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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 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란
고전과의 대화 [정형시학], 2016, 겨울호. 사람 사는 하늘 아래, 「일신이 사자니」 -좌상객 이정보 그리고 지음 지기 홍성란(유심아카데미 원장) 대제학의 사설시조 일신一身이 아사자니 물것계워 못 살니로다 피皮ㅅ겨튼 갈랑니 보리알튼 슈통이 잔벼록 굵은벼록 왜벼록 는놈 긔놈의 비파琵琶튼 빈세기 사령使令튼 등에어이 갈귀 사메여기 셴박휘 누른박휘 바금이 거져리 부리 족 모기 다라 기다 모기 살진 모긔 야읜모긔 그리 화진에 오룩이 주야晝夜로 뷘틈 업시 물거니 쏘거니 거니 거니 심 당버리에 어려이왜라 그듕에 아 못견딀슨 오뉴월五六月 복伏더위에 쉬피인가 노라 일명 「물것타령」이라는 이 작품은 도승지∙한성판윤∙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판중추부사 등 고위관료를 지낸 ‘좌상객座上客’ 이정보李鼎輔의 사설시조다. 이정보는 숙종 재위 19년인 1693년에 태어나 영조 재위 42년인 1766년에 타계하였으니 ‘가곡’의 황금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좌상객 이정보. 좌상객이란 조선시대 ‘가곡’ 연행의 판을 열어 소비하고, 연행의 주체인 가객歌客∙가기歌妓∙악공樂工 등을 후원하는 ‘풍류주인’이니 요즘말로는 패트론patron이다. 좌상객을 말하기 전에 이들이 향유한 가곡이란 무엇인가. 알다시피, 이 사설시조는 조선시대에 ‘가곡’이라는 창법과 ‘시조’라는 창법으로 즐긴 노래텍스트였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시대 시조작가들이 창작하는 시조라는 정형시가 조선시대에는 클래식 성악곡으로 가곡창과 시조창이라는 음악예술로서 연행되었고 당시 음악예술의 주류는 가곡창이었다.
14세기 사설시조 심재완이 엮은 『교본校本 역대시조전서歷代時調全書』에 수록된 105편이나 되는 이정보의 작품 가운데 사설시조는 12편에 이른다. 강원도 관찰사와 대사간을 지낸 신헌조申獻朝(1752~1807)도 자신의 시조집 『봉래악부蓬萊樂府』에 「더위타령」 등의 사설시조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저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맞서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변안렬( ~1390)은 「불굴가不屈歌」를 부르고는 이승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이 「불굴가」를 학계는 이미 최초의 사설시조로 보고하였다(황패강, 「대은大隱의 ‘불굴가’ 보고」(『국어국문학』, 국어국문학회, 49∙50호, 1970). 시조발생초기부터 평시조로는 주체 못 할 노래는 평시조의 기본틀을 지키는 가운데 이를 확장하여 사설시조로 노래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설시조는 서민문학도 아니고, 조선후기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전기의 사설시조 적층자료가 적은 것은 구비전승물의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멸실되어가는 노래를 더 이상은 손 놓고 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며, 가객 김천택이 그간 구비 전승된 노래를 모아 『청구영언靑丘永言』(1728)이라는 가집歌集(노래책)을 엮었다. 엮을 때 말미에 ‘만횡청류蔓橫淸流’라는 항목을 따로 만든 이후, 우리가 이들 사설시조에 괄목하게 된 것이다. 결코 조선후기에 와서 사설시조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엮음 그 묘용妙用 이제 「물것타령」을 음미해보자. 초장부터 원성이 높다. 이 한몸 살자 하니 무는 것들 때문에 못 살겠다는 것이다. 무는 것들이 무엇인가 중장에서 한바탕 엮어 짜는데, 피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통통한 이, 잔 벼룩 굵은 벼룩 비파같이 생긴 빈대 새끼, 다 큰 등에 각다귀 사마귀 흰 바퀴 누런 바퀴 바구미 거저리, 온갖 모기며 밤낮없이 물고 쏘고 빨고 뜯는 물것 때문에 나같이 비루먹은 사람은 살기 어렵다고 주워섬기며 엄살을 떠는 것이다. 18세기 어법이기도 하거니와 옮겨 적는 이의 오류도 있을 수 있어 이정보의 품은 뜻을 그대로 옮기기는 어려워도 내용의 대강은 그렇다. 그런데 온갖 물것 중에 이정보가 진짜 괴로운 것은 무엇인가. 