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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조선의 제4대 임금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방탕했던 형 양녕대군 대신 세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국방을 강화해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 조선의 영토를 확정지었다. 또 과학의 발전에 힘을 쏟아 천문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이외에도 여러 제도를 정비해 조선을 안정시켰고 아악과 향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등 궁중음악을 완성했다. 이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이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강직하고 청렴한 재상들이 세종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세종 조에 재상을 지낸 황희, 맹사성, 유관 세 사람을 조선 초의 세 청백리라 하여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 부른다.
조선조 최고의 재상, 방촌 황희
경기도 파주의 임진강 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의 유유자적한 이름이다. 반구정에 올라서면 임진강의 유장한 흐름과 강 건너편의 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풍경이랄 순 없지만 넉넉해서 흡족한 풍경이다. 이 간결하고 넉넉한 정자의 주인은 조선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방촌 황희다. 황희는 87세이던 1449년(세종 31년) 관직에서 물러나 이 반구정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다 90세이던 1452년에 세상을 떠났다.
황희는 세종대왕 재위 시 무려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대왕과 함께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방, 예법, 문화 등 황희의 손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지만, 농민과 노비 등 하층민들을 위해 농사법을 개량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것이 특히 눈에 띈다. 또 성품이 인자해 사람들을 따듯하게 대했으나 공무에서는 원칙을 엄하게 지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구정 아래 영당과 다른 건물들의 모습이다.>
황희는 고려 말 명문가에서 태어나 28세이던 1390년(고려 공양왕 2년)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2년 뒤인 1392년에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1394년 조선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 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태종 이방원이 황희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한 번은 황희가 병이 들어 입조하지 못하자 태종은 내의를 보내 황희의 병을 치료하게 하고, 이들이 황희의 병을 치료하자 상을 주기까지 했다.
1418년 탄탄대로를 달리던 황희도 정치적 시련기를 맞는다.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아들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세자로 임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고, 충녕대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때 황희는 세자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훗날 세종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룩한 황희가 충녕의 세자 책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만일 이때 태종이 황희의 뜻을 따랐다면 충녕은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세종대왕은 역사에 등장하지도 못할 뻔했다.
남원에 유배된 황희는 남원에 큰 흔적을 남겼다. 남원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광한루를 세운 것이다.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누각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광한루를 처음 세운 사람이 황희라고 전해오고 있다. 황희는 이 자리에 누각을 세우고 광통루(廣通樓)라 이름 지었는데, 훗날 정인지가 광한루(廣寒樓)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었졌던 것을 다시 세운 건물이어서, 황희 당시의 광한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현재의 광한루는 규모나 형태 면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으로, 춘향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특히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익루(翼樓)를 붙여, 누각의 품격을 한층 더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광한루. 2층 누각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누각이 익루이다. 광한루에 오르려면 익루를 거쳐 올라야 한다.>
황희가 남원에 유배되어 있는 사이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지 두 달만에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세종은 1422년(세종 4년)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황희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이때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희를 복권시켰다. 당시 신하들이 황희를 다시 처벌할 것을 주장하자 세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희의 죄는 처음부터 말할 만한 것이 없고 태상왕께서 스스로 결단한 것인데 경들이 황희의 죄를 어찌 아느냐.
그리고 몇 달 뒤 세종은 황희를 다시 관직에 불러들였다.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황희를 해배시키고 그의 죄 없음을 자신이 직접 선언하고, 다시 황희를 관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세종의 비범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출신과 과거를 따지지 않았다. 천출인 장영실을 정3품 자리에 앉힌 것도 세종이었다.
이때 황희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이 반대한 임금 세종이 자신을 복권시키고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으니 이보다 더한 성은은 없었을 것이다. 사약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려 자신을 중용했던 것이다. 이후 황희는 세종을 도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황희, 청백리인가 부패 정치인인가
18년 간 영의정을 지내 조선 최장수 영의정의 영예를 누린 황희지만, 그는 청렴하고 검소한 청백리로 더 유명하다. 황희가 얼마나 청렴했는지는 전해오는 옛 속담 하나가 잘 말해주고 있다. ‘황희 정승네 딸들 치마 입듯’이라는 속담이 전해오는데, 손님이 오자 치마가 하나밖에 없어 황희의 두 딸이 치마를 번갈아 입고는 하나씩 손님께 인사를 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실제로 황희가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부자로 살진 않았겠지만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 딸들 치마 한 벌씩 해줄 돈이 없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과장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희의 청렴함에 대한 일화가 수도 없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황희가 조선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임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황희가 청백리가 아니었으며, 부패 정치인이었음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일로 황희의 사위인 서달의 살인 사건이 있었다.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의 아전을 때려죽인 일이 벌어지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맹사성에게 부탁해 이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에게 이 일이 알려져 의금부의 재조사가 실시되고 결국 황희와 맹사성은 파면되었다. 또 황희가 태석균이란 부패 관리를 옹오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때마다 곧 황희를 다시 중용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벼슬을 하며 큰 재산을 모았고 궁의 패물을 훔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단종 즉위년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호문이란 사람이 황희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썼다. 이 글은 황희를 심하게 비난하는 내용으로, 황희가 대사헌의 자리에 있을 때 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대사헌이라 불렸으며, 박포라는 자의 아내와 간통을 했으며, 심지어 황희가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니라 첩의 자식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록에서는 정인지, 김종서, 황보인, 성삼문, 허후 등 아홉 사람이 모여 이 글을 놓고 회의를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모두 황희의 부패와 부정에 대해 들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호문이 망령되고 단정치 못한 자이므로 사사로운 감정을 적은 글이니, 이호문의 글은 사기에서 빼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사관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이호문의 글은 사기에서 삭제되었지만, 이들 아홉이 모여 이호문의 글을 사기에서 삭제하자는 회의 내용을 사기에 실어버린 것이다. 이 내용이 와전되어 황금대사헌이니 간통이니 하는 불미스런 단어가 황희에게 따라붙은 것이다.
