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노래하시던 모습과 목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을 뜨신지 34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동네에선 늘 법 없어도 사실 양반이라 했었지요.
일찍 홀로되신 할머님의 온갖 투정 다 받아주셨고
가난했지만 여덟 식구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일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도와 밭 일을 했을때도 늘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어요.
낮에는 밖에서 농삿일을,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새끼를 꼬셨지요.
주무시는 시간외에는 늘 노래와 함께 사셨기 때문에
저는 은연중에 아버지가 부르시는 노래에 젖게 되었답니다.
제 기억에 가물거리는건
아버지께서 나무 상자속에다 라디오 부품을 조립해서 들으시던 모습입니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대단하셨던 아버지셨어요.
제가 너무 어렸던 탓이라 다섯살 위인 오빠한테 들었는데요.
그 당시 제 고향은 지금의 김해공항 그 곳이었어요.
6.25 직후 미군이 많이 주둔한 공군부대가 있어서 군용전화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봅니다.
한때는 군용 전화기를 송,수화기를 분리해서 마이크로 사용하기도 하셨대요.
제가 자랐던 고향은 열일곱 가구가 살았던 마을이었어요.
마을에서 젤로 부자였던 집이 양송이 버섯 재배를 했는데
어느날 대구에 갔다가 라디오를 사왔대요.
온동네 사람들이 다 부러워 했고 아버지께선 그 라디오 속을 꼼꼼히 살펴 보셨나 봐요.
그리고는 부산 국제시장에 가셔서 라디오 부품을 사오셨대요.
그당시 부품이래야 겨우 10가지 정도였구요.
부품을 사오신 아버지께선 라디오 박스를 나무로 직접 만드셨고
수신 안테나는 집 마당에 있던 버드나무와 버드나무 사이에 철사줄로 연결해서 들으셨대요.
스피크는 종이로 만들어 떨림현상이 일게 하셨구요.
지금처럼 전기 제품이 흔하지 않을때여서 건전지로 사용했지요.
제가 중학교때까지 전기가 없었던 마을이었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원시적인 방법으로 세상 소식을 들었고 노래도 배웠답니다.
평소에는 말씀이 적으셨던 아버지..
대선소주 한잔이면 노래를 얼마나 잘하시든지요.
지금도 아버지의 그 노래 소리가 귓전을 두들깁니다.
유정천리, 마도로스 순정, 잘있거라 부산항, 기타부기, 를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지게 부르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딱 한가지..노들강변 밖에 모르셨어요. 그것도 거의 읽는 수준이셨지요 ㅎㅎㅎ
또래에 비해 옛 노래를 더 많이 알고 사랑하게 됨은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유년시절부터 젖었던 정서라 지금도 옛노래가 좋고 우리의 전통가요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1980년 1월 13일...
부산 구포의 한 작은 예식장에서 눈물의 결혼식이 있었어요.
불과 두달전에 며느리를 보신 우리 아버지..!
며느리 보시면서 받으신 양복을..
허리띠도 못 채우시고 끈으로 바지를 묶으신채..
그토록 애지중지 사랑으로 키우신 고명딸 손잡아 사위한테 넘겨주시느라..
병원에서 3시간 외출증 받아서 사위 절 받으셨네요.ㅠㅠ
간경화 합병증으로 복수가 차서
며느리가 해 온 바지를 입지도 못하시는 상황까지 되셨는데도
고명딸 마저 보내고 떠나신다고 오빠 결혼한지 두달만에 저도 결혼을 했답니다.
가난한 살림에 며느리 보시고 또 사위까지 보시는데 뭔 돈이 있겠어요.
더구나 아버지의 병원 생활이 일년이 넘었고 보험도 없었던 시대라..
겨우 딸래미 손잡아 사위손에 넘겨주신 아버지...!
지금도 가끔 결혼 앨범을 디다보면 아버지의 여윈 모습과 父情에 눈물이 납니다.
신혼여행이라고 경주로 1박 형식만 갖추고 신혼 살림지인 안양으로 왔어요.
근데 그때 부산을 떠나오면서 흘린 눈물은...
아마 한동이는 되었을 겁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구포역에 완행열차만 정차했기 때문에
부산역까지 내려가서 급행열차로 수원까지 왔어요.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포역을 지나쳐 오는데...