종장에 이르기를-, 그중에 차마 못 견딜 건 오뉴월 복더위에 쉬파리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삼복더위에 아랫것들 보는데 근엄한 대제학 영감은 벗고 살 수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눈앞에서 어른 알짱거리던 쉬파리가 낯짝에 붙어 간질간질 귀찮게 구는데 참말이지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그저 웃자고 수다스럽게 떠벌이며 연석의 흥을 돋우는 노래다. 그렇기는 하되, 이정보가 다만 웃자고 떠벌이기만 한 것일까. 그 당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가렴주구苛斂誅求도 가렴주구지만 요즘으로 보자면 ‘문고리삼인방’이나 ‘비선실세’라는 이들의 국정농단도 눈엣가시요 복장 터질 일이니 사람 사는 하늘 아래 그때인들 왜 그런 일이 없었겠나. 그러니 강직한 이정보가 “사령튼 등에어이”라 한 것처럼 사악한 관료나 시정잡배 같은 하급관리들을 웃음거리 삼아 온갖 물것들로 비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물것타령」은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를 저본으로 한 14종의 가집에 기록될 만큼 인기를 누렸는데, 『병와가곡집』과 『해동가요』에는 작자가 이정보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가집에서는 작자를 밝히지 않아 실명씨화 무명씨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체 높은 양반이 취흥이 올라 난잡하게 노래를 부르기는 했어도 내가 지었다고 밝히기는 주저했기 때문이거나 노래가 하도 인기가 좋다보니 누가 지었는지 보다는 누가 불렀는지가 더 중요하게 되어 작자를 잃고 유통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때 노래책에는 작자 대신 가자歌者의 이름이 오르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대중가요 가수 김세레나가 부른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노래의 작자를 모르고 말하듯이. 그래서 대부분의 사설시조들은 무명씨 소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사설시조에 능한 좌상객 이정보는 4대가 대제학을 지낸 벌열가閥閱家 출신인데, 대제학 재임 중에는 영조에게 직언을 하여 삭탈과 원격지 방출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런 강직한 인물이
간밤의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이져라
와야瓦冶ㅅ놈의 아들인지 즌흙에 드시 사공沙工놈의 뎡녕인지 사어沙於로 지르드시 두지쥐 녕식인지 곳곳지 두지드시 평생平生에 처음이오 흉중이도 야롯라 전후前後에 나도 무던이 격거시되 참 맹서盟誓지 간밤 그 놈은 아 못니져 노라
하면서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최고조에 이른 성적 만족도를 남성들의 다양한 행위로 묘사하는 가운데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게끔 만들었다. 진흙을 착착 이겨 기와를 잘 만드는 기와공 같은 놈, 삿대를 잘 놀리는 사공 같은 놈, 땅속을 뒤지며 다니는 두더지 같은 놈을 열거하는 대제학의 이 말놀이. 그런가 하면 님으란 회양금성淮陽金城 오리남기 되고 나 삼사월三四月 츩너츨이 되야 그 남긔 그 츩이 낙거믜 나븨 감듯 이리로 츤츤 져리로 츤츤 외오프러 올이감아 밋부터 지 곳도 뷘틈업시 주야장상晝夜長常에 뒤트러져 감겨 이셔 동冬셧 람비 눈셔리를 아모리 마즈들 플닐줄이 이시랴
하면서 오리나무와 칡넝쿨이 얽히듯이, 납거미가 나비를 빈틈없이 츤츤 감아 풀 수 없게 얽히듯이 임과 얽혀 떨어질 수 없다는, 관능적 표현이 두루 절경이다. 이런 야하고 질펀한 만횡청류를 대제학 이정보가 『병와가곡집』에 여러 편 남기고 있으니 참 반갑고 재밌다. 자연의 진기眞機 또는 인간의 본성을 가식 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엮으면서 ‘음왜淫哇하고 뜻이 한루寒陋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하지 않으나, 그 유래가 오래 돼서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으니 특별히 끝에 붙인다’고 한 만횡청류를 이정보는 왜 이렇게 많이 지었을까. 연석의 취흥도 취흥이겠지만 『병와가곡집』의 편삭대엽編數大葉이나 『가곡원류』 이본異本들에 나타난 엇편旕編과 같은 악곡으로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건 아닐까. 이정보는 노래선생이었으니까. 엇편이나 편삭대엽은 신출 악곡으로 아무나 부를 수도 없고, 아무나 가르칠 수도 없었다.
