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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리스도인/ 성산 장기려박사
1.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하늘과 땅, 동과 서, 아비와 자식(시 103)….
이 많은 차이를 이으며 놓여진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풀어내겠는가. 그렇다. "침묵은 말없음과 다르고, 말은 지껄이는 것과 다르다"(본회퍼)는 말처럼, 침묵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가 화려한 말들로 꾸며내지 않고, 과장된 몸짓으로 치장하지 않았던 그 '몸말'을 읽어야 한다. 영원을 넘나드는 순간을 이어서 토해 낸 고백 앞에서, 그를 사로잡았던 십자가를 향해 서야 하겠다. 그를 죽여서 그를 살렸던 "주의 긍휼" 앞에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매일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았던 그를 어떤 수식과 미사여구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꾸며내어서는 안된다. 그렇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 전율이 무엇으로 설명되지 않아서, 말문이 막혀서, 그저 "몸이 곤해지는 사랑"으로 풀어 내었던 사람이다.
2. 장기려 박사의 영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말 앞에서 서성거린다. 1970년대 한국의 대학 지성을 잠식하고, 1980년대의 지성마저 장악한 사회 이데올로기에 맞서 등장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기력을 소진해 갈 즈음 우리들은 새로운 돌파구인 것처럼 "영성"을 부르짖게 되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예배의식의 반복으로 인한 신앙생활의 회의적 반 기독교의 깊이 있는 이해와 체험부족으로 인한 내면적 갈급함의 표현",
"산업화-현대화-과학화-세속화로 대변되어지는 현대인의 삭막해진 영적 상태 극복의 열망" 등을 배경으로 튀어나온 '영성'이 쉽게 곡해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신비적이고 영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개념으로 한정짓거나, '세계관'의 개념으로 희석시켜 다시 교리화의 길을 걷게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믿음과 행위의 체계 즉, 신학의 체계와 실천, 표현의 체계로 나누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점이다. 대부분 '이론적 논의'를 의식의 명료함 만큼이나 좋아하는 이들이 쉽사리 행하는 오류다. 이들이 통합성, 전인성, 관계성 등을 첨부시키며 설명하는 "영성이 다시 삶을 핥지 못하는 겉도는 말"이 되는 것은 예견된 여정인 것이다.
근대인의 세계에서는 고야의 블랙 페인팅과 같은 고통의 원형을 이해하지 않는다. 근대인들은 고야가 그토록 비난하던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놀이,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놀이,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경제놀이 등을 소비사회의 한 구조적인 단면에 편승시킨다. 이들은 이것마저 소화시키지 못해 트림한다.
말과는 다른 침묵의 언어(고야가 담벼락에 있는 자신의 풍경화를 지우고, 그 위에 암울한 인간이성의 한계를 블랙톤의 그림으로 덧칠해 버린 그림-블랙 페인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담벼락에 있는 화려하고 심미적인 풍경화를 좋아한다)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뭔가 이야기 되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붙이기가 필요하고 이론화된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보다 명확하고 정확한 것을 찾고 비판하고 신중히 고려하기 위해서라고 그 설명을 덧붙인다. 그 사이에 몸말이 깨어져 몸이 곤해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 있다 하고 그 사랑과 실천을 통합해야 한다고 부르짖게 된다.
영성이 이렇게 읽혀지고 논의된다면 영성은 죽으라는 십자가의 목소리를 지우고 역으로 "살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당위성의 정책명제들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벌써 개신교에서 논의되는 "영성"은 위험수위를 넘어서 근대의 지적 카타콤으로 들어서고 있다. 말없이 규명없이 보여지는 세계, 들려오는 소리들을 빈 껍데기 말에 채워서 사유하고 의식하며 고민하는 근대인의 신음 소리….
영성은 침묵의 언어에서만 읽혀지는 몸말이다. 살갗과 떨어져서 사유되는 언어세계가 아닌 것이다. 영성은 신앙의 윤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옳다'와 '그르다'를 좋아하는 인간의 윤리적 잣대와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이 허술할 때, 그 관계성을 강화시켜 주는 말이 아니다. 내면의 갈증을 풀어주는 푸른 초장의 시냇물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가리키는 이정표가 아니다.
