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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렇게 화창하고 좋은 날씨 속에서 감삼본당 교우 분들과 함께 성지를 순례할 수가 있어서 참 좋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하루가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들 모두는 코르나19 라는 감염 병으로부터 자유롭지를 못 합니다.
따라서 순례 객들이 너무 몰려다니거나 뭉쳐 있으면 사람들의 눈총받기가 십상이니까
마이크 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쪽에서 거리를 잘 유지하시면서 신속히 이동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곳 성모당과 계산주교좌성당 그리고 관덕정 순교자 기념관 3곳이 되겠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해설을 충분히 들으시려면 한 나절에 한 지역의 해설을 듣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접해 보는 순례부터 너무 힘든 기억만 남게 되면
오히려 역 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저는 매 장소마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이곳 교구청 곳곳을 산책하듯이 두루 돌아다니면서 아주 가벼운 내용으로
소개만 해 드리는 것으로 해설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거저 가벼운 마음으로 들으시고
우리지역에도 자주 와서 찾아봐야 할 성지들이 많구나! 정도만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 나실 때 마다,
다시 한 번 더 이 곳을 찾아 와서 순례들을 하시면서 자세히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순례일정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에 순례할 장소는 총 7곳으로서
맨 첫 코스는 우리와 같은 평신도로서, 우리 대구대교구의 기틀을 잘 마련해 주신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형제님의 동상을 첫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 교구의 조환길 타데오 주교장님이 근무하고 계시는 주교관과
성모당을 거쳐서 안익사와 왕벛꽃나무 그리고 성직자묘지와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돌아보고 나서는 마지막 코스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동상 앞에서 오전순례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겠습니다.
오후 일정은 계산 성당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가셔서 점심식사를 하신 후
계산 주교좌 성당을 순례하고 10분정도를 이동하셔서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순례하는 것으로서 오늘 일정은 모두 끝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순례할 장소가 아주 많은 관계로 하루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할 수도 있겠으나, 협조 여하에 따라서 끝마치는 시간은 달라지게 되겠습니다.
그렇기에 이동하실 때에는 신속하게 이동하여 주시고
해설 시작은 순례 객들이 적당히 모이시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전방 100미터 앞 좌편 쪽에 계시는
서상돈 신앙 선조님의 동상 앞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1.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63세 선종)
이 분은 평신도로서 우리 대구대교구가 전주가 아닌 대구에 설립될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하신 분이십니다.
보통 서상돈이라는 인물을 아시느냐 물으면, 대다수 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 분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이었고
금연과 절주 등의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 자주독립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시어
일본 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의 동상이 여기에 서 계신 이유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분의 집안 가계는 우리나라에 초기 교회 공동체가 설립될 때부터
5대조 할아버지부터 쭉 신앙을 믿으셨고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순교하셨습니다.
높은 벼슬을 하던 양반집안은 믿음 때문에 벼슬자리와 더불어 문중에서도 쫓겨나고
깊은 산중 속으로 도망가서 화전을 일구며 극도의 가난 속에 굶주리며 살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존칭은 생략하고 이름을 막 부르겠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상돈이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져 갔고, 나이 13살 때는 인근가게의 심부름꾼으로 취직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꾸렸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17살 때인 1866년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큰아버지는 경상감영에서 순교하시고 작은아버지 2분이 서울 절두산과 상주감옥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큰아버지가 대구 경상감영에서 수감생활 하실 때에는 상돈 이가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하지만 상돈 이에게는 사식을 넣어 줄 돈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굶주림에 지친 큰 아버지가 마치 짐승인양, 피고름에 짓이겨진 짚 멍석을
뜯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다 였습니다.
상돈의 가슴은 너무나 아팠고 가난이 한이 되었습니다.
상돈은 13살 때부터 심부름꾼인 점원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장사할 밑천이 없었기에 동생을 담보물건으로 잡히면서 까지 지독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상돈은 타고난 장사꾼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40살 경에는 1년에 3만석이나 되는 쌀을 창고에 쌓을 수 있는
경상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돈은 이 재산을 개인의 영달을 누리는 데만 사용치 않았습니다.
