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덕스러운 숙종(1674~1720)의 46년 집권시기에는 서인과 남인 간 당쟁의 골이 깊어진 탓에 빈번
한 정권교체가 이루워졌다.이를 대변해주는 단어가 바로 정치집권 세력의 版을 바꾸는 '換局' 과 정적
들을 감옥에 가두고 귀양 보내는 '獄事' 인 것이다.중국사나 한국사나 정치를 못하는 제왕들의 집권기
간이 대체로 길다(혼란)는 것은 공히 같다.숙종시대에는 격렬한 정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아졌
다.숙종은 王權을 강화하기 위해 공훈 세력과 외척세력으로 당파를 치거나,이 당파로 저 당파를 치는
파행적인 방법을 썼다.처음에는 '청풍(淸風:東州의 다른 표현) 김씨인 金錫周(김육의 손자,서인으로 남
인편을 든 외척) ' 의 힘을 빌어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南人 정권을 세웠다.김석주는 삼촌이 현종왕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外戚' 속했다.그는 자질이 뛰어 남에도 '외척이 정치에 가담해서는
않된다' 는 송시열의 주장으로 출세하지 못하고 있다가,이때와서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을 끌어
들여 新정권을 수립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숙종의 즉위년(1674)에 일어난 '甲寅換局' 이다.
2, 南人이 정권을 잡게되자 西人 인사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남인은 허적,權大運의 '濁南' 과 윤휴,
허목의 '淸南' 으로 갈렸다.청남은 이참에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강경파였고,탁남은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온건파였다.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은 허적등 탁남이 가지고 있어 청남의 의견은 묵살
되었다.이즈음 숙종은 허적등 남인들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군권을 장악한 것에 견제를 하기 위해,오류
와 하자가 없음에도 군권의 열세를 느낀 나머지 김석주를 시켜 갑인환국이 일어난지 6년만인 숙종6년
(1680)에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정권을 다시 세운다.이것이 바로 '庚申換局' 이다.이환국으로 100여명
이상의 남인 인사들이 禍를 당했다.남인의 거두 허적은 자신의 서자인 許堅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한다.
왕대비를 照觀해야 한다고 발언한 윤휴도 이때 사약을 받고 죽는다.이러자 외척인 김석주는 병조판서
가 되어 '어영대장,훈련대장,호위대장' 을 모두 맡아 병권을 한손에 쥐게 된다.
3, 서인의 도움으로 남인들을 몰아낸 외척 김석주는 남인세력을 일망타진 하기 위해 '金煥,金益勳' 등을
시켜 역모를 조작하여 밀고하게 했다.이것이 바로 숙종 8년(1682)의 '壬戌告變' 사건이다.이사건을 조작
한데 대해서 서인들 중 '趙持謙과 韓泰東' 같은 젊은 관료들 조차 못마땅히 생각했다.이때 송시열이 주모
자인 '김익훈' 을 두둔하고는 공훈과 외척세력들과 야합하자,西人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老論' 과 그를
비판하는 '小論' 으로 갈라지게 된다.이전에도 공서와 청서의 대립이 있었고,송시열과 윤증의 시비등에서
시작된 갈등은 이때에 와서 본격적으로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김석주와
송시열이 정국을 주도했으나,숙종 15년(1689년)에 숙종이 후궁 희빈장씨 에게서 얻은 아들을 원자(세자)
로 책봉하려 하자,예상대로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이 반기를 들었다.가뜩이나 서인들 위세가 강해지는
것을 못마땅 해온 숙종은 노론들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자 이를 서인들 타도의 기회로 이용했다.여기서
서인들의 비호를 받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송시열이 죽임을 당했으며,100명 이상의 서인들의 禍'
를 당했다.이 사건을 '己巳換局(1689)' 이라고 한다.
4, 남인(청남)의 거두 윤휴가 경신환국(1680)에 죽고,서인(노론)의 두목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에 죽으
니 남인과 서인의 종장(두목)들이 모두 사라졌다.이를 제대로 말한다면 이미 사림정치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였다.송시열은 효종이 죽었을때 '효종은 서자라고 해도 해롭지 않다' 고 한말 때문에 남인들
의 공격을 받아 결국 30년만에 남인 손에 죽었다.경신환국과 기사환국에서 화를 입은 사람이 100명이
넘는 대형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과거의 붕당 공존과는 달리 당파와 당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
쟁이 전개된 것이다.이는 숙종의 의도적인 왕권 때문이다.숙종은 환국과 옥사를 반복하면서 臣權을 약화
시키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 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는 장성해서는 신료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무슨일
이든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했다.숙종 20년(1694)3월 서인의 '金春澤(숙종 장인인 김만기의 손자)' 등이
궁중의 '궁인,환관,공주' 등과 연계해 남인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남인 咸以完의 고발이 들어왔다.또 서인
金寅은 희빈장씨 오빠인 장희재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원을 독살하려고 음모하고 있다고 고발을 했다.
그러나 숙종은 김인의 고발을 가볍게 보고,함이완의 고발은 집권당인 남인으로 하여금 조사케 했다.
5, 그러다 별안간 심문하던 남인 인사들을 처벌하고 서인을 기용하는 '甲戌換局(1694)' 을 단행한다.이사
건은 김춘택이 숙종의 유모를 통해 최숙원(영조의 모친)과 짜고 숙종에게 남인의 실상을 낱낱히 고해 바
침으로 일어난 것이다.이 사건으로 남인 135명이 죽거나 귀양,삭탈관직 되었고,이미 죽은 송시열등 서인
정객들의 관직이 다시금 회복되었다.갑술환국 이후부터 장희재에 대한 노론들 공격이 심해졌다.그러나
소론들은 장희재를 처벌하면 그영향이 세자에게 미친다 하여 반대했다.그런데 숙종은 27년(1701) 8월에
인현왕후가 죽자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 하여 장희빈과 장희재를 죽였다.숙종은 노.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으나 말년에 이르자 노론으로 돌아섰다.숙종은 43년(1717년)
7월 19일에 노론의 재상인 '이이명' 등과 독대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결정하고,'延仍君(후에 영조)' 과
延齡君 두 왕자의 보호를 부탁했다.그 당시 숙종과 세자(경종)와의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6, 景宗(1720~1724)이 즉위 했으나 노론들의 집권은 계속되었다.노론들은 자기들의 집권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경종을 퇴진시키려 했고,소론은 경종을 지지해 노론들의 술책을 타도하려 했다.두 세력간의
충돌은 경종원년(1721)의 '辛丑換局'과 이듬해(1722)의 '壬寅獄事' 에서 나타났다.'신축환국' 이란 소론의
金一鏡 등이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동시에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행위는 경종에 대한
반역' 이라고 몰아세워,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임인옥사' 란 노론측 고관자제들이
경종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있다는 '睦虎龍' 의 고발을 계기로 '소론이 노론을 일망타진' 한 사건이다.이두
사건을 합쳐 역사는 '辛壬獄事' 라고 한다.신임옥사에서 '金昌集,이이명,李健命,趙泰采' 등 노론의 4명 대
신이 죽고,60여명의 노론인사들이 참혹한 변을 당했다.숙종시대의 당쟁은 정책대결이나 단순한 정권교체
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료가 국왕을 선택하고,거기에 忠逆義理를 결부시키는 처절한 정쟁으로 바뀌게
되었다.노론은 있지도 않은 왕세제(이것으로 연잉군이 영조가 될수 있었다.)란 제도를 만들어 권력을 유지
하려 했고,소론은 이들을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 처참한 당화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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