영성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면서 매단 행악자의 외침이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으로 시작되는 말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이나, 십계명을 외우지 못하고 한 줄만이라도 틀리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던 시대의 말들이 아니다. 영성은 몸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산 삶의 말"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1)"를 몸으로 펼쳐낸 삶의 고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려 박사의 영성은 "그가 무엇으로 살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
조심스레 묻게 된다. "무엇이 그를 사로잡았는가", "무엇이 그를 살게 하였는가"를 묻는 물음이 그의 몸말을 끌어내지는 않을까?
1) "하나님께 사로잡힌 삶"
(1) 십자가와 자기 살해 : "하나님의 의를 체험하는 삶" '사랑한다'와 '사로잡힌다'라는 말은 서로 다른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말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이는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지만 무엇에 사로잡힌 이는 자신이 '늘 죽는 이'이다.
마치 '의지한다'와 '이끌린다'의 의미가 다르듯이 절벽의 경사를 오르는 이의 숨결과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의 숨결은 다른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유언대로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여기 잠들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가 평생 한결같이 보여준 그 '섬김'은 일상의 언어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입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피상적인 섬김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섬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장기려 박사의 삶이 그리 남다르지 않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즐겨하는 말이다. 그들은 '구원'을 값싸게 확신한다. 그리고 천박한 신앙으로, 바리새인의 생리처럼 섬김을 이해하고 행하려 한다.
장기려 선생이 보여준 '섬김'을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살해가 있어야 한다. 그곳에는 내가 의지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사로잡혀 이끌리는 모습이 펼쳐진다.
댓가를 바라는, 자기 염원이 풀어지는 것으로 의지하는 힘은 우리를 낮아지게 하는 힘이 아니다.
그를 낮아지게 하고, 그를 이끌었던 힘은 십자가 였다.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지는 절벽의 아득한 자리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 앞에서는 섬김의 성격을 묘사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들뜬 소리들보다 그저 단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여왕이신 지혜여, 기뻐하소서, 당신은 당신의 자매이신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함과 함께 복되도다" 중세의 수사적인 고백이지만 프란치스코는 섬김의 자리는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는 이의 처소임을 고백하였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단순함'의 곁에 다가가 있는 것이다.
장기려 박사 또한 참으로 단순하지 않으면 풍부한 학문을 가졌다 하더라도 소용없음을 헤아렸던 사람이다.
그는 날마다 죽기 위해 하루를 기다렸던 사람인 것이다. 그의 자기살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나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할머니의 믿음과 기도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하여 옛 이야기로 듣고 나 자신을 성경의 역사적인 인물에 동일화시켜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일곱 살 때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지고 순결의 생활로 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던 정치가로 내 동포를 구할 수 있었으면 하였었다.
15세까지는 다윗왕과 같이 천하를 호령하며 블레셋과 같은 적의 나라를 물리치고 우리나라 독립의 꿈도 가져 보았다. 즉 애국심에 기초한 영웅심에서 다윗의 생활에 동일화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장기려, 회고록 중에서)
누구나 가져 보았을 법한 생각을 하던 그가 다윗이 교만하여 간음, 살인죄를 범하고 또 자신에게도 그러한 죄의 요소가 있는 것을 깨닫고 완전한 의를 이루시고,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다른 어떤 이름보다 인간의 한계와 죄에서 의를 이루는 "예수"의 이름을 새기게 된다. 송도고보에서 많은 시간을 정구와 오락(화투)으로 탕진한 어린 시기에 그 자신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술회한다.
인간의 한계를 깨우치는 것, 그리고 그 한계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것은 어거스틴의 노래말과 비슷하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로잡힌 이가 늦게야 당신을 알게 되었고,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현재형의 의미를 쓰면서도 늘 자기 자아가 살아있는 근대인들은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장기려 박사 또한 사로잡힌 이의 노래를 부른다. 그의 삶이 의식적인 행위의 범주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이의 노래로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이 노래는 언제나 그를 죽음 앞에 서게 한다.
죽임의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는 이는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이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위해 언제나 뼈아픈 자기 살해의 두려운 길을 나서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교회를 들어서는 이들과 죽기 위해 교회를 들어서는 이들이 다르듯이, 십자가를 '값싼 은총'으로, 목걸이처럼 걸었다가 떼어두는 이들과 천근만근 죄수의 형틀처럼 죽음의 두려움과 새 생명의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십자가를 마주하는 이들은 다른 것이다.
