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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개혁신보 제468호 <지상강좌>
"복음 전파에 임하는 성도들의 자세"
이종연 교수, 아틀란타 바이블 칼리지
복음 전파, 즉 전도의 본보기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구약 전체를 한 손에 휘어잡고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시면서 가르치신 모습 말입니다. 한편 디다스케인( , 가르치심)과 케뤼쎄인(드러내외침)과 당시 임시적인 방편으로 고치는 것이 본보기 외에 딴 게 없습니다. 선지자나 사도도, 돌 맞고 죽은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가 무너지니 교회가 무너지고, 목사가 무너지니 신학교가 무너지고, 교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쓸려다닙니다. 이걸 제대로 문제점으로 똑바로 자각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가 잘 안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폐쇄적인 사람이다, 막혔다고 할지 모르지만 복음 전파라든지 전도라는 용어조차, 그 개념조차 정립이 안되어 있으면서 선교는 무슨 말입니까? 또 '전도는 국내에 하는 거고, 선교는 딴 나라 하는 거다.' 그게 어떻게 맞는 정의입니까? 이런 철부지들 또는 한편 사업하는 자들, 우쭐거리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러내 외친답시고 탈법을 하고 있습니다.
1. 복음전파와 정통신앙고백
우리는 어서 말씀을 잘 떠받들고 전파하는 가운데 강력한 교회가 돼야 본보이게 됩니다. 그럴 능력 충분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우리 그릇이 이래서 그렇지 언제든지 마태복음 22장 봐도 그렇습니다.
거기 어떤 임금님이 잔치를 벌이는데 사람들이 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안 오자 빨랑 가서 어떤 사람 데려왔는데 이 친구는 그만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난 사건이 생깁니다. 이건 중요한 것을 많이 시사하는 표현이지만 전도와 관련해 뒤에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친구는 예복을 안 입었습니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바른 복음을 드러내 외치면 정통교회에 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길고 어려운 신학이론을 전파해서가 아니라 그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럼 전도 받은 사람은 바른 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끈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결국은 우리가 뭇 사람을 향해서 불사른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적은 우리만이 복음을 듣게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요 큰 사명의 짐을 지고있는 겁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점쟁이들입니다! 아니면 아예 직무유기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높이시고 높이시면 우리 입술을 통해서 구원할 자를 전도하시기로 정하셨겠습니까? 이것을 천사한테 맡기신 것도 아닙니다. 사람한테 맡깁니다. 이거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상대하십니까? 그럼 꼭두각시가 좋겠습니까? 우리를 최고로 대우하십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그래도 내가 좀 성경이나 한 번 읽어야 전도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어디 그렇게 써있습니까? 깨달은 대로, 확신주는 대로 마음에 감동되면, 그래 내가 지금 이런 정도지만 그 부족한 상태를 주께 빌고 나서는 것입니다.
뭇 영혼들은 한편 사람의 판단으로 볼 때 순박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강퍅함이 압도하면서도 말씀을 들을 자를 분명히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일평생 그렇게 분투하는데 한 사람도 교회당 안에 발을 옳게 들여놓지 못하는 경우가 혹 생길지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귓문을 열어야 듣습니다. '이 사람 데려가면 교회에 좋겠다' 그것은 인본주의이고 점쟁이입니다.
바울은 파란만장한 분이지만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나를 건지다니' 하면서 평생 그 마음을 없애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준렬하게 꾸짖으면서 사명을 촉구한 말씀 중에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다" 좋은 말씀입니다. "근데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사망에 이르는 냄새 또 생명에 이르는 냄새"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리고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다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인데, 양상은 둘로 쫙쫙 갈라집니다.
