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 피그말리온 효과 (무지개원리 차동엽 p76)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한 것으로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있다.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이 말은,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용어 역시 기대효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생각)가 놀라운 행동변화를 낳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로버트 로젠탈(Rolbert Rosenthal)은 이러한 내용의 연구를 실제 초등학교 실험에서 증명해 냈다. 로젠탈은 우선 초등학교 교사에게 학생들에 대한 기대를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정보 즉, IQ 점수를 제공하였다. 로젠탈은 교사가 높은 IQ 점수를 받은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기대를 가지고 그들을 미묘한 방식으로 격려하거나 호의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결과, 학기가 끝나갈 무렵 로젠탈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즉, 교사가 일반 학생들보다 더 큰 지적 성장을 기대했던 IQ 점수가 높은 학생들이 큰 점수의 향상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그 효과 는 저학년에 매우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이것은 생각이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려주는 극명한 사례다.
교사들은 IQ 점수가 높은 학생에게 더 자주 미소 지었고, 더 많은 시선을 주었고, 수업 중에 이 학생들의 응답에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따라서 기대를 받는 학생들도 학교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고, 실수를 해도 교사들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성적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교사의 기대는 학생의 IQ 점수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음이 드러났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생각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놀라우리만큼 큰 영향력이 있다.
* 수도원에서 온 편지 2022_11 경향잡지 p14-17
삶이 힘든 그대에게
글_안혜경 마리아 베르나데타 성가소비녀회 수녀, 총원에서 소임한다. 그림_빈정아
지금, 어둡고 시린 길 위에 홀로 선 그대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단한 하루하루였는지, 호의도 예의도 없는 삶의 거친 손길이 얼마나 그대의 등을 떠밀어 댔는지, 기울어진 어깨너머로 신산했던 날들을 짐작해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멀고 힘든 길이었을 텐데, 또다시 예기치 않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땅바닥, 그 바닥까지 가닿은 절망 앞에 무슨 말인들 위로가 될까요.
하지만 그대는 그분, 골고타 언덕길에 세 번이나 넘어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길바닥에 세 번째 처절하게 엎어지셨을 때 그분께서도 어쩌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으셨을 것만 같습니다. 다시 일어설 힘도 의지도 다 바닥이 나 버린 무력하고 지친 몸,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스러져 흙이 되고 싶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신 자리에는 그분을 도와드리던 키레네 사람도 베로니카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였던 그 순간에 그분께서는 어떻게 다시 일어서실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힘도 타인의 도움도 아닌 저 너머의 힘, 가장 밑바닥까지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분의 힘, 그것은 신비이고 은총입니다.
지금 힘든 그대, 절망으로 넘어진 그대의 삶 또한 신비롭고 은총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저의 작은 실패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소명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한 일들이 거듭거듭 실패했을 때, 첫번째 실패는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 실패했을 땐 '두 번 정도는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실패했을 때는 제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냥 길바닥에 누워 버리고 싶은 몸과 마음을 간신히 추슬러 집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대로 침방에 들면 아침까지 침대 모서리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을 제 모습이 떠올라 그렇게 밤을 견딜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캄캄한 성당에 감실 등만 홀로 깨어 있었습니다. '하느님, 그만둘래요. 다 그만둘래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릅니다. 문득 한목소리가 올라왔습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포기하고 그만두는 것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구나! 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느낌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습니다. 그 무겁던 마음을 일순간에 다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밤에 제기 일은 그저 하느님 앞에 저의 실패와 무력함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었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저의 실패는 여전히 현실이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거기까지가 끝이라고 여겼던 제가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만 달랐습니다. 약한 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힘을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진다는 신비를 조금은 알아들은 것이겠지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고, 우회할 수 없고, 합리적으로 탈출할 수 없는 그런 어둠의 시간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은 부서지고 가난하고 무력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어두운 신비에 자신을 열고 기다리는 일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어둠이 우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묵상하고 새롭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지금 그대의 삶에 깊이 개입하신 하느님께서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무엇을 창조하시려는지, 어떤 새로운 일을 하시려는지 경이롭게 바라보면 어떨까요? 지금은 온 인류가 함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탈출구가 없는 시련으로 우리의 일상을 잠식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년 전 성베드로대성당 광장에서 인류를 위해 특별 기도를 바치던 날을 기억합니다. 저녁 비를 맞으며 홀로 계단을 오르시던 교황님의 뒷모습에는 수많은 생명이 속절없이 죽어 감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한없이 고통스러운 아비의 심정이 무겁게 실려 있었지요. 그날 그분은 풍랑을 만난 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류가 탄 배에 불어닥친 코로나라는 거센 돌풍은 우리의 가면을 벗기고 우리 계획, 우리 습관과 소유를 건설했던 그 거짓되고 과장된 자신감의 민낯을 드러나게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모두가 가면을 쓰고 살아오면서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웠지 않나요? 이제 코로나가 벗겨 버린 가면을 습관처럼 다시 쓰지 말고, 좀 부족해 보여도 맑고 순한 본디의 얼굴로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 좀 덜 힘들 것 같습니다. 코로나 덕분에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으며 모두가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 경쟁의 달음박질은 그만 멈추고 '혼자 빨리'가 아니라 '함께 멀리 걸어가는 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깊고 어두운 밤을 지나는 그대, 부디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꿈꾸고 희망하고 시작하는 그대의 아침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