단 한 번의 자기 살해를 신뢰하는 사람, 단 한 번의 은총으로 해방감을 누리는 사람, 단 한 번의 십자가를 확신하는 사람….
믿음을 자기가 지닌 신념이나 생각의 명료한 체계처럼 여기는 이들….이들과 같이 우리 대부분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마치 자신의 존재영역을 침범하고 자신의 존재를 훑으려는 하이에나처럼 적대하곤 한다. 이러한 삶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전근대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집에 들어와 도둑질을 하는 이에게 말했다. "그거 값이 나가지 않을텐데…이것을 가져 가구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보라고 부른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리숙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로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던 사람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체험한 사람,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에만 담보시키는 사람, 자신의 성과를 자기의 이름을 위해 자랑하지 않는 사람…. 늘 죽기 위해 하루를 기다리는 이들만이 사로잡혀 이끌리듯 살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이다.
'바보'로서의 자기 살해는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 그 '십자가'에 매달리기 보다 지고 따르려는 사람, 자신의 죽음 앞에 서 있는 예수의 죽음을 바라 보던 사람들이 어쩔 도리 없이 끌려들어 가는 세계인 것이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의 신앙관이 다른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었던 할머니의 기도와 그의 아버님이 들려준 성서 이야기, 그리고 어린 시절 그가 받은 기독교 교육, 그리고 이후에 그가 자연스럽게 보여준 천로역정의 경로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무교회주의자'들과 깊은 사귐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난감해한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에게서 무교회주의의 영향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종교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회당에 서 있고 사람의 의식에 치중하고 또 신앙개조 만을 고조하고 음악과 예술적 표현 및 통계만을 들어 평가하게 될 때에는 그 종교는 불건전하다" (장기려, "건전한 종교", 부산모임, 제13호, 2쪽)
그는 외형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외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복음적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강조한다. 그를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런 것들에 매이지 않는 신앙, 신앙적 실천, 삶이 있는 신앙을 추구했으며 신앙의 정통성의 문제보다는 신앙의 정체성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평가한 이상규 박사의 논평은 적절하게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같은 'ㅡ 실제로 없다는 사실이다. 함석헌 선생이 후기 퀘이커의 노선을 걸었다 할지라도 그와 함께 길 걷던 동무들이 모든 편견의 한 범주 속에서 평가되어져서는 안된다. 마치 말년에 장기려 박사가 교회를 참석하지 않고,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며 친한 교우들과의 기도 집회에만 참석했다고 '무교회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김교신 선생의 일화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교회에 대한 애정과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김교신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어도 말씀공부와 설교를 부탁하면 시골 어디든지 자비로 달려가던 사람이었다.
장기려 박사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이가 김교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평범한 한 교우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 것이다.
"조선에는 재화도 필요하다. 힘도 필요하다. 학문도 필요하다. 위대한 작품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히 기독교 청년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제도의 기독교가 아니다. 의식의 기독교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기독교다. 산 기독교다. 즉 그리스도다. 그렇다. 현재의 조선에 절실한 것은 기독교요, 그 기독교는 살아 계셔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그를 필요로 하며, 청년회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그를 필요로 한다. 그를 얻고 우리는 전부를 얻은 바 되며 그를 잃고 우리는 전부를 잃게 된다."(1928년 7월)
김교신 선생의 글처럼 장기려 박사가 영향을 받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뒷전으로 하는 모든 이름들을 경계하는 이들이었다.