왜 이 냄새를 못 날립니까? 말씀 받을 때 혼잡케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때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못받으니까 의심이 생기고 확신이 안생기고 이거 저거 고민하고 약골이 됩니다. 집약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전도에 대한 사건들의 가르침들을 앞으로 살펴나가겠지만, 성경은 복잡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 가운데서 전도받고 있습니다. 우리만 누리라고 이 말씀을 듣게하십니까? 아닙니다. 본문 말씀 디도서 1장 3절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이것도 전도라고 번역된 부분과 관련해서 샘플로 뽑아본 겁니다. 간단한데 잘 나와있습니다. 앞부분은 "하나님이 드러내셨다." 부정과거 꼴입니다, 그 다음 그 말씀을 꾸미는 수식 절에서는 "나야말로 맡았다." 재미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온통 다 말미암았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다만 바울은 도움에 지나지 않고 드러내외칠 것을 명령받은 겁니다. 바울은 그대로 했습니다 난공불락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핑계댈 거리가 한 가지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물으십니다.
2. 말씀을 드러내심의 세 요소-무엇을, 언제, 어떻게
뭐를 드러내셨냐 할 때 그분의 말씀을 드러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드러낸다는 말은 계시란 뜻도 됩니다. 하여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펼쳐 보이신 모든 것입니다. 지금은 신구약 성경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아직 이때는 성경을 완성하기 전이니까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셨느냐 하면 드러내 외침입니다. 전도로 드러내 외침의 방식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면 언제 드러내셨나? 이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께 속한 때들에게 드러내셨다. 그 때들도 구속적인 시간의 의미로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단수가 아니고 복수에 주목해야 합니다. "때들에게 드러내셨다." 이걸 보면 쭉 대대로 여러 모양, 여러 방식으로 전파한 걸 바울은 말합니다. 에덴 때부터 아브라함, 모세 그 앞서 노아 그 모든 때를 말씀합니다. 이게 다 전도, 전도, 전도로 이어져왔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대사명이 무엇입니까? 드러내 외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걸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감히 나타낼 수 없지만, 책으로 나타내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건 교회 공동 일이고 개별적으로도 부딪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든지 복음의 내용을 전파하는 겁니다.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럼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면서 이 세 요소를 펼치십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그 가운데 어떻게는 드러내외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어디 갔더니 꿈에 환상가운데 하나님 만났다 이런 게 아니고, 드러내 외침을 통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신 경우도 있고, 바울같이 그리스도인 잡으러 쫓아가다 박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전파할 뿐입니다 아니 선포할 뿐입니다. 선포한다는 부정과거 꼴로 케뤼쎄인 그러면 강력합니다.
본보기는 다른데 있는 게 아니고 호 로고스( ) 말씀, 복음 안에 다 담겨있습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되질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처럼 정점이 그리스도께서 있고, 모든 계시기관인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강단에서 선포되는 건 복음 외에 다른 거 선포하게 돼있질 않습니다. 바로 그 때가 카이로스( )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시간의 개념을 썼습니다.
세상 시간의 개념 속에서 전파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시급한 문제를 담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의 관점 가운데서 드러내외칩니다. 창세기부터 쭉 흘러오면서 요한 계시록까지 전체를 놓고, 아니 이것도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2000년 동안 교회의 역사를 두시면서 어떻게 복음을 드러내오셨습니까? 어떤 때는 구원론이 강화되고, 어떤 때는 신론입니다. 시대마다 복음을 짓밟으려고 하는 원수들을 격파하면서 진리의 깊은 것을 드러낸 때마다 큰 일이 있었습니다.
전도가 그런 겁니다! 심심하면 하고 아니면 그만두고 하는데, 전도가 그렇게 값싼 겁니까? 구원과 구원받은 이에게 맡기신 복음이, 시류를 좇거나 풍조를 좇아 방법론에만 몰두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합니까' 그냥 부딪히면 됩니다! 처음에 부딪쳐 얻어터지고 피곤하니까, 이거 안되겠구나, 그러면 기도하고 자기 부족을 말씀 가운데서 찾게 됩니다. 모양이 다 다르고, 처한 경우가 다 다른데 획일적인 게 있을 수 없습니다. 획일적인 것은 성경과 교회 외엔 없습니다. 그럼 분명히 그것으로 말미암아 환희와 풍요로운 삶을 하나님이 보장해 두셨습니다.
