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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5월27일(금)흐림
맑은 듯 흐린 듯 하루가 가다. 오전에 목욕탕 가다. 저녁 강변 산책하다.
2016년5월28일(토)흐림
아침에 유미보살 운전하여 부산 서면에 있는 영광도서에 도착하다. 부산에 와본지 얼마나 되었던가? 낯선 외국에 온 것 같다. 영광도서는 한국에 현존하는 서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부산이 자랑할 만한 문화공간이다. 이경순 부원장 만나 커피 나누고 4층 문화사랑방을 둘러보다. 정안보살과 청신보살, 최윤영 민족사 편집위원, 유미네 모녀와 같이 점심 먹다. 출판기념회 분위기가 나도록 포스터를 부치고 무대를 꾸미다. 최윤영이 붓다프로젝트2쇄판 50권을 갖다놓다. 정안보살 따님이 사회를 본다. 정안보살의 따님의 은사가 오셔서 하모니카연주를 해주어 분위기를 깔아준다. 내빈 소개 시간에 나의 고3 담임선생님이셨던 전병익 선생님과 작은 아버지를 소개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다. 그때 일진스님이 오셨다. 숙부와 숙모와 고모와 여동생 보인과 선숙이도 왔다. 나는 법문 아닌 법문을 하였다.
우리가 만난 인연은 책이다. 세상은 한 권의 큰 책이며 각각의 인생이 하나의 책이다. 내 삶의 책 속에 모든 사람의 책이 들어와 스며들며, 나의 책이 모든 사람들의 책속으로 스며든다. 서로가 서로의 텍스트가 되면서 세상이란 하이퍼텍스트hypertext가 써진다. 지금여기 우리가 만나서 함께 쓰는 ‘지금여기’의 책은 어떤 내용인가? 관계맺음, 인연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책이 있다.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이다.
그 책 속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린왕자가 사는 혹성에는 사막 여우가 있다. 어린왕자가 사막 여우와 친해지려하자, 여우가 말하길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어. 길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니?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 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 참을성이 있어야 돼. 처음에는 조금 떨어져 멀찍이 앉아줘. 그리고 말은 하지 마.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조금씩 다가와. 그러며 점점 가까워지게 돼. 우리가 네 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여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우리 내면에 깃든 여우같은 마음이다. 의심하길 좋아하고, 남의 말을 삐딱하게 듣고 남의 진심을 비틀면서 빈정대는 버릇, 남의 잘난 점, 좋은 점을 인정하는데 아주 인색한 경향을 상징한다. 우리 내면에 여우가 있음을 인정하고 살살 다가가서 조금씩 길들여야 한다. 마음을 길들이는 일이 수행이다. 절의 대웅전 벽에 그려진 십우도는 마음 길들이기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아 제 고집대로, 제성질대로 막나가는 버릇을 ‘검은 소’로 상징한다. 검은 소에 멍에를 씌우고 고삐를 당겨 살살 다루어나가는 것이 마음 길들이기이다. 검은 소가 잘 길들여지면 ‘하얀 소白牛’가 되고 급기야 ‘텅 빔, 인우구망人牛具忘(소와 소치는 목동 둘 다 사라진다)’이 된다. 또 어린왕자의 혹성에는 장미꽃과 장미꽃을 뜯어먹으려는 양이 있다. 장미꽃은 사람이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품성, 정신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진선미이다. 이것을 잘 보호하지 않으면 양에게 먹힌다. 양이란 미련함, 우매함, 게걸스럽게 모든 걸 먹어치우는 탐욕, 소심함과 비겁함이다. 도둑이 들어와 옆의 양을 잡아가는데도 자기만 잡혀가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울지 않은 ‘양들의 침묵’을 보라. 내 마음 속의 양이 장미꽃을 먹어치우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이 ‘알아차림’수행이다. 내가 길들인 장미꽃은 내가 책임져야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자기가 길들인 것을 책임져야한다. 내가 길들인 것, 내가 정성을 쏟은 것은 무엇인가? 나의 가족, 나의 이웃, 우리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길들여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을 잘 길들이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잘 길들여진 마음이 최상의 보배이다. 어린왕자는 혹성에서 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혹성에 산다. 혹성이란 자기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계, 12처와 18계이다. 자기 세계의 주인공이 어린왕자이다. 어린왕자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때 묻힐 수 없는 양심, 끝까지 지켜가야 할 동심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양심을 저버리고 동심에 때를 묻힐 때 어린 왕자는 죽는다. 자기 마음속에 어린 왕자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자기 마음속에 장미꽃이 양에게 먹혔는가, 먹히지 않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데서 붓다프로젝트는 시작된다. 붓다프로젝트, 부처님의 사업이란 인류가 함께 깨어나기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어린왕자가 깨어난 별빛 아래 바른 길을 찾아가게 하라. 이것이 싯다르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사람마다 그 길에 동참하자고 권한다. 싯다르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법을 깨달아 마음이 기쁜 자는 홀로 있어도 행복하다. 이 세상 어떤 생명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자는 행복하다. 모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는 교만한 마음을 놓아버린 사람은 견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리라.”
