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 위백규 선생의 남한산성 한시 2수 ◇
<남한산성의 서장대에 올라 登南漢西將臺>
청려장 짚고 베인 나무 곁에 이르니 / 藜杖排磨折木傍
오래된 성에 맑은 가을날의 첫서리 내릴 때네 / 古城秋霽葉初霜
강은 큰 들을 에워싸서 한양을 조회하고 / 江環大野朝京邑
하늘은 높은 산을 만들어 관문 역할 ①장대해라 / 天作高山壯關防
일없는 장군은 단풍나무들만 바라보고 / 無事元戎觀錦樹
공훈 있어 모신 신묘엔 ②무양을 제사 지내네 / 有功神廟食巫陽
어찌해서 우리나라 천년 보전할 계책에 / 如何保障千年計
③역사에 향기로운 삼량만 얻었던가 / 只得三良竹帛香
①서장대 :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은 대(臺)를 말하며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한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영조 27년(1751) 이기진(李箕鎭)이 왕명을 받아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②무양(巫陽) : 옛날 신무(神巫)의 이름이다. 《초사》〈초혼(招魂)〉에 “상제가 무양에게 이르기를 ‘하토(下土)에 있는 사람을 불러다 나를 보좌하게 할 테니 그대는 이산(離散)된 그의 혼백을 찾아 나에게 데려오도록 하라.’고 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③역사에……얻었던가 : 삼량은 춘추 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면서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중행(仲行)·겸호(鎌虎)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세 학사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말한다.
<남한산성에서 두 번째 노닐며 再遊南漢>
높이 겹겹이 산봉우리 서로 얽히고 얽혀 / 危巒疊嶂互糾紛
해동의 빼어난 경치이자 한양의 주둔지라 / 海東形勝漢陽軍
포대는 하늘 남쪽 벽을 지탱해 주고 / 砲垣撐柱天南壁
①초각은 계북의 구름에 가지런히 임하였네 / 譙閣平臨薊北雲
②삼학사의 충절은 만고의 산과 같고 / 學士綱常山萬古
온조왕의 공업에 삼국 시대가 열렸지 / 溫王功業國三分
서생은 굳이 시사를 근심하지 않으니 / 書生未必憂時事
다시 무망루 위에 걸린 글을 읽어 본다오 / 且看無忘樓上文
①초각 : 원래는 연(燕) 지역인 계주(薊州)의 북쪽 지방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남한산성 주변의 산세(山勢)가 웅장하므로 이에 견준 것이다.
②삼학사 :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말한다. <출처 : 존재집 1권>
역사기행 한시선집「南漢山城」은 홍순석 강남대 교수가 편역, 2020년 10월 3일 문예원에서 펴내 10월 25일 출판기념회가 예정되어 있다.
책을 소개하면 칼러 화보로 남한산성 수어장대, 행궁, 동문, 서문, 남문, 북문, 현절사, 옥천정 암각문, 남한산성 고지도 등을 실었다. 홍순석 교수의 책머리에, 해제 : 남한산성 한시에 담아내다, 1부 남한기사(南漢記事), 2부 남한산성(南漢山城), 3부 서장대(西將臺), 4부 현절사(顯節祠), 5부 남한정자(南漢亭子), 6부 남한산사(南漢山寺), 부록1 남한산성 기문(記文)·주련(柱聯), 부록2 남한산성 시문(詩文) 자료일람 등으로 편집되어 있다. 분량은 365p이며, 숙종·영조·정조와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 등 154명이 지은 한시 354수를 편역하여 실었다. 이중 존재 선생의 한시는 177p와 250p에 2수가 실려 있다.
최근 10월 13일 필자는 고향을 찾아 홍순석 교수와 장흥 문중원로들과 간담회에서 실학자 존재 위백규 선생을 비롯하여 장흥위문 전반에 대해 대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홍교수는 출판한「南漢山城」한시집을 출판기념회에 앞서 원로 문원들에게 증정(贈呈)하고 책에 대해 설명하였다. 책 내용 중, 존재 선생의 한시 2수가 실렸다면서 "왜 존재 선생이 남한산성을 찾아 한시 2수를 지어 남겼는지, 알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해 질문이 있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하였다. 존재 선생의 고조부는 웅천현감공(22세 廷烈 1580~1656)이다. 公은 1603년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내직을 거쳐 1620년 녹도만호(鹿島萬戶)와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 등을 거쳐 1626년 도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 부름으로 체부(體府)의 참모로 재임하는 등 관직을 두루거쳤다. 1636년 7월 조정은 남해안 강화를 위해 公을 발탁하고 통훈대부행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임명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전란의 진관(鎭管) 편제에 따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휘하 제장인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참전하였다. 조선 근왕군(勤王軍)은 남한산성에서 40리(16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 진(陣)을 치고 항전하였으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 1569~1637), 우도병마절도사 민영(閔栐 ?~1637) 장군 등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되어 전사하고 휘하 부대가 군율을 잃자 公이 앞장서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어 웅천현으로 돌아왔다. 인조의 항복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웅천현감공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참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존재 선생은 1764년 8월 한성시 생원·진사 1차, 1765년 2월 생원시 입격, 1772년 과거시험 때 한양에 올라와 이 시기 남한산성을 유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교수는 고조부에 대한 애환(哀歡)을 느끼기 위해 남한산성을 찾은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이제 비로소 해답을 찾았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지은이 홍순석 교수는 1955년생,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것이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강남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인문학장, 글로벌인재대학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포은학회회장, 용인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영문화문화콘텐츠학과 명예교수, 해동암각문연구회장으로 있다. 특히 지역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용인, 포천, 이천, 안성 등 경기도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30여 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한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성현 문화 연구>, <양사언 문화 연구>, <박은 시문학 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 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 노래>, <향토사 연구의 이론과 실제>, <용인학> 등 70여 권의 책을 냈다. 번역서로 <읍취헌 문집>, <봉래 시집>, <부유자 담론>, <허백당집>, <용재총화> 등 10여 권을 펴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