하지만 사위 서달의 사건이나 태석균의 사건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태석균의 사건으로 신하들이 황희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자 세종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대신은 가볍게 죄를 주지는 못한다.
세종도 황희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황희가 과연 청백리였는지 지금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부패 정치인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아홉 사람의 회의에서 허후가 했던 말을 들어보자.
“나의 선인께서 매양 황상을 칭찬하고 흠모하면서 존경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사람됨이 도량이 매우 넓으며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수상이 된 지 거의 30년에 진실로 탐오(貪汚)한 이름이 없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의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거만이었겠는가? 그가 친구의 문유(問遺)를 통한 적은 간혹 있으나…”
문유(問遺)란 안부를 묻고 선물을 준다는 뜻이다. 허후의 말에 의하면 황희가 선물 정도는 받았지만 탐오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황희의 부정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며, 이호문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들 대신들이 이미 죽은 황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겠는가.
황희가 비록 전하는 말처럼 허름한 집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를 부패 정치인으로 몰아가는 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황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파주의 반구정은 언제 가도 한가롭다. 반구정 바로 옆에 반구정의 이름을 빌려쓰는 장어집은 늘 붐벼도 반구정을 찾는 사람은 없다. 이름처럼 갈매기나 벗하기 좋은 자리인 것이다. 현재는 반구정 외에도 영당과 경모재 등의 건물을 세우고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맹사성과 맹씨행단
세종 때 황희와 함께 명재상으로 꼽혔던 인물이 고불 맹사성이다. 맹사성 역시 고려 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가 재상까지 지냈다. 맹사성은 성품이 온화했지만 업무 처리는 단호했던 인물이다. 맹사성은 서적 편찬, 향악 정리 등 문화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본인이 음악을 좋아해서 고향에 내려갈 때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녔다고 한다. 맹사성의 이런 소박한 성품에 얽힌 일화들이 있다.
한 번은 맹사성이 아산의 집으로 내려갔는데, 맹사성이 내려간다는 말을 들은 안성의 현감이 맹사성을 만나기 위해 아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맹사성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때 허름한 옷을 입고 소 위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이 나타나자 현감은 재상이 지날 때인데 노인이 길을 막는다며 노인을 쫓아버렸다. 그런데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다는 이야기다.
한 번은 맹사성이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주막에서 젊은 선비를 만났다. 선비는 과거를 보러 올가가던 길이었는데 우연히 맹사성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선비는 맹사성이 재상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농을 건넸다고 한다. 그러자 맹사성이 선비에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한양에 가는공?’
‘과거 보러 간당.’
‘그럼 내가 과거에 합격시켜 줄공?’
‘노인이 왜 선비를 놀리는공?’
선비는 과거에 합격한 뒤 우의정인 맹사성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그때 맹사성이 선비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알아보겠는공?’
그러자 선비가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당.’
이 일화가 유명한 맹사성의 공당문답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소박했던 맹사성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맹사성의 흔적은 충청도 아산의 맹씨행단에 남아 있다. 맹씨행단은 맹사성의 집으로, 맹사성이 은퇴한 뒤 돌축대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은행나무를 심어 맹씨행단이라 부른다. 본래 이 집은 맹사성의 집이 아니라 고려 말의 명장 최영의 집이었다. 최영은 어린 맹사성의 영특함을 보고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은 뒤 이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맹씨고택. 작고 단아한 집이다.>
맹씨행단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했다는 최영 장군과 챙백리 재상 맹사성이 살던 집답게 소박하고 간결하다. 좌의정을 지낸 재상이 살던 집이라곤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집 뒤에는 세덕사라는 사당이 있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괴정(九槐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라는 뜻으로, 황희와 권진이 맹사성을 찾아와 정사를 의논하고 함께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두 그루만 살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맹씨행단의 멋은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이다. 이제는 600살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가을날 맹씨행단을 찾아 은행나무와 맹사성의 소박함을 느껴볼 만하다.
<맹씨행단의 은행나무.>
유관과 비우당
선초삼청(鮮初三淸)의 마지막 한 사람인 유관에 대해서는 전하는 내용이 많지 않다. 그러나 서울 낙산의 비우당이 남아서 유관의 청렴을 전하고 있다. 비우당은 낙산의 동쪽 비탈에 있는 작은 초가집이다. 집은 뒤에 새로 지은 것이라 유관이 살 때의 형태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집터가 좁아 재상이 살던 집터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다.
비우당에는 청백리 유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집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펴고 책을 읽으며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산이 없는 집은 비가 오면 어찌 견디겠소?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욕심 없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 일화로 당시에는 이 집을 우산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우당.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이수봉이 새로 지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해 놓은 집이다.>
그후 이 집은 후손에게 이어지다가 4대째 딸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딸이 바로 조선 최초의 실학자라 불리는 이수광의 어머니이다. 이수광은 은퇴한 뒤 이 집에 살며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지었다. 비우당이란 당호도 이수광이 지은 것이라 하는데, 근근히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이다. 이수광 역시 청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 한다. 이수광이 죽은 후 조선의 선비들은 유관과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의 청빈함을 배우기 위해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과거 때가 되면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이 비우당을 찾았다고 한다. 비우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비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계천의 다리를 비우당교라 불렀다고 한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이 자주동샘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정순왕후는 15세에 단종과 혼례를 치루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사육신의 난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는데 이때 정순왕후의 나이 18세였다.
<비우당 뒤의 자주동샘>
[김휴림의 여행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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