상돈 나이 35세 때인 1885년도에
32살 프랑스 출신의 로베르신부가 경상도 첫 전담신부로 오셨을 때부터 사제를 도왔고
물심양변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서상돈과 로베르 신부와의 만남은
또 하나의 기적이요 신비로 작용해서, 서로간에 큰 도움을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대구의 신설교회 설립 등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던 중에,
우리나라 조선대목구를 두 군데로 나눌 계획이란 소식을 듣고선
상돈은 뮈텔주교를 찾아가서 대구에 교구가 설립될 수 있도록 청탁을 넣습니다.
내 나이 갑년입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생전에 꿈이 있다면 프랑스 루르드지방에 있는 성모님을 모신 마사비엘 동굴과 꼭 같은
성모당을 주교단 앞에 짓고 싶습니다. 부디 새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도록 해주십시오.
서상돈의 진심어린 간청에 감복한 뮈텔주교는 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대목구 다음으로 대구에 대구대목구가 설립되게 된 것입니다.
서상돈은 신설된 교구를 위해 이 지역 일대의 일만 평에 이르는 땅 전부와
많은 돈을 교구사업을 위해 기꺼이 내 놓게 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시간이 없어 설명드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업적들을 남기셨습니다.
이 분은 살아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을 성당에 바치려 한다
내가 이 만큼의 재산을 모으게 된 것은 순교하신 세분의 조상님들의 덕분이니 그들을 대신하여
이 재산을 바치는 것이라 하셨다.
서상돈의 묘지는 현재 범물동 공원묘지에 묻혀 계시고,
2010. 4. 8. 여기에 동상을 세워 그분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2. 주교관 설명
지금으로부터 백십 년 전인 1911. 6. 26일자로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제주도를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하신 주교님께서는
거처할 장소가 없어서 계산주교좌성당 근처에 있는 한옥 집에 세 들어 사셨습니다.
세 들어 살고 있는 주교님을 본 신자들은,
아무리 우리가 가난하다 해도, 모두들 자기 집에서들 살고 있는데 주교님을 셋집살이 시키는 것은 신자 된 도리가 아니요,
교회 자녀들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다.
어느 청각 장애인 신자가 주교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죽을 때가 가까웠습니다.
나는 신부님이 주교관에서 사시는 것을 보고서야 주님께로 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재산의 전부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하면서 거금인 100원을
내 놓았습니다.
이렇게 지어졌던 목조로 된 3층 주교관 건물은 1964년도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고
지금 보시는 4층 건물 은 1968. 11. 8일 새로이 지어 졌습니다.
예전에는 주교관 건물 안에 사제들의 숙소와 사무실이 같이 있었으나
1989. 7. 11에 성직자용 숙소가 다른 곳에 별도로 지어져 있습니다.
현재 본관 건물은 교구장님과 교구청(관리국과 회계과) 직원들의 사무실과
회의실로서 그리고 교구의 사료들을 보관하는 서고로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모당 안에는 19개 석상들이 있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한 1984년도에 설치되었으며,
성모당을 찾는 신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묵상기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이 곳에 있는 2개의 석상들은 성모 영보와 예수탄생을 드러내고 있으며,
성모당 주변으로 14처가 있고 교구청 입구에 산상수훈상과 성직자묘지에 예수부활과 성령강림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9처로 세워진 바위 돌은 가창댐의 수몰지에 출토된 것을 유상 매입한 돌들입니다
이 석상의 제작자는 그 당시 경북도청에서 근무하던 손석목 프란치스코 부부가
제작기간 2개월 10일간에 걸친 정성어린 기도로서 탄생한 작품이며
경북도청에서 근무하는 가톨릭신우회 회원들이 전폭적인 노력봉사의 힘이 아주 컸다.