이거 다 마련해 놓고 걸어가라는데, 누가 못합니까? 성경에서 앉은뱅이라든가 꼽추라든가 이런 비정상적인 것에 대해서 흠이 있다고 하나님이 꾸짖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온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다고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3. 개혁신학을 믿음으로 드러내 외침
우리는 가장 좋은 교리라는 이 정통의 교리,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손이 대대로 형성해온 개혁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것이고 유일합니다. 이걸 전해야 합니다. 한 발짝 앞서서 악한 자들은 우리까지라도 노리면서 우는 사자처럼 택한자도 삼키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합니까? 오직 성령님의 검, 믿음의 방패로 불 공격 막아내면서, 무시로 성령님 안에서 빌면서 싸웁니다.
싸움 방법, 전투 방법, 복음 전파하는 방식들이 성경 안에 꽉차있습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괜히 딴 사람 하는 것을 흉내만 내려고 합니다. 흉내는 성경 안에서 내도 충분합니다. 어떤 때는 "와 봐라" 이 말에 꺾어진 친구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사도들을 청빙해서 말씀 듣는 가운데 성령님이 임해서 온 식구가 세례 받는 경우도 있고, 어떤 친구는 자살하려다 복음 전함 받고 구원받기도 합니다. 우리를 만날 사람을 어떻게 예비해 놓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기기묘묘합니다. 꼭 병든 사람, 망한 사람 이런 사람만 찾아다닌다고 복음이 전파될 것 같습니까? 아차 하면 버르장머리 나쁘게 만듭니다.
가까이 해서 말씀을 듣는 것처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이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듣는 게 시원찮은 사람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질 않습니다. 차라리 마귀를 통해서 전도를 시키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믿기로 작정된자는 다 들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기회가 되면 살피려고 기독교강요를 죽 한번 훑는데 칼뱅의 말은 시원합니다! 정말 다른 책은 소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과 칼뱅 개인을 높이는 게 아니고 복음의 도에 온 인생을 불태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명쾌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을 본문에서 "나야말로" 주어인 자기 자신을 강조했습니다. 나야말로 맡았다. 그 맡았다는 말이 피스튜에인( ) 다시 말하면 믿는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야말로 믿어졌다" 수동태니깐. 아니면 수동태를 강조한다면 강하게 말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시키심을 따라서 믿어졌다. 드러내 외침, 전도를 믿어졌다. 한국 어법은 잘 안 돌아가지만, 이렇게 됩니다. 받는다는 말이랑 맡긴다는 말이 연락이 있는데 원 뜻은 믿는다는 낱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드러내 외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안일할 수 없습니다. 무사안일 평온한 상황보다 육신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 깊은 그리스도의 고통 가운데 더 좋습니다. 이판사판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편안한 환경에선 복음전파가 안됩니다. 악한 환경이 될 때 복음전파가 됩니다. 그 때 가만히 몸 움츠리지 말고 전파하셔야 합니다.
전파해야 하나님께 무릎 꿇고 찬송이 드려지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내 문제는 언제 없어졌는지 끝장나 있는 겁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구질구질하게 내 문제 가운데서 낑낑매는데 이건 해도 해도 해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날 이끄셨는가? 전파하라고. 편안하다 편안하다 할 때 심판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4. 드러내 외침의 목적과 자세
천사가 흠모하는 게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직무입니다. 목사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 말씀에 참여하고 같이 지지하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온전하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만큼 그 분량 그 키의 충만까지 자라도록 하라고 드러내외치는 겁니다.
