먼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마음,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에게 축복의 선물로 주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들을 통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우선순위가 바뀔 때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땅에서 나는 열매와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하느님이 주신 이 축복으로 많은 결실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공해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재물과 기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해 벌거벗은 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자식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추태를 보이고 만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정복당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선순위를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우선순위를 잃게 되면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신앙이 좋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온갖 축복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추한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흥부와 놀부 이야기 후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대신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몇 푼의 돈을 받아들고 처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뛰어 오면서
“아빠, 큰일 났어요. 뱀이 처마 밑에 있는 제비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흥부는 매를 맞아서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뱀이 제비새끼를 잡아먹든 제비가 뱀을 잡아먹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흥부는 급히 집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리고 큰 장대로 뱀을 쫓았습니다. 그런데 밑바닥을 보니 새끼 제비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다리가 부러진 것입니다. 흥부를 헝겊을 가져오게 해서 정성을 다해 다리를 싸매 주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약한 자를 잡아먹으려는 뱀을 쫓는 마음, 이것을 우리는 정의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궁지에 몰린 이웃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돕는 마음을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제비를 정성스럽게 싸매주는 행위는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게 우리가 간직해야할 우선순위입니다.
그런데 시간은 흘렀습니다. 제비는 떠나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그런데 제비 한 마리가 날아 왔습니다. 다리에 헝겊이 매어 있는 것을 보니 작년에 다리가 부러졌던 제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비가 뭔가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가서 그것을 주어 보니 박 씨였습니다. 아니 주려면 황금덩어리를 주던지 박씨가 뭡니까? 다른 사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흥부는 그것을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대박이 터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회의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대박문화입니다. 씨를 심어서 잘 가꾸어 부자가 되기보다는 뭔가 한탕해서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위로부터 시작해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팽배해 있습니다. 씨를 심어서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뭔가 어리석어 보입니다. 땀 흘려 일해서 버는 것은 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요즘 청문회 하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땀 흘려 뭔가를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지도층이 이럴진대 백성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윗물이 맑아야합니다. 여러분 세상적으로 보면 이들이 윗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윗사람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하여튼 흥부는 씨를 잘 가꾼 바람에 박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흥부는 박을 타서 내다 팔기도 하고, 먹을 요령으로 박을 따서는 박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박속에서 온갖 보물이 쏱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진정한 축복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선순위를 잃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정말 성서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을 두고 동양의 유대인이란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부는 어떤가요?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그 비밀을 안 놀부는 집으로 돌아와 흥부처럼 제비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비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장대로 제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떨어진 제비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때는 잘도 부러지던 다리가 이번에는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다리를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리를 싸매주고는 제비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흥부보다 더 많은 박씨를 달라”고 말입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정말 제비는 박씨를 물고 왔습니다. 흥부는 그 씨를 정성스럽게 심었지요. 그리고 박이 열리자 흥분이 되어 박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원일입니까? 지옥의 천사들이 나와서 놀부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떨어가고 말았습니다. 놀부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놀부에게는 흥부가 받았던 복을 받지 못했을까요? 뭐가 바뀌었나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놀부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앞섰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놀부처럼 이런 것들을 주인으로 여기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처럼 이런 것들을 주인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인으로 섬길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들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참으로 묘하지요. 흥부는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들, 뺨을 때리던 형수를 용서하고,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싸매주던 일, 그리고 박씨를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통해 흥부를 축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부는 어땠나요. 놀부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놀부에게는 오직 한 가지 욕심만 있었지요.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했지요. 결국은 모두를 잃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두워져서 축복의 선물로 주신 재능과 재물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말씀처럼 “바보”가 되야합니다.
요즘 유진 피터슨이 쓴 “부활을 살라”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왜 우리가 바보가 되야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어서,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성숙은 우리 문화의 특징이 아니다. ‘획득하고 소비하는’ 데 집착하는 태도가 우리 문화의 특징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대신, 우리는 더 많이 얻거나 더 많이 행동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숙해지지 못한 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를 사려고 한다. 재정적 안정성, 성적 만족, 승리,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휴가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
하지만 이런 지도는 절대로 우리가 원한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행할수록 우리의 존재는 더 작아질 뿐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찾는 것을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우리는 바보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이치로 보면 어리석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이게 참된 지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마음, 참된 믿음의 길,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이사야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길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길을 선택함으로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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