3. 성모당
이 곳 성모당은 우리 교구청의 가장 높은 언덕 위,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세워져 있고
매월 1만 명의 신자들이 순례 오는 곳으로서
성모님이 주시는 참 위로와 평화를 받고서들 귀가하시는 사랑의 성지가 되겠습니다.
이 곳 성모당을 만드신 분은 1911년도에 대구대목구의 첫 교구장으로 부임하신 37살의 프랑스 신부였던 드망즈 주교였습니다.
그 분께서 대구로 살림을 날 때, 서울대목구장이신 뮈텔주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신설된 교구에 나눠 줄 것이 없으니까
가난이나 서로들 나눕시다. 라는 인사말을 하셨답니다.
주교님께서는 그렇게 가난하게 오셨고, 첫 출발부터 셋방살이로 시작하였듯이 교구에는
돈을 써야 할 곳은 많았으나 돈 나올 구멍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성모신심이 깊으셨던 주교님은 모든 것을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로 결심을 하십니다.
주교님은 맨 먼저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루르드의 성모님을 대구대교구의 주보 성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 교중미사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신설된 우리교구의 토대 되는 주교관 건립과 신학교 설립을 하게 해 주시고
비좁은 주교좌성당을 증축할 수 있도록
3가지사항을 이뤄 주시면, 교구청 안에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장소에다가 성모당을 짓고
교구의 전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37살의 젊은 주교는 서방세계의 각 교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연간 2500통 이상을 보낸 결과,
소망하시던 일들이 잘 풀려 나갔습니다.
성모님께 도움을 요청한 지 2년 만에 주교관을 짓게 되고 또 3년 만에 신학교 건물을 완공하였으나
그 다음해에는 세계 제1차 대전이란 전쟁이 발발하여
도움의 손길이 1/10로 줄어들게 되자 주교좌 성당의 증축자금 마련이 늦쳐지게 됨에 따라서,
이곳 성모당 건립 공사도 무한정 뒤로 미루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교님께서 전라도 지방으로 사목여행을 떠났는데, 보좌신부가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전라도까지 달려와 보좌의 중병소식을 전하는 신학생은 주교님에게 말씀하십니다.
대구에는 지금 콜레라가 만연하여 의사들이 모두 징집되어 갔기에, 현재 보좌신부님은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
신부님이 돌보던 고아원 원생들과 수녀님들이 모여서 쾌유를 비는 9일기도를 시작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급보를 들으신 주교님께서는 당초에 성모님께 약속을 했던 것들을 모두 취소하시고
보좌신부만 다시 살려주시면 주교좌성당을 증축하기 전이라 해도, 지금 당장 성모당을 지어서 봉헌하겠다고
새로이 약속을 합니다.
9일기도가 끝나는 날에 기적같이 보좌신부님은 소생을 하셨고
주교님은 곧바로 성모당 건립공사를 시작하시어 1년 만에 동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대지 천 평에 성모동굴 43평으로 성모승천대축일에 맞춰서 공사를 모두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성모동굴에 모셔올 성모상 제작을 프랑스에다 주문했는데 3월경에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을 출발했다는
성모님이 어디쯤 와 계신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애가 탔습니다.
8월달에 성모당 공사는 이미 완료되었는데 성모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할 수 없지만
이곳과 잘 어울리지도 않 유스티노 신학교 안에 계시는 키 작은 성모님을 모셨습니다.
뒤늦게야 일본 고베 항에 성모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성모님은 부산항을 거쳐 열차편으로 10월 1일이 되어서야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포장된 박스를 풀어보니까 이것이 도대체 웬일입니까?
돌로 만든 성모님이 80여 조각으로 산산이 조각나 계시는 것입니다.