맨날 앉은뱅이라면 결과는 빤합니다. 왜? 자라나지 않으니까. 세파가 오면 그러한가 하면서 한참 휘몰리다 10년 지나고, 또 뭔가 휙 비바람 부니깐 조금 움츠리다 나왔더니 머리는 백발, 그래서 뭐 할 겁니까? 인생으로 낳아서 장성하면 꼬마 같지 않다 그랬습니다. 어떤 이유든 다 헤치고 단단히 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은 전부 만신창이 된 사람들입니다. 갈 바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걸 살려낼 길은 복음을 드러내외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갑부도 아니고 무슨 권력자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것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사람한테 인간미 있게 대한답시고 말씀을 가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때로는 교만하게 보이는 것 같을지라도, 말씀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됩니다. 물론 참고 있을 때도 있지만 결정적일 때 '말씀 내지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는구나' 그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는 게 아니라 변호해나갑니다.
그 때는 내가 뒤에 어떤 일이 될지라도 만약 죽으면 죽으리다 에스더가 왕후라는 높디 높은 자리에서 안락을 누렸다면 유대인들은 멸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때를 위해서 왕후로 세운 걸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게 당장 결정 났던 건 아니었습니다. 갈팡질팡 하다가 자기 삼촌이 막 직선적으로 날리니까 깨달았습니다.
특히 부모 형제한테 어영부영하지 마십시오. 물듭니다! 그렇다고 책잡는 행동을 하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최고지 감히 어떤 인간이 그 자리를 찬탈하려고 합니까? 속이는 거고 미혹하는 겁니다. 쭉쭉 자라고 또 자라야 만세 반석 위에서 요동하지 않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선 사람들은 본보기를 보이고 쫙쫙 자라나고, 뒤라고 해서 선두문제 생각하지 말고, 앞선 사람 따라 마셔야 합니다.
숱한 엉터리들의 헛된 열심에 이 귀한 사명의 특권을 뺏길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출판 문제를 보면서, 이게 왜 안될까? 물론 막상 부딪히면 이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만. 제가 그렇다고 두 가지 다 할 수도 없고. 참여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인데 왜 안될까. 기금이나 몇 십억 마련되어 있으면 한다고 끼어들까?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걸 다 마련하시고 베푸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일단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깐 무릎 꿇고. 그러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십니다. 70대 60대 50대 40대 30대 좀 골고루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사귐을 폭넓게 만들면 복음이 굉장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맨날 우중충한 것이 아닙니다.
하여간에 '나는 믿어졌다 하나님의 시키심을 따라 전도를 맡았다' 이것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걸 수식절에 관계절에 집어넣고 주절은 "하나님이 드러내셨다." 확실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야말로 전도를 맡았다" 부정과거꼴을 썼습니다. 요지부동입니다!
5. 전도라는 미련한 '드러내 외침'
목사 그러면은 선교사한테 쩔쩔맵니다. 선교사한테 편지가 오면 뒤에 붙여놓고 3, 4년 만에 한번씩 또 안식년 휴가라고 쉬면서 놀러올 때 집도 얻어주고 또 무슨 특강한다고 하고, 짝짜쿵하는 겁니다. 교회관도 없는 자를 아무나 강단에 세우고, 선교보고를 한다고 슬라이드 돌리게 하고. 교회는 자꾸만 약화됩니다. 그런 거 안 하면 목사 스타일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주보에다 '우리는 열 명의 선교사 돕는다, 우리는 100군데 돕는다' 하지만 똑바른 상태에서 해야 값집니다. 바로 교회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되도록 해야 되겠고 앞으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서 힘 주시면 다음부터는 그런 바른 교회, 간접이건 직접이건 바른 전파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만나게 해주실 때 그런 사귐들이 필요합니다. 건물도 마련해야 되고 그런 뒤에 합니까? 그러다가는 날이 새도 못합니다. 죽은 다음에 전도할 겁니까?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전도의 드러내 외침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자 구원하시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미련하지 않게 전도하려고 그러지 말고, 미련하게 성경 말씀대로 어리석게 드러내 외칩시다. 그러면 믿는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첫댓글 퍼갑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글을 인정하지않는 것은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교회에 대한 너무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심에 대해서 말입니다. 영혼의 무게를 싣고 볼 수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님이라서 보이지 않으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죠..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