노래선생의 성악교습소 「물것타령」 중장이 보여주는 물것들의 나열과 수식 확장도 명품이지만 「간밤의~ 」와 「님으란~ 」의 중장 엮어 짜는 솜씨는 과연 득음의 경지 아닌가.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18세기 이정보는 사설의 요체가 중장의 엮어 짜기에 있고 사설의 묘법이 종장 결구의 도약과 반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설의 중장은 가곡창의 3장에 해당하는데 이 3장은 가자들이 목자랑을 한껏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사설시조의 대가 이정보 문하에는 가객과 가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정보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지금의 서울 강남 학여울 근방에 성악교습소를 내자 수많은 가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가기 계섬桂纖이 있었다. 계섬이 이정보를 찾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노래로서 이름을 얻고 있었으나, 그의 문하에 들자 그때까지의 명성은 다 버리고 초보자로서 스승이 제시한 악보대로 노래를 배웠다. 수년간 공부하여 내공을 쌓고 드디어 계섬은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게 된다. 스승을 따르되 스승의 체體는 버리고 법法을 따라 계섬의 소리 개성 곧 ‘계랑조桂娘調’를 완성했던 것이다. 지음 지기 그리고 만남이라는 것 계섬은 종이었다. 일곱 살에 아비가 죽고 열두 살에 어미마저 죽으니 나라에서 종친이나 공신 등에게 배당하는 구사丘史에 예속된 몸이 되었다. 그중에 창을 배워 명성을 얻으니 귀족이나 한량들의 연석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러이 여길 정도가 되었다. 계섬은 이정보의 문하에 드나들던 금가지반琴歌之伴으로 가객 이세춘, 금객琴客 김철석, 가기 추월, 매월과 함께 활동한 가객그룹이었다.
계섬은 서울의 이름난 기생이다. …(중략)… 태사 이정보가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 (1763년) 음악과 기생으로 자오自娛하면서 지냈는데 공은 음악을 깊이 사랑하여 늘 곁에 두고 그의 재능을 기특히 여겼으나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악보에 따라 교습하여 수년의 과정을 거치니 계섬의 노래는 더욱 향상되어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에 전국에 이름을 떨쳐 가기들이 서울에 와 노래를 배울 때 다 계섬에게 몰려들었다.(세상에서 이를 계랑조라 일컬었다.) 학사대부들이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도함이 많았다.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계섬전桂纖傳」이 전하듯, 이정보는 ‘사람됨이 도탑고 눈은 초롱초롱 빛나는’ 계섬을 가장 사랑하여 늘 곁에 두었다. 이정보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히 여긴 것이요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니 과연 후대에 전할 지음知音 지기知己 아닌가. 이정보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자기 스타일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계섬에게 맞는, 계섬의 소리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도했다. 계섬이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當唱, 心忘口, 口忘聲, 聲裊裊在屋樑’니 바야흐로 그 경지를 따라 소리 개성을 찾기 위해 향기鄕妓들이 계섬 앞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스승 이정보가 죽자 계섬은 마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곡을 하며 슬퍼했다. 그때 궁궐에 큰 잔치가 있어 국局을 설치하여 준비를 하니 여러 기생들이 날마다 국에 모여 연습을 하였다. 계섬은 왕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공의 상식喪食을 살폈다. 국은 공의 집에서 멀었기에 관리들은 계섬의 노고를 불쌍히 여겨 말을 빌려 국에까지 타고 오게 하였다. 또 그녀가 곡을 하다가 목소리를 잃을까 걱정하니 계섬은 곡도 못하고 훌쩍이기만 하였다. 장례를 마치자 음식을 마련해 공의 무덤에 성묘를 가서는 종일토록 술과 노래와 통곡을 반복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공의 자제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묘지기를 책망하니 계섬이 크게 한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가지 않았다. 한량배들과 노닐면서 술이 좀 들어가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그치지 못하였다 고 「계섬전」은 적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국은 장악원掌樂院 가까이 설치되었으니 지금의 명동 부근이다. 명동에서 학여울까지 조석으로 제수祭需를 살폈다니! 