장기려 박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길동무들이었을 것이다. 소록도의 나환자들을 돌보며, 그리고 패망직전의 흥남 질소 비료공장의 노동자들을 돌보 잠이 든 김교신의 삶은 장기려 박사의 길에 있어 어떤 이들의 겉도는 말들보다 더 실제적인 힘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장기려 박사는 참 십자가를 체험한 이다. 그렇기에 그를 향해 교리의 정통성 시비를 걸거나 신학과 교리에 무지한 이였다는 평가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사람들의 말들이 엇갈려 일어나는 문제들을 신물나게 쳐다보며 살았던 이가 바로 그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후배들의 싸움에 눈물을 머금었던 그가 일제 치하와 해방 전 후 교회의 대립과 싸움을 보며 어떤 눈물을 흘렸을 지는 눈에 선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공동체다.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고, 그 자리에서 그 의를 구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유형교회니, 무형교회니…
이런 저런 말들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잃어버린 곳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다. 그가 교회 역사와 전통에 앞서 현실적인 응답에 민감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는 의식의 말들과 언어체계에 분명하게 규명되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복음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임을 체험하면서 나누는 이들이다. 그에게서 공동체적이라기 보다 개인적인 성격의 신앙을 발견하는 이는 그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치료하고 그가 복음을 전하며 그가 긍휼을 전하여서 그리스도를 알게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거한다.
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몸을 구현하는 일로 메워졌다. 그는 십자가의 끊임없는 충격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 그가 받은 소명, 그에게 입혀진 가운, 그리고 그에게 허락된 구원 자체도 자신의 공로와 자신의 의식적 구도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고백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살았던 이였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는 "바보"가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익히고, 직업을 얻기 위한 학문을 배우며, 일상의 논리를 앞세우며 복마전으로 우리를 몰고가는 세상으로부터 그들은 "바보"라고 규명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고 일생 담배와 술을 멀리하며 다방, 영화관 출입, 화투놀이를 버리는 그를 향해 '바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아주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장기려 박사는 알고 있었다. 폭격이 떨어지는 평양의 병원에서 집도를 풀지 않고 서울대학의 교수자리를 마다하고 복음병원에서 "나무 수술대"를 찾았던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주님의 손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레오의 말은 프란치스코에게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삶을 사로잡고, 그 가운데 늘 현존했던 이는 누구였을까. 하루에 일백 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드는 모든 것이 절망뿐인 병원에서 버티었던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밤기차로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 기차 안의 눅눅한 사람 냄새를 맡으며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제자들의 냉혹함에 실망하고, 제자들의 싸움에 혼자 숨죽여 울었던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사라진 나무 수술대를 정리하는 순간 그는 누구와 함께 했던 것일까. 돈이 없는 환자를 뒷문으로 탈출시키는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한복을 훔쳐간 도둑에게 끈을 가져다 주라던, 책을 훔치려는 도둑에게 책값을 쳐주는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불쌍한 사람에게 선뜻 수표를 내어주고, 도지사에게 라면을 끓여 내온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일가상 수상을 뒤로 하고 저녁 말씀에 귀기울이고자 돌아섰던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남한테는 자기 것보다 좋은 것으로 주라던 그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었을까. 이 궁금증에 그는 대답하고 있다.
1956년 부산대학에서 그는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성경공부도 좋지만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보자며 '의료보험'에 관한 생각을 꺼내었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주고받던 중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마디의 대답으로 모든 이를 숙연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평생을 누구와 함께 했던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놀렸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되뇌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한 바보라면 좋아" 늘 의식의 명료함을 자랑하며 살고자 했던 지난 날의 청춘이 마냥 부끄러워지는 것은 이 침묵의 언어가 나의 들뜬 언어들을 누르기 때문이다. 나의 단순해지지 않는 욕망의 언어들을 책망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이를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망설이는 나의 언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의 언어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가인의 후예들이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자신을 위하여 이름을 세울 때,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는 이들….하나님의 의를 고대하는 이들….
2)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하나님께 사로잡힌 이의 노래는 언제나 현재형의 사랑고백이다.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 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 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성복, "남해금산")
하나님께 사로잡힌 이들은 언제나 죽음의 길을 걸으며 십자가가 터뜨리는 사랑의 고백을 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어느덧 "잔인한 사랑의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율법을 사랑이라고 외치던 바리새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습관 속에 갇혀 있는 모든 것들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죽음"의 길과 "살림"의 길을 따라 오라 하신다.
(1) "죽음"의 길 "사랑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결국 사랑할 줄 알지 못한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장기려 박사에게 있어 하나님은 근대인들의 이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은 죽었다"라는 기다림 없는 신앙의 언명에 갇힌 분도 아니었다.