아주 황망해 하셨던 주교님이 자세히 살펴보자, 성모님 얼굴과 손은 온전하신 것을 보시고, 온전하게 보수를 하여
성모굴에 모시고 1918.10.13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80여 조각의 아픈 상처를 안고 계신 성모님께서는,
감염병 때문에 힘든 세파에 부딪쳐, 부서지고 망가지고 상처를 많이 받은
우리들 마음을
나도 겪어봐서 잘 안다 하시며, 우리들을 따뜻이 감싸주며 위로해 주고 계십니다.
이 분은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성모당 건물의 크기는 가로가 15미터 세로는 9.55미터입니다.
외관은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마세비엘 동굴 모습과 거의 흡사하며
건물 벽체 모양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모양으로서, 로마에 있는 교황청의
성모마리아 기념동굴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동굴 위편에 붙어있는 저 글씨는
1911 엑스 보토 임마쿨레타 곤셉시오니 1918 라고 불리워 지는 라틴어로서
1911년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드린 허원이 1918년에 모두 이루어 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성모동굴이 모두 다 완성되시자 일군에게 저 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손수 사다리 위로 올라가셔서
직접 저 글씨들을 붙였다고 일기에다 기록해 놓았는데
정말로 성모당을 향한 주교님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성모당의 주보성인은 당연히 성모님 자신이시며
우리 대구대교구의 제1주보성인도 당연히 이곳에 계신 성모님이시며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가 지금 제대 아래에 묻혀 계십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은 우리지역인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시어 돌아가신 103위 성인 중의 한분이 되겠습니다.
이곳은 2016년도에 성인으로 추대된 마더 데레사 수녀께서 1981.5.4.일 방문하셨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1984.5.5일 성모당에 방문하셔서 기도하시고 가셨습니다.
성모당 한가운데 정면에 보이는 분이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주교님의 흉상이고
옆에 있는 넓은 돌판에는,
110년 전 성모당을 지은 경위와 신자들의 순례를 권장하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동상들 가운데 복판에 계시는 분이 6대주교인 최덕홍 주교이시고 그 옆이 7대 서정길대주교님의 흉상이 되겠습니다.
4. 안익사 (아넥세)
1931.11.1일 드망즈 주교는 우리 교구의 성직자들과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녀원 안에는 입원 병실을 짓고
이곳에는 아넥세라고 불리워 지는 부속건물을 지어서, 약을 받으러 오는 환자가 대기하는 장소 또는 사제 피정이 있을 때는
숙소로 사용했으나 건물이 오래되자, 낡고 부서져 철거해 버렸다.
현재 이 곳에 있는 안익사란 한옥 건물은 처음에는 동성로의 한일호텔 뒤편에 있었는데 도시개발로 인하여 철거될 위험에
처한 한옥을 팔공산으로 옮겨 재실로 사용했었는데 그곳도 1979년도 공산댐 축조로 인하여 수몰될 위협에 처하자,
한옥주인이 교구청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옛날의 병원 부속건물 이름인 에넥세와 비슷하게 안익사로 붙였다.
가톨릭병원이 없었을 때에는 이 건물은 사제들이 선종했을 때는
빈소로 사용되어져서, 유해를 모시고서 연도를 바쳤던 곳이다
그 이후 빈집으로 비어 있던 한옥을 2012년도에 보수를 한 후에
시민들이 와서 시와 공연 등 여러 종류의 음악회와 전시회 장소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5. 왕벚나무
이 나무는 제주도에서 사목을 하시던 신부님이 유스티노신학교 교장으로 전입오시면서
제주도에서 옮겨다 심은 나무입니다.
에밀다케 신부님은 24살 때인 1902.5.31 우리나라에 오셔서 한국전쟁 때인 1952년도 돌아가셨다.
신부님의 큰 업적은 1900년 초 학계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던, 제주도서 자생하던 식물표본 1만여 점을
전 세계로 보내어, 이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종을 최초로 발견한 자인, 신부님 이름을 붙인 타케티라고 불리워 지는 식물도 125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제주산 식물표본을 전 세계에 알리셨고 또 식물표본을 판매 하신 수익금으로 제주교구의 살림살이를
크게 키우셨습니다.