명동에서 한강을 건너 학여울까지 어떻게 조석으로 조문을 다녔을까. 그 가상하고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하여 국에서 말을 내주었으니 일급 가기로서 계섬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계섬은 자신의 사람됨을 알아주고 자신의 노래를 알아주던 지음知音 지기知己였던 스승이 없는 노래인생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노래를 버린 계섬은 엄청난 재화로 떠받들어주는 부상富商을 만났으나 다 버리고 가진 재물을 팔아 정선군 산중에 가옥과 전답을 마련하여 밤낮으로 불경을 외며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勢道家 홍국영(1748~1780)이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가기로서 계섬은 그의 구사丘史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의 잔치에서 계섬이 한 곡을 하면 잔치마당에 가득한 경대부들이 다투어 비단과 돈을 내렸다. 마침내 홍국영이 정조에게 쫓겨나자 계섬은 기적妓籍을 벗게 된다. 그 후, 계섬은 「계섬전」을 쓴 심노숭과 한집안 사람인 이세춘 가객그룹의 후원자 심용(1711~1788)을 만나 경기도 파주 가까이 살았다. 산중에 집을 짓고 채소를 가꾸며 논마지기를 고용 부쳐 자급하면서 마늘과 고기를 끊고 날마다 불경을 외며 보살로 살아갔다. 이정보 사후에 계섬이 ‘다른 풍류자리에서 노래를 하면서 왕왕 눈물을 그치지 못’한 것은 지기를 상실한 뒤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 아닐까. 단 한 편 남긴 그녀의 작품이다.
청춘靑春은 언제 가며 백발白髮은 언제 온고 오고 가 길을 아던들 막을낫다 알고도 못 막을 길히니 그를 슬허 노라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느니, 스승의 영지에서 금가지반과 어울리던 그 꽃답던 시절은 가고 시나브로 찾아온 백발에 밀려오는 회한을 노래했을 것이다. 심노숭에 의하면 62세 때 말을 타고 파주로 그를 만나러 온 계섬은 말이 유창하고 센머리가 없었다 한다. 그 뒤에도 정조가 베푸는 나라 잔치에 불려가기도 했다니 명창名唱답다. 명인은 명인을 알아본다. 이삭대엽二數大葉에서 소용騷聳이며 엇편과 편삭대엽까지 다양한 악곡을 모두 석권한 대제학 노래선생 이정보의 혜안이 ‘사람됨이 도탑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히 여겨 늘 곁에 두고’ 당대 최고의 가자로서 계랑조를 완성하게 하였다. 스승의 체를 버리고 법을 따라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는 명창名唱. 명인은 명인을 알아본다. 오늘 여기, 좌상객 이정보와 가기 계섬의 만남을 후대에 길이 전할 지음知音 지기知己로 기록한다. * 이정보李鼎輔(1693~1766)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 17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함경도관찰사, 비변사제조, 도승지, 형조판서, 우참찬, 공조판서, 이조판서, 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하였고 1763년 정계를 은퇴하였다. 105편의 시조가 현재 전하고 있으나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4대가 대제학을 지낸 명문 벌열가 출신으로 대제학 시절, 영조에게 한 직언으로 삭탈과 원격지 방출을 거듭했던 강직한 인물이다. 18세기 당시에는 가객들 중에서도 김수장 정도만이 사설시조를 창작할 때였는데 현전하는 이정보의 시조 가운데 12편이 사설시조다. 이정보의 사설시조는 대제학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음란하고 질펀한 성담론을 다룬 내용이 많아 과연 이정보의 작품인가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그런 점에서 심노숭의 「계섬전」은 이정보가 다작의 사설시조 작가임을 인정하게 한다. 이정보는 좌상객으로서 가객그룹을 후원하고 문하에 수많은 명창을 배출한 노래선생이었다는 점이 그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 홍성란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성균관대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시집 『황진이 별곡』 『따뜻한 슬픔』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단시조60선 『소풍』, 조운문학상 수상 기념시집 『바람의 머리카락』 , 한국대표명시선100 『애인 있어요』, 현대시조100인선 『겨울 약속』, 시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현대시조감상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중앙시조대상 수상 작품집』 등.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유심작품상·중앙시조대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이영도시조문학상·한국시조대상·조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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