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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의 인연[편집]
1995년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왕손들을 초청했을 때 대표단을 파견하여 화산 이씨 대표단과 함께 베트남을 찾아갔다. 도무오이 당서기장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들을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 및 왕손 인정 등의 만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화산 이씨
화산 이씨(花山 李氏)는 베트남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본관인 화산(花山)은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유래[편집]
화산 이씨는 비(非)중국계 귀화 성씨로 중시조는 이용상(李龍祥)이다. 시조는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황제인 이태조 이공온(李公蘊·Lý Công Uẩn)이며, 중시조 이용상은 7대손이며, 6대 황제 영종 이천조(李天祚·Lý Thiên Tộ)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또한,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과는 종손과 종조부 사이며, 1226년 정란에,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표류~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그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었으며, 그를 화산군으로 봉해져서 정착을 도왔으며, 원나라 침입 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어,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현황2000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 현재 남한에 230여 가구, 1,7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본관이 있는 황해도의 집성촌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1]베트남과의 인연[편집]
화산 이씨 종친회에서 1995년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도무오이 당서기장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들을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 및 왕손 인정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베트남 인사가 한국을 방문할 경우, 이들을 방문하는 것도 관례가 되어, 화산 이씨가 양국 관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종친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한다.[2]
2002년 12월 베트남의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 왕자의 일대기를 공연했다.[
리 왕조
왕조 창설[편집]
Ceramic stupa with lotus, bodhi leaf, dancer decoration, Hanoi (11th-13th century)
1009년 북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전 레 왕조(前黎朝)의 장군 이공온(베트남어: Lý Công Uẩn/ 李公蘊)은 군권을 장악 해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리 왕조(李朝)를 수립하였다. 이공온은 1010년 수도를 호아르(베트남어: Hoa Lư/ 華閭)로부터 탕롱(昇龍)[1] 로 옮겼다. 3대 황제인 리 성종은 1054년 국호를 대월(베트남어: Đại Việt/ 大越)이라고 했다.
리 왕조는 제4대 황제 인종(仁宗)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까지의 베트남의 왕조는 북송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책봉 체제를 인정하였는데, 리 왕조는 베트남 왕조로서는 처음으로 이를 어기고 스스로 국왕을 결정하여 자주성을 보였다.
그리하여 북송과 리 왕조간에는 자주 외교적·군사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송은 신종의 즉위 후, 재상 왕안석의 주도로 적극책으로 변해 베트남 경략을 도모했다. 이것에 대해서 리 왕조는, 1075년에 기선을 억제해 리 트엉끼엣(베트남어: Lý Thương Kiệt/ 李常傑 이상걸)을 총대장으로서 수륙으로부터 송에 침공해, 흠주(欽州), 염주(廉州), 옹주(邕州)등을 공략하였다. 송나라측은 반격했지만, 전과를 들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베트남은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친하였고, 국경을 확정하는 것과 동시에, 국가로서의 위세를 나타냈다. 1174년에는 남송으로부터 안남 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되어 책봉 체제 안에서 독립성을 가지는 나라로서 인정되었다.
1175년, 영종(英宗)이 승하하고, 고종(高宗)이 제7대 황제로서 즉위 했다. 그러나 고종의 연이은 실정으로 국내 각지에서 농민에 의한 반란이 다발해 왕조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1210년, 고종이 죽자 혜종(恵宗)이 즉위 했다. 그러나 혜종도 아버지 고종과 같이 어리석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국내는 한층 더 흐트러졌다. 이 시기에 혜종의 외척에 해당되는 쩐투도(베트남어: Trần Thủ Độ/ 陳守度 진수도)의 권세가 커지게 되었다. 쩐투도는 1224년 혜종을 폐위하여 그 딸인 소황(昭皇)을 왕으로 옹립 했다. 쩐투도는 다음 해, 혜종을 자살에 몰아넣은 다음, 소황과 조카인 태종을 결혼시켜 태종을 황위를 양위하는 방식으로, 쩐 왕조를 열었다.
한국에서는, 혜종의 숙부 이용상이 멸망 시에 고려에 피신했다고 한다. 그 후손인 한국의 화산 이씨종친회의 대표단이, 1995년에 베트남을 방문했다.
리 왕조의 정치체제[편집]
리 왕조 시대는 과거 제도의 실시에 의한 유능한 인재의 등용, 유학·불교의 장려등 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치 관료 체제로서는 미숙한데다가, 왕조 자체도 지방 호족의 연합 맹주적 존재였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리 왕조의 후손[편집]
리 왕조의 후손은 대한민국의 정선 이씨와 화산 이씨가 있다.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베트남어: 李陽焜 리 즈엉 꼰[*])은 인종의 세째 아들이자, 5대 임금 신종의 아우로 신종과 왕위를 다투다 북송으로 피신해 있다가, 송 휘종 때 금나라의 침입을 피해 1127년 고려로 망명하여 경주에 자리를 잡았으며, 9세 정우원의 대에 와서 강원도 정선에 자리를 잡았다.[2]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왕인 이태조 이공온(베트남어: Lý Công Uẩn/ 李公蘊)의 7대손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베트남어: Lý Thiên Tộ/ 李天祚)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1226년 정란을 맞아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을 데리고 바다 너머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하였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이용상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어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여 정착을 도왔다. 원나라가 침입했을 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들이 베트남에서 살기를 희망할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제공하며,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종친회를 초청하여 기념식을 진행한다