특히 여기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에 계시는 신학스승이자 식물학자 이었던 케네신부님에게 제주산 왕벗나무를 보내어
이 나무가 일본의 사꾸라 나무와는 종자가 전혀 다른 한국산 토종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스승과 제자사이인 두 신부님의 교류 덕분에
왕벚나무가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산 구마코토 지방의 온주밀감 나무가 제주도에 전파되어서 현재의 제주도산 특산품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6. 성직자 묘지
이곳은 아주 오랜 수십 년 전에 대도시 도심지 내에 공동묘지가 있다 없다라는
tv프로그램으로 메스컴을 탄 적이 있습니다.
초대교장님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사제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로 선교를 와서
선종하신 사제들을 위한 묘지를 교구청 안에 만들려고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의 경무청에서는 묘지 설립장소가 주택가 인접지역이란 이유로 불허를 하였으나
어렵사리 1915. 9. 4.일 설치허가를 받았다.
허가를 받은 공동묘지는 대지 400평이 되겠습니다.
묘지에는 드망즈주교님을 포함한 7명의 주교와 6명의 몬시뇰과 59분의 신부가 있으며
특이하게도 신부가 아닌 2분의 신학생 묘소도 함께 있습니다.
양측 편에 있는 바위들은 주교관에서 19처 바위를 설명 드린
예수 부활과 성령 강림의 성상으로서, 죽음 이후에 성령과 함께 우리들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새로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문 양쪽 기둥에는 호디에 미히, 크라쓰 티비라는 라틴어가 적혀 있습니다.
이 말 뜻은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라는 라틴말로서 집회서 38장 22절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풀이를 하자면
오늘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나의 모습은
미래의 어느 날, 그대들에게도 닥칠 당신의 현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순례를 다니고 있는 당신들의 그 모습은,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친구들이여, 단 하루 하루의 시간이라도 허투루 살지 말라고 하는
죽은 자들의 경고 멧세지가 되겠습니다.
묘지 안쪽으로 쭉 들어가셔서 십자가 주변에서 모이겠습니다.
중앙 석조 십자가에 적혀있는 글자는, 눙크 빠레미트 시그눔 삘리 호미니스 인 꼴레오라는 말로서
마태오복음 24장 30절에서 나오는 말씀인데요.
그때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는 의미로서, 항상 깨어 준비하면서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제대는 옛날에 없었고, 1918년도 성모당 축성식 때 봉헌된 제대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느냐면
이윤일 요한 성인이 1984년도에 103위 성인이 되시자 우리지역에서 최초로 순교하신 성인을,
우리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으로 삼으시고
경기도 미리내성지에 묻혀 계신 분을 이장하여 새로이 제작한 성모당 현 제대 아래에 모시고 난 이후,
사용치 않는 헌 제대를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각 비석에는 프랑스어로 이씨 레뽀즈 또는 라틴어로는 이씨 야세트라고 적혀 있는데
해석을 하면 여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석 아래부분에 있는 rip는 평화 안에 쉬소서! 명복을 빕니다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고인 사제님들의 약력은 생략하고
다함께 이 곳에 잠드신 모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구하는 주모경을 바치겠습니다.
7.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교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모여 있는 이곳은
100년 전, 사제를 꿈꾸었던 수많은 신학생들이 열심히 자신을 수련하던 학교 앞 마당이었습니다.
1911년도 대구대목구가 설립되어 주교님이 대구에 오셨을 때에는 교구가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뿐이셨습니다.
초대교구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첫 사업이 사제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구가 가진 재산이라곤 서상돈이 교구에 기증한 땅 만 평이 전부였습니다
드망즈 초대교구장은 세계 각 지역에 편지를 쓰서 재정적 지원을 요청합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그들의 아들을 주님께 바치고 있는데 학교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학교를 지어 달라는 편지를 연간 2,500통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상해에 있는 익명의 기부자가 보낸 25,000프랑으로 신학교를 짓게 되었습니다.
