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살아온 귀신 쫓는 개
한국의 토종개인 삽살개는 천연기념물 제368호다.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몸, 온몸에 길게 늘어져 두 눈을 가리고 있는 털은 산중의 신선이나 도사의 풍모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도 불렸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삽살개를 신령스런 동물로 여겼고, 귀신을 쫓는 영물(靈物)이라고도 했다. '삽살개'라는 이름 자체가 '귀신, 액운(살·煞)을 내쫓는다(삽 ·揷)는 뜻이다. 삽살개는 '삽사리' '삽살'로도 불렸고, 머리가 크고 털이 길어 사자를 연상시킨다 해서 '사자개'라고도 불렸다.
조상들은 땅 기운이 세서 그 기운을 누를 필요가 있을 때 삽살개를 마당에 풀어놓고 길렀다. 삽살개의 기운이 땅의 기운을 눌러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가 세다는 삽살개지만 주인 앞에서는 반드시 꼬리를 내리며, 집 지키는 개로 타고났다. 온순한 성격에 특별한 교육 없이도 사람 말도 잘 알아듣기로 유명하다.
삽살개 이야기
황희 정승과 눈싸움했던 개
조선 초기 정승이었던 황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기가 꺾일 정도로 눈빛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하루는 개와 눈을 맞추고 한참을 보다가 '나도 이제 늙어서 죽을 날이 다 되었구나'라며 한탄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때 황희 정승과 눈싸움을 벌였다는 그 개가 삽살개다.
"우스운 외모와 달리
김유신 장군의 군견으로
쓰일 만큼 용맹했다."
김유신 장군 등 신라 왕실에서 길렀던 개
영특한 동물인 삽살개는 신라 때부터 왕실과 귀족들이 길렀다고 전해지는데,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삽살개를 군견(軍犬)으로 싸움터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큰 아들인 김교각 스님도 삽살개를 사랑하여 당나라로 고행하러 떠날 때 함께 데리고 갔다. 왕가의 손만 타던 이 개가 민가로 흘러나온 것은 신라가 망한 후였다. 이후 삽살개는 서민의 개로 우리 민족의 애환을 함께 했다.
민화(民畵), 민담(民譚)의 단골 소재가 된 개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에 걸쳐 민가에 흘러든 삽살개는 민화의 모델로 사랑받았다. 삽살개는 악귀가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에 붙여놓는 '문배도(門排圖)'의 단골 모델이었다. 조선 시대 화가 장승업, 김두량이 그린 작품 가운데도 삽살개가 보인다.
전국 곳곳에 삽살개에 얽힌 전설 또한 많다. 한 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고,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주인을 구한다는 충절과 의리에 대한 민담이 주로 전해진다. 특히 술에 취한 주인이 산에서 잠이 들었는데, 산불이 나자 자신의 털에 물을 묻혀와 불을 꺼서 주인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죽었다는 '의구총(義狗塚)'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삽살개다.
일본의 대학살 '삽살개 수난시대'
우리 민족과 공동운명체였던 삽살개가 수난을 겪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였다. 북방으로 진군하는 군인들의 추위를 막아줄 방한용 군수품이 필요해지면서 일본은 개의 가죽에 눈독을 들였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삽살개는 긴 털과 방습·방한에 탁월한 가죽을 가져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1939년, 일본은 견피(犬皮)의 배급 통제에 관한 법령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원피 수급을 독점하는 조선원피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를 통해서만 견피를 유통하도록 했다. 견피 수집이 국책이 되었으니 함부로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 같은 토종개 박멸 작전은 세계사에도 그 유례가 없었다.
'조선 토종개 홀로코스트'
또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군용 식량과 털가죽을 얻기 위해 삽살개를 대량 도살했다. 백정들에게 개를 잡을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대신, 개가죽을 공출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전국의 개들이 사라졌다. 개들은 군수품 공장에서 일본군이 입고 신을 외투와 장화로 바뀌어갔다.
삽살개뿐만 아니라 한국 토종개인 경주개 '동경이'도 핍박의 대상이었다. 민족말살정책이 행해지던 1932년, 일본은 자신들이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기는 고마이누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동경이를 모조리 잡아들여 씨를 말렸다. 신라시대 때부터 사육된 이 경주개의 가장 큰 특징은 꼬리가 없거나 짧은 것이다. 민간에서는 꼬리가 없다는 것 때문에 '병신'이라 천대 받아 많은 수가 줄어들었던 동경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서히 사라졌다. (현재 동경이는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됐으며, 이는 토종개로서 진돗개(제53호)와 삽살개(제368호)에 이어 세번째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 평균 약 10~15만 마리의 한국 토종개들이 도살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학살된 토종개의 수는 이를 훨씬 웃돈다. 삽살개만 해도 약 50~100만 마리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진돗개 천연기념물 지정은 일본이 했다
1930년대에 들어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 토착견에 대한 연구와 보존 열기가 고조됐다. 아키타견, 기주견, 홋카이도견 등을 보호하는 모임이 조직됐고, 일본 정부에서도 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국가적인 보호 운동을 폈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진돗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진돗개를 보존하려는 순수한 뜻이 아니었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 사상을 앞세우면서 조선의 토종개를 보존한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꼼수였다. 이로써 아키타견, 기주견, 홋카이도견 등 일본의 토종개들과 유사한 외모를 갖고 있던 진돗개는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진돗개 외의 다른 토종개들을 모조리 족보 없는 들개로 취급하면서 마음놓고 잡아들일 수 있게 하여 일본 개들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삽살개를 비롯한 우리 토종개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독도에 삽살개를 기증한 이유는
하지홍 교수
日의 악랄한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서
삽살개를 멸종위기에서 구한 사람은 경북대 생명과학부 하지홍 교수였다. 하 교수의 아버지는 1960년대부터 삽살개 보호를 위해 30여 마리를 키워왔는데, 1980년대에는 고작 8마리만 남은 상태였다. 미국에서 유전학을 전공한 하 교수는 1985년 귀국 직후 사재(私財)를 털어 삽살개 복원에 나섰다.
"교수 월급으로 하기 힘든 일"이라는 아버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하 교수는 논밭을 다 처분하면서까지 삽살개 복원에 매달렸다. 그는 모든 삽살개로부터 DNA를 뽑아내 번식에 방해되는 형질을 없앴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1992년 삽살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홍 교수가 독도에 기증한 이후, 우리 개 삽살개는 현재 '독도 지킴이'로 활약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