그 하나님은 현존하며 역사하는 하나님이었다. 그분이 우리의 '굳은 살'을 도려내시고자 주신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은 죽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은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은 죽음에 있다. 사랑의 죽음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사랑의 철학은 실로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도리어 열심히 이 죽음의 길을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를 소원한 이가 바로 장기려 박사다. 그는 자신이 걸었던 길이 "죽음의 길"이며 그 죽음 뒤에 기다리는 생명을 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 그의 고백이 여기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의도, 행위, 결과라는 윤리적 행동의 요소들로 한 인물을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을 넘어, 그것들이 모두 무용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죽음의 길을 따랐던 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복음병원에서와 같이 자기 몸을 헤아리지 않고 봉사한 것이 그렇다. 서울을 오가며 충실한 근무를 하지 못했다고 하여 스스로 자신의 봉급을 삭감해서 받기도 했다. 물질이나 돈에 대해 무관심했고 사리나 사욕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병원 직원에 대한 임금 지불방식만 보아도 그렇다. 의사, 간호사 등 지위를 가리지 않고무조건 딸린 식구 수에 따라 균등 분배하는 방식 등은 죽지 않는 이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돌려보내고 명절 날 자신을 찾은 후배 제자나 며느리,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은 1천원을 넘지 않았는데 행려자에게는 수표를 건네주던 이였다.
삶의 상처가 있는 이들은 쉽사리 그 상처를 잊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미움과 저주, 불평들이 공전하며 우리들의 삶을 휘젓는다.
그도 돈과 소유에 관한 뼈아픈 기억들과 상처가 있었던 이다. 그 자신이 선친 사업의 실패로 낭패를 겪기도 하고, 수업료가 제일 싼 경성의전으로 진로를 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등록금 3만 원이 없어서 아들 가용을 서울중학교 대신 경복 중학교에 입학시킨 기억들도 그의 생애에는 있었다.
혹독한 시련을 이기며 피난한 그가 천막을 전전긍긍하며 숙식을 해결했던 것 또한 배고픔을 잊고서 3D 업종을 기피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세대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힘겨움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고생과 상처들을 떠벌리기 보다는 오히려 북에 남아 고생할 가족을 기억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보다는 눈앞에 아파하며 누워있는 사람들의 빈 가슴을 채워주고자 했다.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회고록)"고 고백하는 그를 나름대로 기회주의적이며 카멜레온처럼 존재 이양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무지한 평가다. 사람이 욕심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불가의 한용운도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만족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준다.
모두가 살려고 노력할 때 그들의 기도를 채우는 것은 "보물"에 관한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으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마 6:19-34)" 염려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헤매는 곳이 여기다. 예수의 이름을 벗삼아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목사님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오천 원 지폐를 꺼냈다는 이야기(실제로 한 유명한 교회에서 있었던 웃지 못할 일이다)의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신학을 하고, 목회를 준비하는 이들이 죽음 앞에서 멈추어 서는 지점이 여기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옷을 잘 해 입어야 한다"는 어느 목회자의 설교나, 강단에서 "우리 아이가 컴퓨터가 없어 고생입니다"라고 홍보 설교하는 이들…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지 못하는 내 머리를 떠도는 대부분의 근심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만족'은 '죽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사로잡힌 그에게는 죽음의 길이 만족이었으며, 이 죽음의 길이 살림의 길과 맞닿아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윤리의 한 단면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의 영성을 따라감에 있어 위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누군가에게 본이 될 만한 윤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죽음의 길이었다.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참된 제자도인 것이다.
(2) "살림"의 길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있다. 즉,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객체가 우리들인데 사랑의 오묘(비밀)함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의 골짜기에서 헤매는 인류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 때문에 화목 제물로 하신 이 일에 사랑의 깊은 비밀이 있다. 무릇 인간애는 다 수동적이다. 상대자의 어떤 성질에 마음이 끌리어 일어나는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 인격에, 그 기질에, 그 외모가 좋아져서 사랑하는 것이어서 '조건적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의 사랑, 친구의 사랑, 골육의 사랑까지도 다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애는 그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또 자기의 평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장기려, 회고록 중에서)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의'며 '사랑'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언제나 살림의 길에 맞닿아 있다. 이 살림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자기 함몰과 자기 폐쇄적인 구원 윤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우리 의 죽음의 길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향해 있다.