거금을 보낸 기부자는 단 2가지의 요청사항을 말했습니다.
설립할 신학교의 이름을 성인 유스티노란 이름을 붙여 주십시오!
그리고 신학생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게 해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셨습니다.
신학교 설계는 고딕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병행하여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하였고 건축공사는
중국인 벽돌 제조업자가 와서 외부공사를 하였고
내부공사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한 책임목수가 하엿다.
1914.10.3 신학교를 개교한 이후 폐교조치가 된 1945.3.19일 까지
31년간에 걸쳐서 5차례의 신학생 모집을 한 후에 16번의 졸업식을 거행하여
총 67명의 사제를 배출하였고 졸업생 중에서 7명의 주교가 탄생하였다.
신학교 건물은 격동기의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있다.
일제에 의해 신학교가 폐교된 이후는 일본군의 육군본부로 징발되었고
1945.8.15 해방 후에는 한국인의 경찰학교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부대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전쟁 끝나고 난 이후에는 육군병원으로 사용되다가
군부대가 떠난 이후에는 대건 중고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91년부터는 다시금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운영하다가
2014년도 신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개관하고 있으나
현재는 감염병으로 인하여 폐쇄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우리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90.12.15.일 대구시 문화제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1821. 8. 21. ~ 1846. 9. 16.
충남 당진시 솔뫼 출생
(1821년도는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가 사망한 해이자, 콜레라가 만연하던 시절)
지금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고 기도하고 있으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활동과 그 업적들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들이 없음
우리 한국 교회사 측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요 순교자로서만 강조되어 있음.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인께서 신학교 재학 시에 메스트로 교수신부는 안드레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안드레아는 행동이 자주적이기는 하나 경솔한 편이며 행동이 주의 깊지를 못하여
문제를 들쑥날쑥하게 야기 시키곤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결론 짓자면
얌전하게 자기 몸을 사리는 본인의 안위부터 챙기고 보는 소극적인 성경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다시 한번 되돌아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지극히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김대건 사제가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먼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가문은
할아버지 때부터 4대에 걸쳐서 10여명의 집안 식구들이 옥사 또 참수를 당하신 순교자집안이셨고
그중에서 3분이나 성인으로 추대되신 명문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인은 16살 때 최양업과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그 어린나이에 중국의 마카오까지 7개월 4일간을 걸쳐서 도보로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신학생 시절 때도 박해시절의 어린아이 때
영양결핍 탓으로 자주 두통과 복통과 그리고 요통에 시달리셨다고 하며
교수신부들은 김대건의 약골로 제대로 신학공부를 끝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을까를 염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인께서는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한 주교님의 지시에는 무조건 순종하십니다.
조선입국로 개척을 위한 김대건의 5번에 걸친 끈질긴 노력은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그들의 스승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1844.2.4일에는 중국 소팔 가자에서 평안도 경원까지 도보로 가신는 데
그곳의 지리도 잘 모르면서 눈보라와 폭풍이 휘몰아치는 1,600킬로 먼 길을 오직 사제들의 입국로 개척을 위해서 나서십니다.
또 24살 때에는 단독 행동으로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는
주교님의 서해 해로를 통한 사제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강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조그만 거룻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한 달간 표류하다 간신히 주교를 찿아가게 됩니다.
타고 간 그 배로 주교님과 신부1분을 모시고 조선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사목하다가 또다시 최양업 사제를 모실 수 있는
안전한 서해 해로를 개척하라는 주교님의 지시에 따라 탐험을 하시다가 붙잡혀서 26살로 순교를 하게 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역활을 수행했다.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심과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의탁함으로 김대건의 단점으로 지적된 경솔함이 오히려 용기가 되어 큰 업적을 이루었다.