그런 사람은 세상에 어떤 이익을 주며 어떤 역할을 할까?
별 하나가 행복하면 밤하늘 전체가 행복해지고, 섬 하나가 평화로우면 바다 전체가 평화가 된다. 당신은 행복한 별이요, 평화로운 섬이다. 우리 모두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별이 되고, 고해에서 표류하는 중생이 귀의하여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섬이 되자.
끝으로 잠간 눈을 감고 들숨 날숨 알아차리기 명상을 하자. 그리고 스님을 따라 합송하자.
나에게 미움과 원한이 없기를.
나에게 근심과 불안이 없기를.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나 자신인 듯이 대접하겠습니다.
우리가 탐욕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탐욕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우리가 미움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우리가 다툼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다투지 않고 살아가기를.
우리가 사랑이 적은 사람가운데서도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우리가 아픈 사람들 가운데서도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우리가 아무런 장애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우리가 몸에서 빛이 나는 하늘 사람처럼 기쁨을 먹고 살아가기를.
이렇게 법문을 하고나기 40분가량 지났다. 그리고 사진 촬영하다. 책에도 사인을 해주다. 참석인원이 아마도 50명가량 되는 듯했다. 뒤 늦게 오신 분도 있다. 是禪院시선원 又玄우현거사와 보살 두 분이 오셨다. 일진스님과 함께 해운대에 있는 시선원 명상센터를 방문하다. 시선원은 주택가 가운데 위치하여 생활에 실용적인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중고생을 위한 명상모임과 통증치유프로그램(MBSR)이 인상적이다. 나와 일진스님과 우현거사 수행과 포교의 제반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누다.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다. 정안보살 팀과 합류하여 진주로 돌아오다.
2016년5월29일(일)흐림
오전에 청량심보살이 가족을 데리고 오다. 12시에 시외버스터미널로 최윤영이 온다고 하다.
밤에 <어린왕자>애니메이션을 감상하다. 성장하여 어른이 되데 동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어른이 된 어린왕자라 한다.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네가 돌아가야 할 혹성에 두고 온 장미꽃을 기억하는가? 당신의 혹성이 바오밥나무에 먹혀서 황폐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는가? 진정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자기의 혹성으로 돌아간 어린왕자가 오늘 밤하늘 어디선가에서 웃는 웃음소리를 듣는가? 그러면 아침놀과 불타는 정오의 하늘과 장엄한 저녁놀이 모두 나의 장미꽃이다. 그것은 내가 길들인 님이요, 나를 사랑하는 님이다. 싯다르타는 오늘밤 네란자라 강을 건너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어린왕자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2016년5월30일(월)흐림
도향스님 강의 듣다. 설일체유부, 정량부, 경량부의 견해를 이야기 하다. 중관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 여러 부파들의 견해를 섭렵하는 것이다.
2016년5월31일(화)맑음
한 여름 같은 날씨. 오전 10시 우체국에서 노노정사 사무장에게 서예작품 보내고 죽향으로 가서 초심반 오전 강의하다. 점심 먹고 돌아와 쉬다. 초심반 저녁 강의하다. 아미화보살의 아들을 비롯한 신입회원이 생겼다. 우주적 에토스Ethos로서의 불교를 이야기 하다.
