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마가(Mark) 처럼(딤후 4:9-11)
2026.10.1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최근에 아세안 게임에서 일부 종목 선수들이 금메달 보다 병역면제를 더 강조한 것으로 인해, 가장 축하 받아야할 때에 오히려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3경기에서 16분밖에 뛰지 않았던 어떤 선수는 예비군 모자를 쓴 사진까지 올렸다. 철없는 어린 선수들이라 할지라도 속마음을 절제하면서, 좀 더 사려 깊은 언행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이 보다 더 철없는 모습일 때가 참 많이 있다. 심지어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언행이나 생각이 철없는(또는 정신 못 차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평생 배워도 부족한 존재들이다. 어쨌든 그들은 아직 어린 선수들이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처럼 변화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Mark)이다. 마가는 한 때 철없는(?) 실수도 했지만, 그러한 실수들을 발판 삼아서 결국은 위대한 전도자로 쓰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젊은 시절의 실수를 딛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마가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헤아리며, 새로운 삶의 결단과 소망을 발견하는 시간되기를 바란다.
마가의 전도사역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집트의 종교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전체에서 기독교인 비율은 약 3%~4% 내외로 추산된다. 이들 지역에서는 98-99%가 무슬림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독보적으로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은 나라가 있다. 바로 이집트(애굽)이다. 이집트는 전체 인구 1억 1천만 명 중에 약 90% 내외가 무슬림이자만, 기독교 인구도 약 8-12%정도인 약 1,000~1,200만 명이다.
이집트의 기독교를 보통 “콥틱 기독교” 또는 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 Church)라고 부른다. 현재 이집트 전체 기독교 신자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해 있다. 콥틱(Coptic)이라는 말의 뜻은 ‘이집트인(Egyptian)’이라는 뜻이다. 전체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이슬람 주류 사회에서 직업, 취업, 세금 등에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교회에 대한 폭발이나 테러 위험 속에 늘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틱 기독교인들은 이 천년 가까이 기독교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이들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어릴 때 오른쪽 손목 안쪽에 푸른색 작은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사진). 그 의미는 "나는 평생 예수님을 믿는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입니다"이다. 현재 카이로 외각에 있는 '쓰레기 마을(콰얏엘 자발린)‘로 불리는 모가탐 지역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며 살아가는 콥틱 기독교인들이 많고, 특히 그들의 ‘동굴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집트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이다. 마가는 120명의 제자 중의 하나로서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가의 집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과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래서 흔히 ‘마가 다락방’이라는 표현을 쓴다. 마가의 또 다른 이름은 ‘요한’이다. 마가는 로마식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그래서 둘을 합하여 ‘마가 요한’이라고도 한다. 마가의 부친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외삼촌은 유명한 바나바(Barnabas)이다. 그러니까 마가의 집안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이었고, 마가는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 출신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마가 기념교회 동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KbIuKhPgbFU
그런데 성경에는 마가의 생애에 특이한 기록들이 몇 군데 있다. 마가복음14장 51~52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줄행랑을 쳤다.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1-52)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자신의 부끄러움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구절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베 홑이불(신도나)”은 값비싼 속옷인데, 아마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의 체포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잠자리에서 뛰쳐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무리들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자 그것을 버려두고 알몸 상태로 달아난 것이다. 이때 마가는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 보면, 제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섰다. 그 이유는 1차 선교여행 중간에 마가가 선교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험한 선교의 여정을 부잣집 도련님 출신의 마가로서는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사도 바울의 눈에 무책임하고 철없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분노를 일으키게 충분했다.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7-39)
그런데 이랬던 마가가 은혜를 받고 완전히 변했다. 마가는 젊은 시절의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벗은 범으로 도망치고, 선교여행을 중단하면서 바울과 바나나를 갈라서게 했던 철없던 모습들을 완전히 만회했다. 만회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세웠다. 또한 로마에서 사도 베드로의 통역을 담당하였고,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마가복음을 기록하기 까지 했다. 만약 그가 과거의 실수에만 자책하며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위대한 전도자로서 노을 같은 인생의 이모작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인 디모데후서 4장 11절 말씀에 보면, 마가를 다시 만나기 원했다. 젊은 시절의 마가에 대해서 분노했던 사도 바울도 말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마가는 말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그가 순교하던 장면은 참혹했다. A.D. 68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세라피스(Serapis)라는 이방신을 믿던 이교도들의 축제와 기독교의 부활절이 같은 날에 겹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이교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던 교회를 습격했다. 이교도들은 마가를 체포한 뒤, 목에 두꺼운 밧줄을 묶고, 그 밧줄을 말(馬)에 연결했다. 그리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돌이 많은 알렉산드리아 거리와 해안바위 지대를 질질 끌고 다녔다. 이로 인해서 온몸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었고, 목에 묶인 밧줄로 인해 결국은 순교했다. 마가의 시신은 훗날 베니스의 상인들이 이탈리아의 베니스의 ‘산 마르코(Basilica di San Marco)’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그가 순교한지 1900년 만인 1968년에 유해 중 일부가 이집트로 귀환했다.
이러한 마가의 일생을 보면서 다시금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은 아무리 믿음이 약하고, 철없고 어리더라도(실제 어리든, 영적으로 어리든) 또는 지금은 깊은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변화 시켜서 귀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예전에 서산에서 사역할 때, 교회 옆에 큰 밭에서 농사를 짓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봄에는 흉년이 들었던 밭에서 가을에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생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마가의 변화된 모습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부단한 자기부인과 내려놓음을 있어야 한다. 늘 그렇듯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도 마가처럼 철없고 무지했던 일들에 너무 매이지 말고, 오히려 지금부터 믿음 안에서 주님만 바라보며 새 출발을 하자. 그래서 인생의 이모작의 시간들을 마가처럼 하나님에 귀히 쓰임 받고, 많은 사람들 유익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