성인은 사제로서 살아간 기간은 고작 13개월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으로 들어오는 입국로 개척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고
4개월은 감옥에 투옥된 상태로 보냈으며
실제로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한 기간은 약 7개월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에 우리들에게 보여 준 그 찬란한 빛들이 한국교회의 신자들과 비신자를 포함하여,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고 존경하는 사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환한 빛을 밝혀 준 것들은
그가 걸어온 26년간의 전 생애를 통해서 꾸준히 쌓고 닦아 온 성인의 삶과 신앙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순교를 한 이후로 조선 땅의 천주교인들 모두가
스스로 신앙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신자로서 갖춰야 할 지향 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인 신부의 도움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던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자력 갱생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으로 성모당 관내에 있는 7개소의 해설을 마치겠습니다.
9. 계산성당
○ 김보록 로베르 신부 (70세 선종) 1853.10.22. ~ 1922.1.2.
- 1885 왜관 신나무골 경상도 첫 사제, 1897년도 계산공소 신자 수 : 400명
- 근대 대구교육의 전파자 : 학당설립, 해성재, 성립여학교
○ 플로리안 드망즈 안세화 주교(1938년 선종) : 27년간 주교
○ 주교좌계산성당 이름의 변천사
1885년도 대구와 경상도의 첫 사제로서 로베르신부가 파견될 당시에는 성당이 없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계셨던 신나무골을 대구본당이라 이름 붙였다.
1898.12.25 로베르 신부는 한옥식 계산성당을 지은 후 루르드의 성모님을 교회주보로 모시면서 성모성당이라 했었고
이름을 줄여서 성모당이란 간판을 붙였다.
이후 천주교는 성모님을 모신다는 오해를 받자 천주당이라고도 했었다.
일제시대 때에는 명치정 성당이라고도 불렸으며
1918.10.13. 성모당 봉헌식을 하고 난 이후로서, 주교좌성당 증축 완료한 1919. 5월 이후부터 동네이름을 따서
계산성당이라 명명하였다.
○ 한옥 십자형 성당 건축
1891.12월경 남산공소로 거처를 옮긴 로베르 신부는
신자들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한결같이 보여준 열성으로 3년만인 1898. 6월경에
한옥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의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을 지었다.
사제관은 2층으로 짓고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고용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하였는데
그 중에서 2분이 개종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성당은 인천 답동성당 두번째는 중림동의 약현성당이고 세번째가 종현성당이며
이들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4번째로 지은 계산성당은 한옥으로 축조했다.
신부는 유럽식 성당으로 짓고 싶었으나 지리적 여건이나 건축기술자나 기술도 없고
재료조차도 구하기 힘들었고 재료를 옮기는데도 거액이 들었다.
그 당시 대구에는 벽돌 굽는 기술자도 없어 중국기술자를 불러 섰다.
○ 1950.12.12.일 박정희 대통령 결혼식 거행 (민선시장 허억)
○ 1984.5.5. 성 요한바오로 2세 방문함
○ 증축
1898.12.25.일 축성한 한옥성당에 1901.2.4.일 새벽2~3사이 지진이 발생하여 제대 위에 켜둔 성체등의 촛대가 넘어지면서
제대보와 양탄자에 불이 옮겨 붙어 성당이 전소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본당설립 14년만에 봉헌식 이후 40일 만에 일어난 화재였다.
뒤 늦게서야 목조 성당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로베르신부가 알고서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성수가 담긴 물병을 들고 나와서 불 속으로 던졌다고 일기에는 적혀 있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에 인접한 해성제와 초가집에는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고서 불이
진압되었다고 한다.
봉헌식을 한 이후로 40일 만에 한옥성당이 불 타 소실되었지만 로베르 신부는 더 크고 좋은 성당을 지으라는 계시로 알고 1901년 성당 재건 공사를 시작해서 1902년 완공했는데 평신도인 서상돈과 김종학 그리고 정규옥이 후원금을 내었다
1903.11.1.일 8대 조선교구장이신 뮈텔주교님이 오셔서 성당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 뒤로 1911년도에 대구대목구 초대 교주장으로 오신 드망즈 주교는 신자 수에 비해 좁은 성당의 증축을 원했다.