그 죽음의 길은 날마다 이루어 지는 자기 살해를 통해 '살림'의 '의'에 참여한다. 장기려 박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견할 사랑의 단상들이 인간에게 없음을 주지했다.
그리고 자기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살림'에 참여할 길을 일평생 구한 사람이었다. "도리어 열심히 이 죽음의 길을 찾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그는 '죽음'에 맞닿은 '살림'을바라본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행한 '살림'의 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모든 사람의 문제를 예수와 같이 짊어질 수 없는 그인지라, 그는 곁에 있는 이들의 문제와 고민들을 헤아리며 살리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경성의전 조수, 강사 시절에서부터 그러했지만 피난 후 부산 제 3육군 병원에서의 치료, 그리고 영도 제 3교회 창고를 빌려 오갈 데 없는 행려 환자의 치료, 영선 초등학교 뒷마당에 미군 텐트 3개로 시작된 복음 진료소의 시작….
그의 '살림'의 길은 일평생 자신의 죽음과 맞닿은 길이었다. 그가 부산 복음병원 원장직에서 은퇴한 이후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청십자 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 의원을 개원한 것이나 부산의 아동병원, 거제도의 애광원 그리고 보건원의 자문의로 봉사한 것도 이와 같은 길 걷기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에 모든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듯이 그는 "함께 하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 모든 인생을 헌신한 이다. 행려환자들의 구호, 기독 의사회를 통한 구급 활동, 간질병 환자를 위한 장미회의 운영, 쉬지 않고 나갔던 무의촌 진료 등은 두말할 나위 없는 그의 몸말들이다. "참사랑은 무조건, 영원불변, 그리고 자발적인 사랑이다. 이와같은 사랑은 사람 속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4:10)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이 사랑의 실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의 신앙생활을 증거하는 것이다." ' (회고록 중에서)
수많은 살림의 길을 걸었던 그는 단지 자기 죽음의 확인에서 오는 피동적인 베품에 그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사랑의 나눔만이 그리스도의 몸에 거하는 이들이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히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보답'은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도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사랑을 받는 자보다 낫다.
자기를 미워하고 배반하는 자를 사랑할 수 있는 때의 복은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사랑은 생명의 확장이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나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리라"(회고록 중에서)
"몸이 곤해지지 않으면 사랑이 풀어지지 않는다"는 몸말이 그리스도인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죽음과 동시에 이 살림의 길은 더불어 열리는 것이다. 그는 이 길 위에서 십자가를 지고 따랐던 이다. 그의 영성은 흔히 평가받는 것처럼 교회주의와 무교회주의 신앙의 변증법적 고양도 아니며 조합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길이다. 끝없이 이루어 지는 자기 살해 없는 죽음의 길은 요원한 것이며 죽지 않은 이의 살림의 길이란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성산 장기려 박사의 삶과 생각들, 그의 영성을 넉넉히 가늠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쩌면 그 두려움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된 몸이라고 늘 고백하면서도 '죽음'과 '살림'의 길을 걷지 못하는 나의 일상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내가 그리 살지 못한다는 생각….
그리 살지 못하는 삶이 어디 그의 삶에 국한되겠는가. 아침마다 정릉계곡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맡고 있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기를 쉬지 않았던 김교신 선생,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고문 받으며 결국 목숨을 내어놓은 주기철 목사,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 등….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들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들은 모두 매일 죽음의 길에서 '살림'의 의에 참여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의 삶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끌었던 힘은 다른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로 잡음"이었으며 "십자가의 역사"였다. 내가 그리 살 수 없다는 두려움은 어쩌면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한 번도 못 박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제나 의식을 겉도는 빈말들로 실재와 세계의 '제사'들을 헤아린다고 교만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상징처럼 다른 이들의 가슴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몸말이란 죽은 자, 죽는 자에게서만 비롯되는 것이기에….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순교자와 같은 최후를 마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최후에 죽을 뿐 아니라 매일 죽을 수 있다. 그렇다. 매일 죽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행복과 재물을 다 희생하여 죽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다. 그런데 목숨은커녕 이 세상의 재물일지라도 버리는 것을 아껴서 눈앞에서 궁핍을 보면서도 긍휼의 마음을 박는 것과 같은 것은 어떠한 죄인가. 현세와 같이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가 되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궁핍한 형제를 돌보지 않는 큰 죄악을 우리는 반성하여 회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1) "매일 죽지 않으면 안된다" 장기려 박사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두드러진 범주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모든 삶에서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도전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순간을 이어, 그리고 넘어서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목마름, 기다림 때문이었다. 이 목마름은 언제나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의 자리로 들어서게 한다.그가 삶 속에서 한결같이 성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은 '죽음'과 '살림'의 길이 아무렇게나 뻗은 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가 자기의 이름을 세우는 일을 늘 주저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끊임없는 말씀의 묵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말씀이 그의 가슴에서 늘 "사랑의 습관적인 관습"을 지우고, 말씀이 그의 길들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문적인 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며 그것을 단순한 관념의 언어로 이해하지 않고, 현장에서 육화되는 말씀으로 드러내었다. 그는 1942년 '조와 사건'에 얽혀 옥살이를 잠깐 할 정도로 현실적인 응답의 말씀을 구하는 이였다. 김일성을 살피기 위해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에도 그는 성경책을 들고 있었으며, 56년 이후에 시작된 '부산 모임'에서도 연구하고, 강의를 들으며 그 성과들을 나누고자 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케 한다.