2016년6월1일(수)흐림
하루 종일 피곤하여 누웠다. 저녁에 도향스님 강의 경청하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견해를 이야기하다. 그 부파들은 인식의 근거와 동력인이 대상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을 이루는 궁극의 요소를 찾으려고 물질을 부수고 부수어 극한까지 간다. 그래서 假立가립한 것이 궁극의 요소 극미진이다. 이것들이 쌓여서 각종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유방식을 가진 불교도를 분별논자라고 한다. 현재 남방불교 교학체계에서 이런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로 담마dhamma法을 정의한다. 그리고 ‘아위닙보가avinibbhoga,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물질의 근본요소를 설정한다. 이런 것들이 뭉쳐 고분자화합물 같은 깔라빠kalapa를 설정한다. 그리고 마하붓따mahabhuta(즉 지수화풍 사대 원소)라는 것으로서 물질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삼는다. 또 시간의 최소단위로 찰나(khana)가 설정되면서 마음은 찰나생멸하는 상속(心相續citta-santati)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법(대상dhamma)과 마음(찰나생멸하는 citta마음)이 서로 의존적 관계(연기)한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물질(대상)과 정신(마음)은 근본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요소들끼리 연기함으로써 일체의 현상을 설명한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항상하는 자아는 없다. 요소연기설이며 오온무아이다. 자, 여기까지 좋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면 무슨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가? 현대물리학에서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물질을 분석하여 근본요소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원소, 원자, 소립자, 양자, 쿼크, 힉스입자이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다른 이름의 입자가 찾아질지 모른다. 이런 식의 접근방식은 순한오류에 빠진다. 작은 것, 그보다 더 작은 것, 그보다 더 더 작은 것,,,,최종적으로 근본적인 ‘어떤 것’이라 명명하자마자 그 보다 더 작고 근본적인 것이 튀어나온다. 이 과정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최종적인 근본입자’란 포착할 수 없는 가상의 개념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극미세계의 현상을 관찰할 때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대두된다. 물질과 에너지가 상호교환가능하다는 질량과 에너지 등가 법칙이란 게 있다. 이것은 물질을 이루는 최종 근본입자란 가상의 개념이라서 포착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질(대상) 그 자체가 인식하는 주관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관측자 원리와 쉬뢰딩거Schroedinger의 고양이라는 역설로 이해된다. 이쯤 되면 현대과학에서도 물질의 최종입자를 설정하여 찾아내는 데는 무리가 따르며, 물질현상을 관측할 때 인식주관의 요소를 고려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설일체유부에서 유식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온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과학이 유식의 견해까지 진전할 수 있을까? 하물며 중관의 견해에 까지 이를 수 있으랴?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견해를 쉽게 단순화 하면 요소실재론이다. 만물 즉 정신과 물질현상을 요소로 환원할 수 있고, 요소들끼리 상호작용하여 일체 현상이 생성소멸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유용하고 편리하다. 그러나 요소실재론을 더 밀고 나갈 경우, 그 요소는 어떤 亞-요소로 구성되었는가? 그 亞-요소는 어떤 次亞-요소로 구성되었나? 次亞에서 次 次亞, 또 次 次 次亞...이렇게 무한이 분석해 들어감에 끝이 없게 된다. 이런 것은 순환오류이다. 처음부터 시도가 잘못되었다.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답이 돌아온 것이다.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답하실까? 제행은 무상하다, 모든 현상은 변한다고 하셨으니까 근본요소는 이름만 있지 사실로 포착할 수 없다. 왜? 근본요소를 찾아 이것이라고 할 때 벌써 그것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관측된 현상을 현재에 붙잡아둘 수 없다. 왜? 근본요소라고 관측했을 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는 붙잡을 수 없다. 현재라고 하면 벌써 그 현재는 흘러가버려 더 이상 현재가 아니다. ‘현재’란 이름만 있는 개념이지 사실이 아니다. 대상(물질)의 정보가 대상에서 출발하여 인식주관에게로 향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먼저이고 관측자가 다음인 것이 아니며, 대상이 능동적이고 관측자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이 인식되는 무대(관측measurement이라는 연극)에서 대상이 주연이 아니고 관측자가 조연이 아니다. 그런데 반대로 관측자가 주연이고 대상이 조연일까? 관측자가 능동적이고 대상이 수동적일까? 관측자가 정보를 대상에 투사하여야 비로소 그 대상이 관측자에게 관측되는가? 이렇게 접근하면 유식학파의 견해가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현재를 관망해보면 요소실재론자들이 과학담론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칼 세이건Carl Sagan의 부인인 린 마굴리스(ynn Margulis, 1938~2011,미국의 생물학자) 일체의 생명들의 근본요소는 세포라고 말한다. 세포구성론이라 할 만하다. 유전이나 진화라는 현상도 세포구성론으로 설명된다. 소립자물리학의 경우 힉스입자까지 나왔으나 아직 거기까지 이다. 중력자graviton, 타키온tachyon, 액시온axion까지 말하고 있으나 아직 GUT대통일장이론grand unified theory은 모색 중이다. 과학에서 아직 중관까지 오려면 요원하다. 하물며 철학은?