증축공사는 성당의 제대 쪽 벽을 부수고 뒤편 쪽을 뒤 쪽으로 물리고 양옆을 달아냈다.
면적은 약 100평 정도로서, 증축 자금은 김종학 베드로와 한윤화 야곱이 냈다.
종탑도 두배 정도로 높였다.
증축공사 완료 후 1918.12.24. 봉헌식에서 성당을 주교좌성당으로 축성하였다.
계산주교좌성당 설계는 명동성당을 건립한 프와넬 신부가 하였고
중국인 인부들이 와서 공사를 담당하였다
○ 2차 보수공사 : 91.6.21 ~ 92.8.14
천정 대리석바닥, 한국성인 스테인그라스 설치
○ 성당 앞 석조 십자가
같은 모양의 석조 십자가가 복자성당과 월성성당에도 있어서 모두 세 개가 있다.
이 십자가는 1936년도에 설치가 되었는데 이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고 대구대교구의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고
드망즈 주교님의 주교 서품 25주년 은경축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 스테인그라스(12사도 및 성인과 문장들)
실명제 스테인 그라스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밑에 명찰 부착)
- 앙리 루이 빅토르 제스타(제작처 제작자)
- 1902.10.3. 블라디보스틱 항구를 거쳐 대구로 옴
- 명동성당 (대문자로 제스타 표기)
- 총 40장 설치됨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예수, (루르드의 성모 동굴), 성모, 요셉
4복음사가 (마테오 루까 마르코 요한)
12사도 와 문장들
한국 성인 10분
○ 제대 옆 4대 성인상
- 성녀 소화데레사, 성 안토니오, 예수성심상, 성 요셉상
○ 사적 제290호 지정 (1981년)
계산성당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 붉은 십자가패 : 로베르신부 12사도를 상징함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대 : 1963 ~ 1965
○ 김보록 로베르 공원조성 : 1896년 설립 100주념 기념
흉상 어록 : 세상의 부는 썩어 없어지고
영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만 진리는 영원하다
○ 계산성당 역사관
조선대목구에서 분리된 1911.4.8.일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대구대교구의 확장된 교세를 한 눈에 살펴 볼 수가 있는 장소이다.
10. 관덕정 순교기념관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며
수많은 신앙선조들이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참수치명을 당하신 거룩한 장소이다
관덕정이라 함은 조선시대 무과의 과거시험 실기과목으로 활쏘기 등을 하던 관청으로 영조임금 25년에 세워진 건물로서
옛 이름은 관덕당이다.
관덕당은 누곽과 넓은 마당이 있어 군사훈련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기에 이곳에서 사형집행도 이뤄졌다.
이곳 관덕당에서
1815년 을해박해 때 7명 순교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윤일 요한 성인 외 6명이 관덕당에서 순교하셨다.
이윤일 요한성인의 유해는 날뫼와 묵리교우촌 등을 거쳐서 1976년에는
미리내의 순교자묘역에 안치된었다가
1984년 성인이 되신 이후로 1986.12.21. 교구청 경당에 모셨다가
1987.11월 성인의 순교일에 맞춰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시고 성모당 제대 아래에 계시다가
1991년 이곳 관덕정 순교기념관이 완성되자 지하성당의 제대로 안치하게 되었다.
○ 성곽 모양의 외형은 우리들의 굳건한 신앙정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곽모형으로
화강석으로 쌓았다.
○ 베네딕토 수녀회 소속의 문크리스티나 수녀 작품
- 마치 엘리야가 불가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듯이 이윤일 요한외 다수의 순교자들이 하늘나라로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함
○ 색 유리화 : 김은호 뽈리나
- 요한 성인의 순교장면, 승천
○ 성 이윤일 요한 청동상 : 최홍록 교수 2.2미터
○ 기념관 내부 안내
지하성전, 성인 유해 현시실, 전시실과 누각
첫댓글 섬세한 설명에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