(2) "환자를 그리스도에게로" 그는 한 평생 의사로서 살았다. 그렇기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한국의 페스탈로찌로 김교신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부당하듯, 슈바이처에 그가 비견되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폭격 아래에서도 환자만을 생각하며, 한 평생을 의술을 베푸는 것으로 일관한 이였다.
"그동안 나는 공산주의자가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구하지도 않은 의학박사 학위도 얻었고 학위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리스도만을 의뢰하고 의료와 교육에 종사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일성 대학 교수를 지내면서도 나는 주일에는 꼭 교회에 나갔고 환자를 수술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부터 하였다. 극성파 학생들이 종교에 대해서 짖궂은 질문을 해도 나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내가 탄압을 받지 않은 것은 내가 의사이며, 의사로서 할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회고록 중에서)
그는 의사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고 의술 이외의 다른 것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이광수를 대하던 순간에도 그는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던 사람이었다.
치료비를 닥달하며 받아내는 것으로 병원의 운영을 계획하지도 않았고 모든 병원의 동료들이 어려운 상황을 불평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토할 때 그는 "감사"를 가르치던 이였다.
소외된 환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무의촌 진료에서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도 넉넉해 했던 사람이다. 병원의 원장으로 있을때 그의 봉급날을 기다리던 이들은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배고픈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술을 기능주의 적인 한 기술로, 사회적 신분의 상승기로 여기던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난한(?) 의사 였다. 주변 동료들이나 오늘날의 많은 의사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던 이였기 때문이다. 기독 의료인은 성경의 지식과 성령의 인도로 이를 실천할 수 있고 또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며 궁극적으로 환자들이 자유함을 얻어 기뻐하면서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을 기독 의료인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3) "북녘 땅의 하늘을 그리워하며" 그가 쓴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샜는지 모른다"(한겨레신문 1990년 9월 7일자)에는
북녘 땅의 부인과 자녀들을 기리는 사무침과 재회를 이루는 통일을 부르짖는 선생의 절규가 배어있다.
그의 삶 속에서 이 기다림과 그리움은 그를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의 지독한 수절(?)은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도 나름대로 이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을 것이고,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는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결혼은 한 번 하는 것이다"라며 45년이라는 세월에 이르도록 혼자서 살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민족 분단의 아픔을 피부로 겪는 이들은 그 고통이 한 순간일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평생토록 괴롭혔을 가족과의 헤어짐은 기약 없는 헤어짐 속에서도 그로 하여금 북녘의 하늘을 그리워하게 했다.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던 전쟁이 남북의 혈육을 가로지르는 휴전선을 남기자 피난 내려온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새 가정을 꾸린 것에 비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홀로 산다"고 한 그의 집착은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이 시대의 경박한 의식에 경종을 울리는 지표가 되고 있다. 분별없는 결혼과 이혼이 증가하고, 천박한 성의 의식들이 밤마다 이루어지는 도시의 이중성과 젊은이들의 사고를 깨우치는 삶의 좌표가 되는 것이다.