2016년6월2일(목)맑음
오후에 연우담에서 회장단 회의하다. 강변을 걷다.
2016년6월3일(금)맑음
대구 관오사에 와서 점심 먹고 불교방송국으로 걸어가다. 6월분 방송할 녹음을 하다. 13분 분량을 네 번하니 한 시간 반가량 걸렸다. 혜진스님과 수행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도연스님이 왔다. 셋이서 함께 앞산공원으로 산책 나가다. 대덕사와 은적사를 방문하고 밤길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다.
2016년6월4일(토)맑음
대불련 활동을 같이 했던 德山거사 전명철이 친척 상을 당했다고 와서 염불해줄 것을 부탁한다. 카톨릭병원 영결식장으로 가다. 지우스님이 니까야에서 뽑아 만든 천도문을 가지고 가서 유족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독송하였다. 삶과 죽음에 대해 간단한 법문을 마치고 돌아오다. 고운사 騰賢등현스님이 와계셨다. 스님과 실로 14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01년쯤 인도 뿌나에서 만났다 이제 다시 본다. 스님은 뿌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다시 바라나시 싼스끄리뜨대학에서 범어와 티베트어를 배워 원전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이제 귀국하여 고운사 화엄학림의 학장 소임을 맡고 있다. 초기불교 니까야와 아비담마에서 시작하여 구사론, 유가사지론으로 배움을 확장하여 대승과 상통하려한다. 결국 남전과 북전불교의 회통을 염두에 둔다. 각묵스님도 오셨다. 담마상가니Dhammasangani를 완역하셨다고 한다.
일단의 시주들이 스님들께 공양청을 한다. 점심공양을 하고 돌아와 모임을 시작하다. 자자를 함으로써 모임의 분위기가 자리 잡힌다. 이어서 혜진스님이 동아시아불교사를 발제한다. 스님들 간의 질문과 답변이 개진된다. 중간에 차를 마시고 아홉시까지 계속하다. 회향을 하고 7월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지다. 등현스님과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
2016년6월5일(일)흐림
혜진스님과 경주 고위산 백운암에 오다. 한적하고 아늑한 곳이다. 주지인 백운스님은 한 소식했다고 하며 사람들은 가르친다. 들어보니 별 것 아니다. ‘아는 것을 아는 그 놈’을 붙잡아 마음자리이니 성품이니 한다. 요즘 깨달았다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것은 힌두계통의 성자들이 말하는 주시자, 보는 자, 혹은 유식에서 말하는 自證分자증분을 근본성품으로 붙잡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뭐하려고? 뭔가 항구불변하며, 믿고 의지할 만하며, 내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며, 경전과 조사어록에 맞춰볼 때 그럴듯하니까, 그걸 가지고 살림을 삼는다. 그게 바로 識식을 가지고 깨달음으로 삼는 경우이다. 부처님께서는 식이 윤회에도 변하지 않고 항상 한다는 믿음을 사견이라 단정하셨다. 그런 것이 常見상견이 아닌가? 바로 이야기 하면 그게 바로 에고이다. 탐진치가 똘똘 뭉친 게 ‘아는 것을 아는 그놈’이다. 볼 때 봄에 물들지 않고 보는 작용을 하고, 들을 때 들음에 물들지 않고 듣는 작용을 하니 그 자리, 본체를 깨달아 가지고 걸림 없이 살면 된다고 가르친다. 이건 불교와 아무 관계도 없는 똥고집 ‘한 물건’타령이다. 불교를 어쩌면 이토록 수준 낮게 만드는가? 겨우 그런 걸 가르치려고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겠는가? 불교가 ‘이거 하나만 알면 다 된다.’라고 말할 만큼 만만한가? 너무나 한심하여 한숨이 난다.
첫댓글 스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출발하는 감성의 불교에서 물리학과 연결되는 요소실재론..유식 중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평이 확장되어 가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
각묵스님이 담마상가니를 번역하셨군요.
출간 기대합니다.
한 마음, 한 물건 타령이 만연하고 그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양 호도되고 있는 현실...스님께서 바로 잡아 주십시오 ()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다'라는 물리는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이 일어나기 때문으로 빗대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