세상에.. 눈물 눈물이 그렇게 흐를수가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앞도 안보이고
아버지 계신 병원을 향해 통곡을 하며 왔습니다.
병중에 계신 아버지 뒤로하고
신랑따라 이렇게 가야하나를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답니다.
생전 처음으로 발을 디뎌본 안양..
낮설고 물설은 곳에 도착하니..
눈은 퉁퉁부어 앞이 안 보일 정도였지요.
그렇게 떠나온 부산..
한달 쯤 후에 아버지의 위독함을 알고 다시 내려 갔다가 아버지의 운명을 보았어요.
세상을 뜨시기 전에 부사 사과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네요.
사과중에 최고는 부사니라...부사 한 번 먹어 봤으면...! 하셨어요.
요즘은 흔한게 부사고 종류도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부사 품종을 알지도 못했던 저였던터라..
부사를 찾아서 구포시장을 다 뒤지고 다녔지만..
2월말이라 국광 사과도 귀했던 철이었답니다.
겨우 어느 과일가게에서 처음 본 사과를 만났네요.
노랗게 생겼는데 전 그게 부사인 줄 알고 언능 아버지께로 달려갔지요.
그러나 그건 부사가 아니라 인도라는 품종이었어요.
그것도 이미 수분이 빠져서 퍼석퍼석한...
지금도 실망하시던 그때의 아버지 표정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ㅠㅠㅠ
얼마나 드시고 싶으셨으면 그런 표정을 지으셨을까..!
그것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으셨던 음식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더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지 않으셨어요.
너무나 안타까운 삶을..!!!
쉰 둘이라는 짧은 생애로 마감을 하셨어요.
우리 늙어서 알콩달콩 옛말하며 살자고 다짐하셨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저버리신 채로...
아버지와 노래...!
아버지와 부사 사과...!
참으로 애틋하고 가슴이 저밉니다.
구해서 드시게 하지 못한 불효를 살면서도 지울 수 없었구요.
부사 사과를 볼때마다 아직까지 목이 메입니다. ㅠㅠ
갈대밭 웅덩이가 많았던 고향 김해 대저면..
지금은 부산시 강서구로 되었지요.
겨울이면 온동네 사람들이 양수기로 물을 다 빼고
민물 붕어며 가재 새우 가물치를 잡았어요.
그날은 당연 동네 잔치였구요.
민물 붕어회에다 댓병 소주로 파티가 벌어지면 젓가락 장단에 동네가 떠들썩 했지요.
그때의 그 젓가락 장단의 노래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을 두드린답니다.
그 이유에서였을까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간디스토마로 인한 간질환으로 세상을 뜨셨어요.
민물 생선을 날것으로 잡수셨으니..
그땐 무지하고 가난해서 배부름만 채우던 시절이었네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3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의 모습을..! 지울수가 없답니다.
카페 활동을 하면서 노래 부를때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은연중에 부르게 되네요.
울며헤진 부산항,무정열차,유정천리,기타부기,마도로스 순정..
즐겨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귓전을 맴돕니다.
아버지..!!!
유정천리를 듣고 싶고,
기타부기도 듣고 싶고,
마도로스 순정도 너무나 듣고 싶답니다.
생전에 계셨다면 아마 동네 노래방은 다 누비셨을 겁니다.
결혼 초기만 해도 아버지께서 부르신 유정천리 테이프가 있었는데
이사 다니면서 없어졌나 봐요.ㅠㅠ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을 뵈면
아버지 어머니가 앞에 계시는 듯 하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순간 목이 메여...ㅠㅠ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께서 떠나신지 34년째 되는 날이네요.
쉰 둘...
제가 그 나이를 넘긴지 한참을 지나고보니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가서...
때깔 곱고
최고로 먹음직스러 보이는 것들만 골라서
한바구니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싶지만...
늘 멀리 산다는 이유로..ㅠㅠ
아버지..!
34년 전에 그리도 드시고 싶어 하셨던 부사 사과를..
올케언니께 부탁 해놨으니
오늘 많이 드시고 가세요.!
오늘..
불효 여식은
또 한동이의 눈물을 흘리며
무정열차로 아버지를 그리워 합니다.!!!
첫댓글 비비추 친구의 개인 글이고 눈물로 쓴 思父辭 라 부득히 마우스 우클릭 금지를 하였습니다..아름다운 글 ..좋은 노래..간직 하고저 이렇게 펌 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