밥상에 북어찜이 오르는 것을 보며 떨어져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던 사람,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을 꿈꾸던 사람….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라며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며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하던 사람….
그가 바로 장기려 선생인 것이다.
4. "죽지 않는 몸,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 그의 업적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그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 고양, 삶을 통한 한국교회 개혁,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의 모델 제시,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의 중요성 등 이밖에도 수많은 주제들이 그의 영성과 삶을 헤아리는 말들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과장된 말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 의식의 숱한 말들이 그의 삶과 영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미련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떻게 그가 살아간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가벼운 말하기'에 젖어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리 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를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람을 짊어짐이 사실은 세상 사람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일 것이다.
(김현의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중에서)
장기려 박사 또한 영원히 우리에게서 부재하는 없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그가 우리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렇기에 그가 살다간 삶의 여정과 이야기들을 모아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으로 그를 살리고자 한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기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살림으로 영원을 넘나들었던 그의 삶을 그의 이름 속에서 기억하고자 한다.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 없이 재잘대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깃털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유하, "자갈밭을 걸으며")
어쩌면 장기려 박사와 같은 기억되는 이름을 만나는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체험을 이고,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움으로 자리하는 것은 '굳은 살'이다. 각질처럼 갈라진 굳은 살….
사랑의 감동이 지나간 자리, 사랑의 고백이 잊혀진 자리, 사랑의 현재형이 더 이상 힘이 되지 않는 자리…. 그곳이 마녀사냥의 자리처럼 우리를 마성적인 의식과 정죄의 세계 속에 가두는 법이다. 그를 따라 나서며 내 속에 있는 '굳은 살'들을 확연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십자가 앞에서 학문적인 성과와 노력들은 추구했지만, 옛 믿음의 선인들이 걸었던 '단순함'의 길은 한 번도 걷지 못한 나를 들추어보게 된 것이다.
무지한 '단순함'이 아니라, 적어도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이들의 고백을 하지 못하였다. 구원의 확신이 나의 면죄부인양 떠들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들의 사람됨을 쉽게 평가하고, 다른 이들의 학문을 너무도 쉽게 바라보던 일들,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나의 안정을 더 내세웠던 일들…. 늘 강한 자로 서길 바라던 일들…. 일기를 지난 몇 년간 계속 써오면서도 내 작은 가슴만큼도 사랑에 아파보지 못한 순간들…. 그분의 영성이란 나에게 요원한 주제일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 얄팍한 언어가 그를 또 다시 가두어 놓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눈이 내렸습니다. 쏟아졌습니다. 하늘은 눈으로 밀폐된 공간이 되었고, 논과 나무숲은 숨을 죽이고 하얀 눈발에 자신의 날개를 넘겨주었습니다. 집도 철길도 모두,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쏟아져 내리는 눈만을 망연히 쳐다보았습니다.
인간의 고통도 피조물의 신음도, 사람이 다니는 길도 창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도, 새하얀 눈에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빼앗겼습니다.
저의 몸도 저의 시야도 휘날리는 눈에 압도되어 소리 없이 묻히고 말았습니다. 내리고 내리는 눈만이 인간의 들녘을 주관했습니다. 눈이 다스리는 나라는 모든 공간, 이 세상 전체였습니다. 용서라는 것, 이것은 폭설만이 펼칠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신학여행" 발제 중에서)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아파오기까지….
"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랑함으로 고통받아야 하며, 사랑함으로 아파해야 한다고 들려주고 있다. 장기려 박사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 자신은 북한의 가족을 기리며, 식탁에 오른 북어찜에도 아내 생각에 어쩔 줄 몰랐던 이이지만, 한시도 사랑하기를, 용서하기를 무거워하며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이 아파오기까지 사랑하며 폭설이 펼치는 아름다움을 풀어낼 줄 알았던 이다. 그를 읽으며, 그를 느끼며, 그를 만나며, 그의 이름으로 그를 늘 기억하고자 하는 지금 다시금 그가 나에게 건네준 말을 되뇌인다.
"몸이 곤해지지 않으면 사랑은 풀어지지 않고, 풀어지는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에게 작은 목소리를 건넨다. "당신 가슴 잔물결로 내게 오는 날은 그래도 그 강은 나의 강입니다. 내 안에서 또 다시 시작되는 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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